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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설 작업을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운문사 스님들
 제설 작업을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운문사 스님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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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의 벼들은 노란빛을 더해가며 탱글탱글 영글어 가고, 과수원 사과는 빨간빛을 더해가며 포동포동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지금 여기서 보는 그들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그랬었다는 듯 천연스럽게 탱글탱글하고 태연자약하게 포동포동합니다.

하지만 한 톨의 볍씨가 저리 잘 영근 알곡이 되고, 앙상하기만 했던 사과나무가 저리 잘 익은 사과를 주렁주렁 달기까지는 우여곡절의 시간과 파란만장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뭄의 갈증은 견디고, 질식시킬 것 같은 장마는 버텼습니다. 뿌리를 흔드는 바람도 견디고, 태워 죽일 것 같은 햇살도 견뎌야 했습니다. 꿀을 빨아먹겠다고 대드는 곤충들의 습격도 견뎌야 하고, 설자리를 내놓으라며 위협하는 잡풀들의 공격도 견뎌야 했습니다.

그렇게 견디고, 저렇게 극복하며 지내다 보니 이리 어엿한 알곡이 되고 저리 맛깔난 사과가 되었습니다. 볍씨 하나가 알곡이 되고, 텅 빈 사과나무에 포동포동한 사과가 열리기까지는 일구월심 풍년을 바라는 농부의 맘이 있었고, 끊임없이 흘려 준 땀이 있었습니다.  

청도에 있는 운문사가 그랬을 겁니다. 관광 삼아 우르르 찾아가 보는 운문사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있었다는 듯 천연스럽게 보이지만 오늘의 운문사가 있기까지는 불법(佛法)을 농사짓고, 즉사이진(卽事而眞, 매사에 진실하라)을 솔선하는 명성 스님이 있었습니다.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일대기 <구름 속의 큰 별 명성>

<구름 속의 큰 별 명성>(지은이 남지심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9월 20일 / 값 17,000원)
 <구름 속의 큰 별 명성>(지은이 남지심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9월 20일 / 값 17,000원)
ⓒ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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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큰 별 명성>(지은이 남지심, 펴낸곳 불광출판사)은 청도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의 일대기를 평전소설 형태로 꾸민 내용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명성 스님은 7살이 돼서야 아버지 얼굴을 처음 봤습니다. 상주에서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3학년 때 예천국민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중학교는 평창중학교, 고등학교는 강릉여자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여고를 졸업한 다음해 강릉 강동초등학교 교사로 취임 후 1952년 출가 수행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학창시절 유독 전학이 잦은 친구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친구의 아버지는 직업이 군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발령이 잦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전학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상주에서 태어난 명성 스님이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까닭 역시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명성 스님의 아버지가 군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명성 스님의 아버지는 스님이셨습니다.

시대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출가한 스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살아야 했다니 어리둥절한 마음에 고개까지 갸우뚱해지는 느낌입니다. 관념적인 스님들은 아버지조차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스님도 봤습니다.

우리나라 비구니 스님들 중 소위 잘 나가는 스님들 출생배경을 보면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이 내로라하는 스님들의 딸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비구니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명성 스님의 아버지는, 관응당 지안대종사입니다.

구름에 가린 별이 된 스님

초등학교 동창 중에 아버지가 선생님이신 동창이 두 명 있었습니다. 한 동창의 아버지는 필자가 다니고 있는 학교 선생님이셨고, 또 다른 동창의 아버지는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셨습니다.

두 동창에게는 아버지가 선생님이라는 사실 자체가 든든한 빽 이었습니다. 모든 학생을 다 이긴다는 소문을 등에 업고 심심풀이를 하듯 애들을 괴롭히던 짱도 그들 두 명만은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들 두 명은 아버지가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잘 나갔습니다. 아버지 그늘이라서 덕(?)을 보는 현상은 애들 세계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도 있고, 스님들 세계에도 분명 존재할 거라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스님의 딸로 자라야 했던 스님은 후학 스님들을 품고 운문사를 품었습니다. 한때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선찰(禪刹)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나이 40세인 비구니 명성이 처음으로 찾아간 운문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청도 운문사
 청도 운문사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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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별은 빛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아닌 건 아닙니다. 운문사는 명성 스님이 별이 될 수 있는 별자리(辰)가 되었고, 명성 스님은 명맥만 유지되고 있던 운문사를 배경으로 별이 되었습니다.

강원으로 명맥만 겨우 유지되던 운문사에 둥지를 튼 스님은 터를 다듬고, 체계를 세우고, 주변을 정리해가며 별빛을 모아갑니다. 오늘의 운문사가 되기까지는 명성 스님이 감내한 우여곡절이 배경이고 파란만장이 바탕입니다.

그렇게 권선을 마치고 운문사로 돌아온 날 저녁, 명성 스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졌다. 이 사실을 누가 알까? 함께 살고 있는 시자 스님은 알았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명성 스님은 자신의 입에서 어금니 두 개자 빠져나갈 만큼 힘들었음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 254쪽

불사를 위해 혼신을 다하다 보니 어금니가 빠지는 일도 있었고, 단체로 가출한 제자들을 찾아 나서야 했던 일은 마음으로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이었을 겁니다. 그랬습니다. 가뭄 같고 장마 같은 시련은 버텨야 했고, 짜랑짜랑한 햇살 같은 고비는 넘겨야 했습니다.

별빛을 더해가는 별일뿐

피는 물보다 진했습니다. 비구와 비구니를 가르는 엄청난 차별도 훌쩍 넘었습니다. 2004년 3월 3일, 김천 직지사에서 봉행된 관응 스님의 영결식장은 여타 비구스님의 영결식장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한때는 더 큰별이라서 별빛을 가리는 구름이었을 수도 있는 아버지 관응당 스님이 남긴 '그림자의 그림자인데...'
 한때는 더 큰별이라서 별빛을 가리는 구름이었을 수도 있는 아버지 관응당 스님이 남긴 '그림자의 그림자인데...'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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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스님들 영결식장과는 달리 비구니 스님들이 눈에 띄게 많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귓속말을 건네듯 들려주는 말로 운문사 명성 스님이 관응 스님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때는 '관응'이라는 아버지 스님의 법호가 갖는 명성(名聲)과 법력이 명성(明星)이라는 별을 가리는 구름이었을 겁니다. 한때의 명성 스님은 아버지 관응 스님이라는 별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의 그림자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성 스님이 출가수행자로 살아온 법랍 64년(1952∼2016)은 구름 속에서도 별이었고,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에서도 별일뿐이니 <구름 속의 큰 별 명성>을 통해서 만나는 명성 스님은 별빛을 더해가는 별일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구름 속의 큰 별 명성>(지은이 남지심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9월 20일 / 값 17,000원)



명성 - 구름 속의 큰 별

남지심 지음, 불광출판사(2016)


태그:#구름 속의 큰 별 명성, #남지심, #명성 스님, #운문사,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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