지난 1월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은 변함없이 '응답하라'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는 사라진 '골목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고, 추억이 된 학창시절과 문화들을 불러왔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왜 하고 많은 80년대의 시간 중에 88년이었을까?

그저 '추억'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시대를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지난 25일 방송된 '빨간선생님'은 말해준다.

ⓒ KBS


'빨간 선생님'의 시대적 배경은 1985년. 장소는 문화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 경상도의 한 여자 고등학교이다. 85년은 3S 정책(섹스, 스포츠, 스크린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배기 정책') 아래 <어우동(감독 이장호)>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던 해였다. 하지만 3S처럼 노골적인 정책과는 달리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학생들의 호기심은 '훈육의 대상'으로 통제받기도 했다. 학생들은 통제의 눈을 피해 '성'에 대한 궁금증을 이른바 '빨간책'으로 풀었고 그 '빨간책'을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을 <드라마스페셜> '빨간선생님'은 풀어낸다.

변태남 사랑에 눈뜨다

주인공은 김태남(이동휘 분)이라는 노총각 선생이다. 웬만한 여학교의 노총각 선생이라면 학생들에게 인기남일만도 하지만 그의 별명은 '변태남'. 한창 호기심 많은 여학생들에게 그는 고루하고 완고한 '단속'의 상징일 뿐이다. 게다가 가르치는 과목조차도 수학이다. 교감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그는 앞장서 학생들을 '다잡았'으며, 그 수단으로 '매'는 빠지지 않았다. 온갖 언어적 모욕과 수모는 그의 특기였다. 아, 노골적인 촌지와 편애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제 아무리 노총각 선생이라 해도 여학생들에게 그는 로망은 커녕 원흉일뿐이다. 특히 아버지가 안 계신 장순덕(정소민 분)에게 '다음에는 아버지를 모셔오라'며 가슴에 못을 한 번 박는다. 반골 기질이 다분한 순덕은 이런 말을 무신경하게 내뱉는 그를 아예 선생 취급 하지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머리 길이를 갖고 한바탕 학생들을 뒤집은 그가 퇴근 후 우연히 들른 책방, 그의 눈에 띈 한 권의 '빨간 책'이 있었으니, 장군의 아내와 부하가 사랑을 나누는 내용의 금서였다. 몰래 책을 사온 김 선생. 문제는 읽은 후 그가 함부로 버린 그 책이 순덕의 손을 거쳐 성문화에 갈급한 전교생에게 순식간에 퍼져 버린 것. 소설 속 장군이 아내와 부하,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던 서재 앞에 등장하는 그 순간, 그 책은 '계속'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 다음 편에 대한 갈증으로 순덕은 2편을 이어 쓰게 된다. 하지만 순덕의 창작 생활은 곧 태남의 눈에 띄게 된다. 

지금까지 태남의 방식대로라면 당연히 순덕을 비롯한 그 '빨간 책'을 돌려 본 학생들을 '취조'하듯 닥달하며 처벌해야 했지만, 1권에 감동을 받았던 독자 태남은 예의 그 훈육 방식 대신, 순덕에게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도 하라는 말까지 돌려 말하며 순덕에 소설 쓰기를 독려한다. 그는 순덕 버전 '빨간 책'의 독자가 된다. '좀 더 야하게'라는 후기까지 적으며.

하지만 독자였던 태남과 달리, 그 빨간 책의 존재 사실을 알게 된 교감은 그 책의 저자를 색출하고자 한다. 이어 가정 환경 조사서를 뒤져 타자기를 가진 순덕의 집으로 향한다. 단서는 '마침표'였다. 장군의 아내와 부하의 위험한 사랑을 그린 소설의 속편에는 마침표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표가 고장난 타자기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순덕의 집에서 찾은 타자기는 빨간 책 속편을 친 그 '마침표가 없는 타자기'가 아니었다. 순덕의 타자기가 무사했던 이유는 애독자 김 선생의 기지 덕분이었다. 그 일로 김 선생은 순덕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되고 순덕을 이해하고 비밀 친구로서 순덕과 편지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순덕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하던 김 선생은 책을 소각시키고 순덕을 좋은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

변태남에서 참 스승으로의 비극적 행로

김 선생의 우려는 그가 태워버린 책으로 잘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순덕의 학교를 벗어난 빨간 책은 날개를 달고 서울로 상경한다. 어느날 학교에 들이닥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은 이 책이 '장군'에서 국가 원수가 된 '그 분'을 떠올리게 한다며, 국가 원수 모독의 혐의가 있는 '금서'라 한다. 이들은 지은이를 색출해내기 위해 순덕이 있는 여학교에 방문한다.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갈 뻔한 빨간 책이 이제 금서가 돼 돌아온 것이다. 해프닝의 중심에 서게 된 김 선생. 여전히 순덕에게 김 선생은 교감 바짓가랑이 사이까지 들어가는 속물이지만, 그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던져 순덕을 구한다. 결국 '빨간 선생님'이 돼 학교에서 쫓겨나버린 김태남, 그의 진실이 순덕에게 닿기까지는 몇 년이 시간이 더 필요하다.

ⓒ KBS


학생이 쓴 빨간 책에 반해버린 '웃긴' 해프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 해프닝이 벌어진 1980년대라는 시공간을 드러내며 웃지못할 비극으로 귀결된다. 교감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었던 속물 선생님은 학생이 쓴 책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뜸과 동시에, '인간적 감수성'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가 되찾은 인간미는 그에게 '진정한 선생'으로서의 길을 되찾게 하면서 동시에 처절한 대가를 선물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었던 순덕의 아버지에 이어, 좋은 스승이 된 김태남이 걸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행로는 바로 '인간적인 선택'이 비극을 담보할 수밖에 없는 80년대 한국을 상징한다. 이것이 <응답하라>가 그리움과 추억만으로 그 시절을 소환할 수 없는 진짜 이유다.

1년만에 돌아온 KBS <드라마스페셜>은 극본 공모 가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그간 TV드라마가 그려내지 않았던 신선한 소재와 시절을 담으며, 드라마스페셜의 존재감을 내뿜는다. <응답하라>의 '웃기는 친구'였던 이동휘는 노총각 변태 선생님에서 참스승까지의 성장을 '페이소스' 넘치게 그려낸다.

웃음과 연민, 슬픔을 넘나드는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빨간 책이란 소재를 통해 비극적인 80년대를 설득력있게 그려낸 권혜지 작가와 유종선 피디의 조합은 최근 KBS 드라마 약진의 저력을 증명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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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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