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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대 토요타 프리우스(좌로부터)
▲ 프리우스 ◇1~4세대 토요타 프리우스(좌로부터)
ⓒ 한국토요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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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0일은 토요타자동차 역사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날이다.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 양산차를 세상에 내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 차는 훗날 '하이브리드 왕국 토요타'를 만드는 주춧돌이 된다.

지난해 세계 자동차 업계를 뒤흔든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이후 시장의 관심은 디젤에서 친환경차로 넘어갔다. 자동차 회사의 '클린 디젤'이라는 달콤한 수식어에 속아 넘어갔던 각국 정부와 소비자들이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환경차에는 전기차와 수소차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하이브리드차가 대세다. 그중에서도 하이브리드 원조인 프리우스는 디젤 게이트 이후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자동차 중 하나다.

프리우스는 1993년 '21세기의 자동차를 제안하라'는 당시 토요다 에이지 명예회장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개발됐다. 하지만 당시엔 누구도 프리우스 프로젝트가 자동차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

"당시 토요다 에이지 명예회장이 머지않아 21세기도 오고 하니 중장기적으로 자동차 본연의 모습을 고민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오기소 사토시 토요타 상무)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토요타는 그해 9월 'G21'이라는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다. 'G'는 지구를 의미하는 글로브(Globe), '21'은 21세기를 의미한다. 10여 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모여 '21세기의 자동차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차세대 승용차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에 떠올린 '21세기 이슈'... 개발로 연결되다

◇오기소 사토시 토요타 상무가 프리우스 탄생 비화를 설명하고 있다.
▲ 오기소 사토시 ◇오기소 사토시 토요타 상무가 프리우스 탄생 비화를 설명하고 있다.
ⓒ 한국토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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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말 팀은 21세기 승용차상을 '덩치는 아담하지만 실내가 넉넉하고 연비는 1리터에 20km를 달리는 차'라고 정하고 회사에 보고했다. 토요타는 이듬해 2월 섀시, 차체, 엔진, 구동계 전문가와 생산기술 엔지니어를 참여시킨 'G21' 2기 팀을 새롭게 구성하고 양산을 전제로 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간다.

팀장은 '초보' 수석 엔지니어 우치야마다 다케시(현 토요타 회장).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미래의 차를 개발하는 데는 오히려 선입관이 없는 신출내기 엔지니어가 적임자라고 회사가 판단한 것이다.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어요. 가령 팀원과 함께 21세기에 부상할 이슈를 생각했는데 교통사고 급증, 여성의 사회적 참여 확대, 출산율 감소, 노령인구 증가, 정보기술의 융합 등이 포함됐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바탕으로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에너지와 환경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론을 내렸어요."(우치야마다 다케시)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친환경차는 변방으로 치부됐고, 보수적인 조직 문화 때문에 사내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는 세계적으로 하이브리드 기술이 미비한 수준이었고, 배터리나 모터의 성능도 빈약했다. G21 팀도 어쩔 수 없이 하이브리드를 배제하고, 1.5리터 직분사 가솔린 엔진에 매달렸다.

"리터당 28km는 달려야지..."

◇우치야마다 다케시 토요타 회장
▲ 우치야마다 다케시 ◇우치야마다 다케시 토요타 회장
ⓒ 한국토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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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5년 5월, 와다 아키히로 부사장은 우치야마다 팀장을 불러 충격적인 명령을 내린다.

"1리터에 21km의 연비를 가지고 21세기의 차라고 할 수 있겠소? 현재 14km/l의 두 배인 28km/l는 돼야지. 그럴 수 없다면 이 프로젝트는 끝입니다. 하이브리드로 시험 차를 제작해보시오."

와다 부사장은 기존 엔진을 조금 발전시키고 고효율 변속기를 결합해 만든 차는 새로운 차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결국엔 이 명령이 프리우스 탄생의 출발점이 된다.

이때 토요타는 'BRVF'라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BR(Business Reform)'은 업무개혁, 'VF(Vehicle Fuel Economy)'은 연비 절약을 뜻한다.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이다. G21 팀도 결국 새로운 자동차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하고 개발 방향을 전면 수정한다.

'프리우스의 아버지'는 현 토요타자동차 우치야마다 다케시 회장의 별명이다. 1969년 신차를 만들겠다며 토요타에 입사한 그는 40대 후반까지 그저 그런 경력의 간부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1994년 느닷없이 기회가 찾아왔다. 제2차량개발부 부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부서의 임무는 21세기 토요타를 대표할 최고의 차를 만드는 것.

◇토요타 코롤라 자동차
▲ 토요타 코롤라 ◇토요타 코롤라 자동차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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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에 기존 기술을 조합해 코롤라의 1.5배 연비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임원진은 "1999년까지 기존 코롤라의 2배 연비를 내고, 배기가스도 줄인 차를 만들어라. 실패하면 면직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해법은 하이브리드(Hybrid)였다. 토요타가 하이브리드차를 유행시키기 전까지 '하이브리드'란 단어는 그저 '혼혈 또는 잡종'이라는 말로 생물학 서적에서나 볼 수 있었다. 사실 하이브리드차의 개념은 19세기 말 포르쉐에 의해 처음 세상에 선보였다. 그러나 포르쉐와 폭스바겐, 제너럴일렉트릭, 크라이슬러 등이 차례로 도전했다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양산에 실패하며 잊히게 된다.

당시 기술로 하이브리드차를 만드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따랐다. 배터리와 전기모터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고, 파워트레인도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토요타는 그 시절 RAV4 EV(전기차)를 개발 중이었다. EV 개발부는 토요타 내에서 하이브리드 기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전기모터나 배터리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BRVF 팀에 합류하면서 하이브리드 개발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앞서가는' 차의 탄생

◇1997년 개발한 토요타 라브4 EV
▲ 라브4 EV ◇1997년 개발한 토요타 라브4 EV
ⓒ 한국토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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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94년 말부터 반년 동안 80개나 되는 하이브리드 설계안을 검토했다. 엔진으로 발전하고 전기모터로 바퀴를 굴리는 방식까지 아울렀다. 그 결과 두 개의 전기모터를 쓰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로이터 편집국장 폴 인그래시아의 저서 '엔진의 시대')

직렬식과 병렬식의 장점을 아우른 직병렬식이다. 변속기가 필요 없는 이 방식은 훗날 '토요타 하이브리드 시스템(THS)'으로 불리게 된다.

이 방식은 엔진과 두 개의 전기모터를 짝지어 첫 번째 전기모터는 엔진에 힘을 보태고 감속할 땐 발전기로 변해 배터리를 충전한다. 두 번째 전기모터는 엔진의 힘을 이용해 배터리를 충전하고 동시에 변속기 역할을 한다.

한편 G21 팀은 양산차 개발과 동시에 1995년 도쿄모터쇼 무대에 올릴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콘셉트카도 준비했다. 가솔린 엔진과 한 개의 전기모터. 무단변속기(CVT)를 짝지어 30km/l의 연비를 내는 구성이었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 콘셉트카의 파워트레인 역시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그러나 G21 팀은 '토요타 에너지 매니지먼트 시스템(EMS)'이라고 명명했다. THS란 명칭은 전기모터 두 개를 쓰는 오리지널 시스템을 위해 아껴놓은 것이다. 동시에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전략을 감추는 효과도 노렸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이때부터 프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프리우스는 라틴어로 '앞서가다'라는 뜻이다.

◇1세대 프리우스의 엔진룸
▲ 1세대 프리우스 엔진룸 ◇1세대 프리우스의 엔진룸
ⓒ 조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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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까지 프리우스의 기본적인 디자인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21세기를 위한 차인만큼 20세기 내에 시장에 내놓아야 했는데 개발 속도가 너무 느렸다.

1995년 오쿠다 히로시가 토요타의 새로운 사장으로 내정되면서 G21 팀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98년 말로 계획했던 프리우스 출시를 1년이나 앞당기라는 사장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G21 팀은 1995년 10월 도쿄모터쇼에 하이브리드 콘셉트카 'EMS'를 선보이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때 토요타는 내부적으로 일반 판매를 목표로 한 프리우스 시제작차의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시제작차에서 문제가 속출했다.

"1995년 11월 초 부품을 모아 시제작차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처음엔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어요. 우선 컴퓨터 시스템이 먹통이었고, 전기모터와 엔진이 돌아가면서 말썽을 일으켰어요."(오기소 사토시)

G21 팀이 시제작차를 완성한 이후 최초로 움직이기까지 무려 49일이나 걸렸다. 이때도 매끄럽게 움직이진 못 했다. 전기모터로 5m 움직이고 나면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고, 500m 움직이나 싶었는데 돌연 멈추는 식이었다. 오기소는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터득하는 과정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가까스로 움직이게 했지만 양산화까진 갈 길이 멀었다.

◇1995년 프리우스 콘셉트카 'EMS'
▲ 프리우스 'EMS' ◇1995년 프리우스 콘셉트카 'EMS'
ⓒ 한국토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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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큰 문제는 두 배의 연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내구성도 확보해야 했다. 양산화를 위한 대응도 시작해야 했다. G21 팀이 못 박은 출시 시기는 1998년 말. 이 계획에 맞추기 위해서는 개발을 더욱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데, 개발진의 귀를 의심하는 결정이 또 한 번 내려지게 된다. 원래의 예정보다 1년 빠른 1997년에 출시하라는 신임 오쿠다 히로시 사장의 지시였다.

"21세기에 앞서 출시하기로 했으니 1999년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끼린 21세기는 2001년부터니까 2000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 2000년은커녕 1997년으로 앞당겨졌죠. 죽을 각오로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오기소 사토시)

(* 하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더드라이브(www.thedriv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프리우스, #하이브드리자동차, #친환경차, #토요타, #코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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