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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기사] 대박 날 방송에 나갔지만 '쪽박' 찬 사연

음식으로 고치지 못한 병이 없다? 음식이 모든 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방송의 공개 사과 이후에도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방송은 형식적으로라도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했으므로 더 이상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당사자였다. 방송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을 뿐, 문제는 그의 창업이었다.

우리는 배신감에 더 치를 떨었다. 그는 우리의 뜻을 이해하려 애썼고, 스펀지처럼 우리 생각을 잘 받아준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래서 열 달 동안 부딪침 없이 함께 일을 했다. 이 업계의 이직률을 보면 제법 긴 시간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음식으로 고치지 못한 병이 없다고 했다. 이는 뒤집으면 음식이 모든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을 먹이는 일은 남을 병들게 할 수도 있고, 병을 낫게 할 수도 있는 어려운 일이다.

최상의 식재료를 쓴다면 사람을 살리는 복된 일이고, 저렴한 식재료만 찾는다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악한 일이라는 얘기를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반복했고, 그는 고맙게도 귀담아 들어주었다.

간혹, 그래도 장사인데 돈을 벌려면 절충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냐며 회의적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는 돈을 받고 음식을 먹이는 일이므로 더더구나 엄격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런 직원이었기에 가게에 여러 어려움이 닥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주었고, 제주도 이주를 함께 하자고 뜻을 모을 만큼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다. 한동안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횟집과 짜장면집을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를 보면서 그가 느꼈다는 실망감을 다 이해한다고 쳐도 그 실망감이 갑작스런 퇴사 후 말 한 마디 없이 가게를 차린 충분한 해명은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버린 그의 태도에 우리도 조금씩 마음이 굳어갔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 허심탄회한 얘기를 해보자며 술상을 받아놓고, 술에도 취하고 감정에도 취한 나는 직원에게 말하기엔 부끄러운 재무상황까지 털어놓으며 그를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주책맞게 눈물도 좀 흘렸던 것 같다. 그는 끝내 싸늘함을 거두지 않은 채 먼저 일어나 가버렸고, 우리 부부만 흥건히 취해 남은 안주와 술잔을 멀거니 바라봐야 했던 그 몹시 더러웠던 기분이 지금도 느껴진다.

그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라도가 싫었던 모양이다

마라도를 떠나 평택에서 새출발한 우리의 짜장면집
 마라도를 떠나 평택에서 새출발한 우리의 짜장면집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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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세 달 전, 언젠가 그는 체인점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물었던 적이 있다. 우리 가게 체인점을 내면 어떤 조건으로 내줄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간판은 같아야 하고, 기술이전료 등등의 창업비용은 일절 받지 않겠지만, 매달 순수익의 몇 프로는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그 로열티는 우리의 수입원도 될 것이고, 체인점의 변질을 막을 장치도 될 것이었다. 자연주의 식당은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기술이야 배우면 된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 쉽게 돈을 벌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원칙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자연주의의 범주는 몹시 제한적이다. 우리 가게 체인점 내겠다고 배우러 왔다가 포기한 사람 많다. 생각했던 것과 차원이 너무 다르니, 시작도 하기 전에 감당을 못 하는 것이었다. 그걸 다 감당하고 시작을 한다면 변질되지 않게 철저한 계약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로열티는 그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그는 또 물었다. '마라도에서 온 자장면집'이라는 이름은 우리 두 부부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지 않냐고.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다, 체인점 벽에 마라도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을 부착해두면 그럴 듯해진다고 나는 대답했다. 절대 이 이름을 버릴 수 없다고 강조도 했다. 그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라도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몰래, 다른 이름으로 창업을 한 모양이었다. 당시에 평택대학교에는 교환학생으로 온 중국 학생들이 무척 많았는데, 우리 가게에도 그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장기간 한 아이도 있었는데, 그는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을까? '자연'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느냐고. 그의 가게 이름은 그런 뜻이었다. '자연'

방송 후 한 달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을 복기하고 퍼즐을 짜 맞추며 그의 창업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와 그의 누나(그 가게 사장은 그의 누나다) 역시 사태가 터지자마자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기에 방송과 관련된 일은 용서를 했지만, 그 이전의 도의적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고민한 끝에 그에게 우리의 요구를 담은 메일을 보냈다. 처음 요구한 것은 간판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체인점의 형태를 갖추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나는 거절당할 것을 알았다. 한 번 가게 문을 연 이상 간판을 바꾸는 건 누구라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긴 했지만, 협상용으로 던져본 것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가장 특징적인 '톳짜장'에 대해서만이라도 우리에게 전수받은 사실을 적시해 달라고 했다. 메뉴판이든, 가게 벽면이든 A4 사이즈보다 작아도 좋으니, 우리 가게 이름을 명시해 달라고 했다. 간판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이지 않나?

그 한 문장으로 모든 사태가 해결된다는데, 그쯤이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그와 우리는 평화롭고 아름답게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그의 지인 중에서도 그를 탓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2012년 8월에 방영된 KBS1의 <소비자고발> 화면 캡처. 캐러멜색소 없는 우리 가게 춘장과 캐러멜색소가 들어간 춘장 비교 사진
 2012년 8월에 방영된 KBS1의 <소비자고발> 화면 캡처. 캐러멜색소 없는 우리 가게 춘장과 캐러멜색소가 들어간 춘장 비교 사진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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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순진한 바람일 뿐이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2주에 하루 쉬는 날마다 다른 중식 가게에서 알바를 뛰었고, 거기서 배운 것도 응용했기 때문에 우리한테 배운 거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 그랬구나. 창업을 꽤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구나. 이런 얘기도 배신감을 증폭시키는 대목 중 하나였다. 조미료 없는 중식당에서 일을 배우면서 무엇이 더 알고 싶어 조미료 넣는 중식당 일을 그렇게 힘들게 배우려 했을까?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헷갈렸다.

어쨌든 다른 가게에서 뭘 배웠든간에 우리 가게만의 특징인 캐러멜색소 없는 춘장으로 조미료 없이 맛을 내는 비법은 어떻게 터득했을까? 밀가루에 일체의 첨가물 없이 톳가루와 소금만으로 쫄깃하고 부드러운 면발을 만드는 것은 또 어떻게 익혔을까? 왜 그의 가게 짜장면은 우리 가게 짜장면과 똑같은가? 기가 찼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욕하는 수많은 네티즌들을 달래가며 그를 옹호하고, 그의 가게를 칭찬하고, 사람이 너무 몰려가면 서비스나 맛이 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감싸줬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고 최소한의 요구마저 걷어찼으니, 우리도 인정사정 볼 것이 없어졌다. 피해자인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상처를 봉합하려고 '아까징끼'라도 바르려던 것을 그는 외과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찢어놓아 버렸다.

나는 그런 모든 사실을 우리 블로그에 적었다. 네티즌들은 우리보다 더 분개했다.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져서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까지 번져갔다. 그의 가게를 찾은 손님 중에서도, 그가 이용하는 시장 상인 중에서도, 그의 가족의 친구 중에서도 그를 탓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세상 끝까지 알려서 제대로 보상받고 싶었다. 정의는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의 강도가 거세지자 그는 역공을 시작했다.

역공을 시작했다, 우리의 사적인 이야기 까발리기 작전

우리의 사적인 이야기를 까발리는 작전이었다. 사적이건 공적이건 우리가 손가락질 당할 일을 한 적이 없건만, 그가 그렇게 까발리니 뭔가 굉장히 나쁜 일이 되어갔다. 그 중 한 가지는 외제 차였다. 남편에게는 '좋은 차'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차 한 대 없이 마라도에 살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고, 이왕이면 후진 기술로 국내 소비자들에게 삥 뜯는 국산차 말고 제대로 된 차를 굴리고 싶어했다.

평택 오픈 당시에는 완전히 대박이 날 조짐이라서 우린 리스로 폭스바겐 차를 구입했다. 그때만 해도 리스니, 할부니, 대출이니, 이런 것들이 악마의 유혹이란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일하게 여긴 탓도 크다.

그 차의 할부금이 매달 1백만 원씩 들어가는 통에 무척 힘들었었고, 중도에 되팔면 손해가 더 커서 울며 겨자 먹기로 끌고 다니다 가게 접고 나서 결국 팔 수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쪽팔린 짓이었다. 허세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직원에게 욕을 먹을 일은 아니었다.

그 차 굴린답시고 월급을 덜 준 것도 아니요, 오히려 월급을 두 달에 한 번씩 올려주어 경력에 비해 대우를 높게 쳐주었다. 매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만은 최대한 대우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장사도 잘 안 되는데 외제차나 굴리고 다녔다며 비난의 글을 올렸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 딸과 탕수육이었다. 네 살에서 다섯 살 사이를 살던 기련이는 탕수육에 빠져 있었다. 그때 얼마나 먹어댔는지 지금은 질렸다면서 아예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다. 그러다 GMO(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탕수육을 먹지 못하게 했다.

식재료로 쓰던 식용유도 GMO고, 공장식 축산에서 자라는 돼지의 먹이도 GMO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당장 식재료를 바꿀 수가 없었다. Non-GMO 식재료를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도 막막했고, 어렵게 찾아내면 그때의 음식 값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제주로 이사 가면 모든 걸 바꾸자고 결심했다. 그렇다 해도 알아 버렸으니,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매일 탕수육을 먹는 딸아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먹지 못하게 단속을 했던 것인데, 그는 자기 자식에게도 먹이지 못하는 걸 손님한테 팔았다면서 공격했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었음에도 그는 우리를 못 먹을 걸 판 부도덕한 식당 주인으로 매도하는 데 우리 딸을 이용해 먹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개처럼 일했다고 했다. 우리는 졸지에 직원을 개처럼 부린 악덕 사장이 되었다. 그리곤 농사 지어 짜장면 만들겠다더니, 제주에서 뭐하고 있냐고, 농사가 그리 쉬우냐고, 얼른 농사 지을 땅부터 알아보라고 비아냥거렸다.

아,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갔나, 가슴을 쳤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이 똥물이었다. 우리라고 그를 탓할 거리가 없었겠나? 사람이니까 누구나 실수하고 약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공격에 싸늘했고, 오히려 그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

방송국에게 또 뒤통수를 맞았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이들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낯설다는 것은 연령대부터 확연한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정도의 언어 수준으로 외제차와 탕수육을 들먹이며 우리를 질 나쁜 사람으로 몰고 가는 댓글이 수십 개의 아이디로 작성되었다. 우리 머리에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게에 와서 짜장면을 먹던 그의 조카들이 떠올랐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들이 알바로 동원이 되었든 아니든, 문제는 다른 양상으로 불거졌다. 이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 아닌 사람들 눈에는 두 가게가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일 법했고, 실제 그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진실은 사라지고, 밥그릇 싸움만 남은 꼴이었다. 그가 원했던 바였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가 퍼다 놓은 똥물에서 함께 뒹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 사태의 또 하나의 당사자인 방송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두 당사자가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방송 프로그램 책임자가 나서서 중재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 당사자들이 모일 모시에 그의 가게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뭍으로 올라갔다. 뼛속까지 시리던 그 겨울이 그 만남을 계기로 끝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완전히 이사를 하기도 전이라 짐을 일부라도 싣고 내려오자고 트럭을 한 대 빌려 배를 타고 장장 13시간에 걸쳐 평택까지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 팀장 피디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영돈 피디가 집안일이 생겨 못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음날도 괜찮으니 연락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팀장 피디의 문자가 왔다. 역시 못 나온다는 통보였다. 그렇게 우린 우롱 당한 채 어디서도 위안 받을 데 없이 시린 가슴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블로그에 방송국에게 또 뒤통수 맞은 사실을 보고하는 것으로 그 사태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얼른 제주 가게를 개업해서 평택에서 덕을 못 본 방송 덕을 보는 수밖에 달리 기댈 것이 없었다. 그러나 힘든 개업 후에도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2년에 일어난 일이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착한식당 , #착한짜장면,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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