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불러온 배를 보니 내 식탐에 회의가 든다. 식을 탐하도록 유혹함과 동시에 호리호리한 몸을 찬미하는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괴롭다.
 불러온 배를 보니 내 식탐에 회의가 든다. 식을 탐하도록 유혹함과 동시에 호리호리한 몸을 찬미하는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괴롭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추석이 지났다. 출산을 반복한 내 배는 명절 음식을 탐식하고 나니 임신 중기의 산모만큼이나 불러왔다. 불러온 배를 보니 내 식탐에 회의가 든다. 식을 탐하도록 유혹함과 동시에 호리호리한 몸을 찬미하는 사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괴롭다. 그러나 불과 몇 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도 "여성들이 통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아름답거나 광채가 날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의 향락주의자인 그리모 드 라 레이니에르에(1758-1838) 가 여성들에게 매력과 화사함을 되찾아주는 초콜릿을 예찬하며 한 말이다.

중세의 유럽에서 탐식은 성욕만큼이나 금기의 대상이었다. 중세의 교회에서는 탐식이 성욕을 유발하고 인색함, 슬픔, 분노, 태만, 허영, 오만함의 7대 죄악으로 이어진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절식의 강조는 모든 죄악을 조기에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럽 여행기 중 발칸 반도의 어느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다. 하루키는 물에 적셔야만 먹을 수 있는 딱딱한 검은 빵이 전부인 검소한 수도원 식사에 질려 그곳을 급히 떠나게 됐지만,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하찮은 식사가 세상의 산해진미인 양 음미하고 감사하는 수도사들의 태도에 경의를 표했다.

제 7대 죄악, 탐식」플로랑 켈리에, 도서출판 예경, 2011
 제 7대 죄악, 탐식」플로랑 켈리에, 도서출판 예경, 2011
ⓒ 예경

관련사진보기

오늘날 먹거리가 넘쳐나다 못해 버러지는 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탐식이 성욕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돌 같은 검은빵을 멀건 야채죽에 찍어 먹던 중세 시대를 상상해 보면 인간의 가장 첫 번째 욕망인 탐식이 채워진 후 자연스럽게 그다음 욕망인 성욕으로 이어진다는 논리가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옛날 왕과 귀족들이 질탕하게 노는 장면의 전형은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그중에서도 가금류의 다리를 뜯으며, 술을 퍼마시며, 여자와 노는 것이 아니었는가?

강박적인 금욕주의는 언제나 일탈을 낳는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럽에서는 코케뉴 우화가 인기를 얻었다. 상상 속의 이상향인 코케뉴라는 낙원에는 서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인 종달새, 뀅, 수탉, 거위 그리고 하얀 빵이 등장하고 분수에서는 포도주가 철철 넘친다.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음식을 먹다가 동그랗게 부른 배를 내놓고 바닥에 누워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운다. 코케뉴에서는 도토리나 순무나 끓인 채소 따위는 음식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식량이 풍족하지 않던 사회에서 금욕에 대한 사회적 압박은 탐식에 대한 문학까지 생산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지역별 코케뉴의 우화와 그림들은 명절 이후 절식을 하려는 나의 침샘을 자극하고 엔돌핀을 분비했다. 그 얼마나 훈훈한 이야기인가? 나무에 달린 소시지와 빵, 도처에 널린 과자와 과일을 먹으며 분수에 나오는 포도주를 들이키다가 배가 부르면 아무 데나 누워 자 버린다!

수 세기가 지나고 제4차 산업혁명이 회자되는 오늘날,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식량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버려지고 있다. 지역적 편차가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원하는 만큼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사회는 마른 사람을 권장하고 지방을 혐오하게 되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상의 산해진미를 해치울 수 있을 만큼의 위를 가지기도 힘들뿐더러, 요즘 세상에 돈 많다고 마구 먹어대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중세의 성직자들과 달리 오늘날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오히려 날씬한 몸매를 선호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비만이 되기 쉬운 것이 작금의 세계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사회가 된 이래 사람들은 먹거리가 아닌 다른 물질적인 것들을 탐하기도 한다.

먹거리가 풍요로워지고 교회의 억압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자본이 제패한 현대 사회에는 새로운 종류의 억압과 심리적 결핍이 존재한다. 따라서 대중들의 억눌린 욕망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현대 사회에도 코케뉴의 우화가 필요하다. 요즘 우리의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 먹방은 21세기판 코케뉴의 우화다.

<식샤를 합시다>의 한 장면.
 <식샤를 합시다>의 한 장면.
ⓒ tvn

관련사진보기


텔레비전을 틀면 코케뉴의 우화 속에 등장할 것만 같은 사람들이 대중적이고 저렴한 식당을 골라 마구 먹는 먹방도 있고, 날씬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한 사람들이 세련된 스튜디오에 둘러앉아 지적인 말솜씨로 미식에 대해 토론하며 직접 먹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 먹방도 있다. 스튜디오에 유명인의 냉장고가 등장하고 유능한 세프들이 나와 입담을 주고받으며 경합을 벌이는 먹방은 남녀노소의 가리지 않고 인기다. 그 방송에 출연하는 세프들도 더불어 인기인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이 방송이 끝나면 7살짜리 딸도 냉장고를 열고 텔레비전의 세프들처럼 냉장고를 들여다보다 사과라도 가지고 나와 직접 썰어 요리를 한다고 난리다.

이뿐이 아니다. 주로 여성이 밥을 짓고 차리는 현실과는 반대로 주로 남자 배우들이 나와 돈 없이 시골살이를 하며 집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프로그램도 있으며, 국민 할아버지 배우가 마치 예전 장돌뱅이나 나그네가 존재하던 시대인 양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情)과 맛을 찾아가는 여정은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평일 저녁 6시에 공중파를 틀면 어김없이 전국의 농촌과 맛집을 연결하며 식욕을 자극하는 방송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과히 2016의 한국은 먹는 방송의 전성시대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어에는 구르멍(gourmand), 구르멍디즈(gourmandise)와 가스트로놈(gastronome)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들은 식도락, 식도락가 또는 미식가로 번역될 수 있으며 특히 가스트로노미는 위를 의미하는 gastro와 규칙을 의미하는 접미사 -nomo가 합성되어 미식이란 의미에 과학적인 뉘앙스까지 더했다. 이제 우리에게도 이러한 의미의 단어들이 낯설지 않을 만큼 과히 전문화된 식도락가의 세상이자 맛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식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이 부문에 관한 선진화 전략은 과히 성공적이어서 이미 수준급의 식도락가들이 양산됐고 식도락 선진국의 문턱에 다가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간혹 세분화되고 전문화 돼가는 미식의 시대를 푸드 포르노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비판하는 자들도 있다. 오락과 스포츠가 담당한 대중의 우민화 정책에 먹방이 가세했다는 의혹설이 존재하긴 하나 이러한 루머가 수준 높은 식도락 명품 국가로의 도약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책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제 7대 죄악, 탐식」플로랑 켈리에, 도서출판 예경, 2011



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예경(2011)


태그:#먹방, #냉장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