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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꾹 다문 돼지, 설마 생각하는 것일까

급식 잔반에 고기는 드물다. 잔반 검사를 받으러 불쑥 내민 식판에 남은 것은 거의가 나물, 김치 같은 야채, 채소였다. 어쩌다 어금니 빠진 녀석들이 질긴 갈빗살을 뜯지 못하여 안타까운 고기 몇 점을 내버려둔다.

그마저도 부드러운 부위는 앞니와 송곳니로 요령껏 잘려 씹긴 상태이다. 잔반통으로 굴러가는 통통한 살점을 버리는 쪽이나 바라보는 쪽이나 아쉬워한다. 초등학생은 고기를 사랑한다.

선생이나 학생이나 요리를 하지 않는 입장에서 음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학교에 가면 국자 쥐고 불 앞에 설 일 없고, 칼 잡고 재료 손질할 까닭이 없으니 완성된 상태로 즐기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돼지와 소, 닭은 고유의 이름보다 닭 매운 볶음, 오향장육, 설렁탕 따위의 요리 이름으로 더 자주 접했다. 원재료가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몰랐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 도서관 창가 옆 선반에서 생각하는 돼지의 옆모습을 봤다.

정확하게는 어둠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꾹 다문 돼지가 고개를 지그시 쳐들고 있는 그림책 표지였다. 허공에 대고 돼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돼지가 감상에 젖기도 하는가? 뻣뻣한 털로 덮인 하얀 포유류는 사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리는 삶겨 족발이 되고, 뱃살은 저며 저 햄이 될 먹잇감이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낯설었다. 책 제목은 평범하게 '돼지 이야기'.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돼지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돼지
ⓒ 이야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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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60cm, 길이 2m에서 평생을 사는 돼지의 일생

돈육 김치찜으로 배를 두둑이 채운 아이들과 교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돼지 이야기'를 꺼내자 표지에 돼지 턱살이 귀엽게 접혔다고 경춘이가 낄낄거렸다. 유쾌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를 2010년 겨울로 데려갔다.

6년 전 우리나라에는 돼지가 1000만 마리쯤 살고 있었다. 이들 중 새끼를 얻기 위해 기르는 어미 돼지는 평생을 폭 60cm, 길이 2m쯤 되는 사육 틀 속에서 지낸다.

"어! 여기 감옥 같은데, 막 쇠창살 있고"
"7번 방의 선물에서 봤어. 전등도 저런 거 맞아."

듣고 보니 그랬다. 사육 틀은 돼지들 사이의 먹이 다툼을 방지하고 운동량을 줄여 태내의 새끼들이 잘 크게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 통로를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쭉 뻗은 구조가 흡사 감옥이었다.

1.2 제곱미터의 각진 공간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는 돼지는 종신형 독방 수감자였다. 어미 돼지는 1년에 2번, 새끼를 낳을 때만 분만사로 옮겨진다. 그곳에서 새끼를 낳고 젖을 물리는데 분만 틀이 몸을 가두고 있어서, 새끼들을 핥아 주거나 안아 줄 수 없다.

"왜 새끼를 못 안아줘요?"
"새끼가 어미 몸에 깔릴까 봐 고정시켜놓은 장치야."

대답하고도 이상했다. 어미에게 깔려 사망하는 새끼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돼지들이 조심하고 삼갈 것이지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또 새끼 돼지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빨과 꼬리가 잘린다. 젖을 먹을 때 상처를 내지 못하게 하고, 서로 꼬리를 물어뜯지 못하게 하는 조치다. 그 후 3주 동안 젖을 빨고 어미와 헤어진다.

새끼와 어미는 3주만에 헤어진다.
 새끼와 어미는 3주만에 헤어진다.
ⓒ 이야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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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전국을 휩쓴 구제역, 뚜렷한 치료법이 없었다

"진짜 꼬리가 없네. 이빨은 어떻게 자르지?"
"꼬리 조금 있어. 근데 거의 없어."

우형이랑 동헌이가 뚫어지게 돼지 엉덩이와 입가를 살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기관이 없다. 승희가 소름 끼친다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동호는 자기 앞니를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확인했다. 새끼들과 헤어져 사육 틀로 귀환한 어미 돼지는 몇 주 뒤 인공수정으로 다시 임신을 한다.

좁아터진 공장형 우리에서 돼지들은 질병에 취약하다. 상품을 지키기 위하여 사육사는 예방주사를 맞히고 사료에 항생제를 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11월부터 구제역이 전국을 휩쓸었다.

돼지가 구제역에 걸리면 열이 나고 입과 발굽, 젖 등에 물집이 생기며 침을 질질 흘린다. 식욕이 줄고 다리를 끌다가 죽기도 한다. 치사율은 최대 55%에 달하며 전염력이 매우 강하다. 아직까지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라 축사에서 돼지가 한 마리라도 구제역에 걸리면 둘레의 모든 돼지들을 살처분해야 한다. 사람들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 놓고 돼지들을 몰고 갔다.

"몽둥이로 두들겨 패나 봐. 어떡해..."
"전기 막대로 지지고 있어. 전기 고문인가?"

아기돼지가 떨어지는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기돼지가 떨어지는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한다.
ⓒ 이야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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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밖으로 내몰린 돼지, 검은 구덩이로 쫓겨갔다

갑자기 밖으로 내몰린 돼지들은 영문도 모른 채 검은 구덩이로 쫓겨간다. 가축을 살처분할 때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는 방법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한 배려인데, 실제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두꺼운 포크레인 삽이 두려움에 떠는 짐승들을 떠민다. 돼지들은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생지옥으로 추락한다.

"어미가 앞발로 안 떨어지려고 버티고 있어요."
"새끼가 옆에 와서 젖을 먹어요. 어미가 쳐다봐요."
"으아. 저기 떨어져요. 어미가 끝까지 새끼를 봐요."
"흑흑 돼지가 죽어요. 저기 돼지 너무 많아요."

책은 설명이 없다. 다섯 장면이 그림으로만 펼쳐진다. 문자가 비어있는 공간을 아이들이 울먹거림으로 채웠다. 배경이 점점 캄캄해진다. 포크레인이다. 검은 눈처럼 위에서 흙을 쏟아붓는다. 돼지가 바라보는 허공이 흐려진다.

먼지와 흙과 모래와 자갈이 사정없이 쏟아내린다. 아...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성이 들렸다. 선생보다 여리고 순수한 존재들은 뺨에 눈물이 맺혔다.

돼지들에게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이었다. 깊은 구렁과 바깥세상을 이어 주는 것은 돼지들이 썩어갈 때 생기는 가스를 뽑아내기 위해 설치한 플라스틱관 뿐이다. 2010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모두 331만 8천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되었다.

"꼭 그렇게 다 죽여야 돼요?"
"너무 병이 잘 퍼지니까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병에 안 걸리게 하는 방법은 없어요?"
"감옥 같은 사육 공장에서 안 키우면 병에 덜 걸릴 거야."

약간 흥분한 채로 듣고 있던 경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하네. 그냥 다 같이 건강하게 키웁시다 하고 약속하면 되잖아요."

전부 돈 문제 때문에 그런 거라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투입과 산출, 수익과 경쟁, 치열한 시장, 허술한 법 체계... 돈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심어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다만 절망스러운 환경에서 아파하는 동물들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음날 점심 밥상에 오른 닭봉 오븐구이, 문득 겁이 났다

다음 날 점심 밥상에 닭봉 오븐구이가 올라왔다. 경성이와 영희는 식판을 보더니 돼지고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했다. 데리야끼 소스를 발라 바삭하게 구워낸 닭봉은 식욕을 자극했다. 어른 중지 손가락 길이라 먹기 딱 알맞은 크기. 문득 겁이 났다. 대체 얼마나 많은 닭들이 날개도 못 펴는 우리 안에서 길러졌을까?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으려나. 머리가 어지러워 밥 먹는 속도가 툭 떨어지자 오른편에 앉은 금빈이가 괜찮냐고 했다. 어제 본 돼지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랬다고 하였다.

"그냥 맛있게 먹고나서 방법 생각해요. 선생님이 사람도 동물이라고 했잖아요. 돼지도 동물이니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둔한 교사보다 훨씬 명료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동물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꼬맹이들과 머리 맞대고 짜낸 방법은 '동물복지축산' 하는 농가의 제품을 이용하기, 동네에 있는 개 고양이 괴롭히지 않기, 애완동물 버리지 말고 끝까지 키우기가 나왔다.

사람도 살기 힘든 시대에 무슨 동물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이용해 여러 혜택을 보고 있다. 소와 오리와 돼지가 행복해진다고 해서 인간 삶이 훼손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가축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그것을 먹는 사람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존엄할 수 있는 이유는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옳은지 생각할 능력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돼지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돼지 이야기

유리 글.그림, 이야기꽃(2013)


태그:#돼지, #구제역, #학대, #동물권, #사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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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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