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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네코무라 씨>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이 만화책을 그린 호시 요리코 님은 하루에 한 칸씩 그려서 만화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어요. 그림결을 살피면 '잘 그렸다'나 '못 그렸다'를 넘어서 '만화라고 하는 그림 얼거리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이야기를 지어서 이웃하고 나누려 하기에 날마다 한 칸씩 그릴 수 있었을 테고, 날마다 한 걸음을 걷듯이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루기에 어느새 낱권책으로 하나씩 나올 수 있어요. 주간잡지나 월간잡지에 실리는 만화라면 으레 빠듯하게 쪽수를 채우기 마련이지만, 하루에 한 칸씩 수수하게 그린다면 더도 덜도 아닌 우리 삶을 차분하면서 넉넉하게 펼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상권 겉그림
 상권 겉그림
ⓒ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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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은 고요하고 차가운데 눈물은 왜 이토록 따뜻할까. (5쪽)

아기는 울면서 큰다던데 나도 아기 때는 울음이 자연스럽게 나왔을까. (9쪽)

나는 상처 따위 받지 않았어. 단지 엄마가 바라던 일을 했을 뿐인데. 엄마란 참 성가신 존재야. 상처받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슬픔이랑 같은 건가? 사람들은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걸까. (22∼23쪽)

두 권으로 이루어진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이봄, 2015)를 읽습니다. 이 만화책도 호시 요리코 님이 '하루에 한 칸씩'만 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만화는 날마다 여러 칸씩 그렸을는지 몰라요. 연필로 부드럽게 그리는 이야기에는 도드라지지도 감추어지지도 않는 사람들 모습이 흐릅니다. 튀고 싶지 않으나 숨고 싶지도 않은 풋풋한 열네 살 아이 숨결이 흐릅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피자면, 만화책 주인공 '아이사와 리쿠'는 열네 살 중학생이고, '잘난 아버지'를 두었으며, '빈틈없는 어머니'도 두었어요. 리쿠네 잘난 아버지는 너무 잘난 나머지 아무렇지 않게 바람도 잘 피우고, 리쿠네 빈틈없는 어머니는 너무 빈틈없는 나머지 언제나 빈틈없는 도시락에 집안일에 살림에 똑똑 부러집니다. 겉보기로는 아무 말썽이 없을 듯한 리쿠네 집이지만, 겉보기로만 '잘나고 빈틈없다' 싶을 뿐, 속으로는 조금도 멀쩡하지 않아요. 이런 집안에서 열네 살 리쿠는 '거짓 눈물'을 흘리고 속마음을 늘 감추는 나날이 됩니다.

"근데 네 도시락 뭔가 이상해." "엄마 요리, 완벽하거든." "그러게. 지나치게 완벽하다는 거지. 그런 걸 매일이라니, 이상하잖아. 역시 넌 이상해." (66쪽)

"하지만 사모님은 역시 완벽해. 멋진 남편과 귀여운 따님, 풍요로운 삶. 모두의 선망 아닐까." "모두의 선망." (85쪽)

나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태어나 아이로 자랐습니다. 한쪽에서 보자면 어버이요, 다른 한쪽에서 보자면 아이입니다. 이리하여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를 두 갈래 눈길로 바라보기로 합니다. 먼저 어버이 눈길로 바라봅니다. 나는 썩 '빈틈없는'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니, 나는 참 '빈틈있는', 제대로 말하자면 '빈틈많은' 어버이라고 생각합니다. 빈틈이 많은 밥을 차리고, 빈틈이 많은 살림을 꾸리며, 빈틈이 많은 하루를 보냅니다. 이러면서 그리 잘나지도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두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나는 어떤 아이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이때에도 나는 빈틈이 많은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허술하거나 모자란 아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나는 제때 달삯이 나오는 번듯한 일터를 그만둔 지 어느새 열 몇 해가 지났고, 도시 아닌 깊은 시골에서 삽니다. 우리 어버이가 보기에 '나라는 아이'는 사회 한복판에 서지 않고 바깥 꼬랑지에서 맴도는 모습으로 여길 수 있다고 느낍니다.

"리쿠야, 고모할머님이 뭐라셔?" "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쁜 분은 아니셔. 잠깐이잖아." "자기는 싫어한 주제에." "싫어하거나 한 적 없어. 누가 듣겠다." "나를 새랑 같이 쫓아내는 거잖아." "쫓아낸다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엄마도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 되는 거 이해하잖아. 응? 리쿠야!" "전혀 이해 못 하겠어. 그래도 어차피 보낼 거잖아." "맞아." (123∼124쪽)

하권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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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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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로서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일 적에 아이들이 즐거울까요? 아이로서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일 적에 어버이들이 기쁠까요? 어쩌면 빈틈없거나 잘난 모습을 바라는 어버이와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는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아프면서 천천히 자라요. 뛰놀다가 넘어지고,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깨고, 자전거를 달리다가 미끄러지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길에 흘리고, 뭐 이런저런 모습에서 허술합니다.

겉보기로 치자면, 숫자로 따지자면, 이름값으로 보자면,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미끄러지는 삶이나 살림은 바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나 숫자를 바라보지 않고 웃음이나 노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살아가는 즐거움이나 사는 보람이나 살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아홉 살 아이가 빈틈없이 피아노를 쳐대지 않아도 참으로 예뻐요. 여섯 살 아이가 빈틈없이 글씨를 쓰지 못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못해도 더없이 사랑스러워요.

간사이 사투리에 물들면 어떡하지. 아니야, 분명 괜찮을 거야. 내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이제, 엄마에 대한 증오, 그뿐. (150쪽)

왜 이곳 사람들은 가치 기준이 '재미있다'거나 '재미없다'일까. 일반인들이 왜 개그맨 흉내를 내는 걸까. 그런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고도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178쪽)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에 나오는 아이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갑니다. 어머니한테서도 아버지한테서도 '제대로 눈길을 받'고 싶기에 '익숙한 보금자리'를 버리려 합니다. 마음을 툭 터놓는 사랑을 받고 싶은 열네 살 아이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이 있는 곳에서 시골말(사투리)을 들으면서 '도시에 있는 두 어버이'가 저를 다시 도시로 데려가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려고 합니다.

다만 이렇게 하되 두 어버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열네 살 아이가 제 어버이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말로 해도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두 어버이'가 '말이 아닌 마음으로 부디 열네 살 아이 속내를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속내를, 속마음을, 속사랑을 빈틈없이 읽지 못하더라도 좋으니, 부디 마음을 열고 읽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디뎌 주기를 바라지요. 겉치레를 이제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웃고 노래하는 수수한 사랑을 '우리 보금자리'에서도 넉넉하고 즐겁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로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버이로서 바라거나 아이로서 바라는 한 가지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더 많은 돈이나 더 커다란 집이나 더 잘난 이름이 아닙니다. 즐겁게 웃음 짓는 사랑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가꾸고, 기쁘게 노래하는 사랑으로 우리 살림살이를 짓자고 생각해요. 만화책 <아이사와 리쿠>에 나오는 열네 살 푸름이가 바라는 자그마한 꿈을 그의 어버이가 온마음으로 마주하며 읽을 날은 언제쯤이 되려나요.

덧붙이는 글 | <아이사와 리쿠 (상)>(호시 요리코 글·그림 / 이봄 펴냄 / 2015.10.19. / 9500원)



아이사와 리쿠 - 상

호시 요리코 지음, 박정임 옮김, 이봄(2015)


태그:#아이사와 리쿠, #호시 요리코, #만화책, #만화읽기, #청소년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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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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