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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50대 중반에 들어선 초등 동창 머슴애 셋과 그 짝지들이 저지르는 '멋대로 세계여행'이 지지난해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 지난해 '스페인 일주여행'에 이어 벌써 세 번째가 되었다. 올 세 번째 여행은 '러시아와 발트3국 일주여행'이다. 6개월 전에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3개월 전에 호텔과 렌트카를 예약하고, 우리 멋대로 지도에 점을 찍어 동선을 짰다.

이런 식이다보니 미국에서는 열흘 동안 7400킬로미터를 달렸고, 스페인에서는 마드리드와 라만차 지역을 거쳐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역, 그리고 지중해 도시와 그라나다를 거쳐 바르셀로나와 까딸루냐 지역을 도는 무모한 일정을 소화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그만 가자는 사람이 없어서 올 해 또 13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 골든링 도시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아우르는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완주했다. 렌터카 외에도 시내버스, 지하철, 택시, 야간 침대 기차, 국경을 넘는 심야 버스, 배 등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타고 다녔다.

자꾸 멀어져가는 기억 때문에 여행 때마다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두 번의 여행은 기억 끝에 매달린 채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작심하고 기억을 더듬는다. 나의 기억이 함께 한 우리의 순간을 반추하는 자료로 쓰이고, 또 혹시 우리 우리처럼 무모한 꿈을 꾸는 나이 든 '개구쟁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 

[에피소드 하나] 시작은 언제나 불안한 설렘

안전등급이 낮아서 꺼림칙했던 카자흐스탄 국적기 에어 아스타나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깔끔한 새 비행기에다 서비스 수준도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1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기내용품 주머니에 모두 감탄하며 재활용하자며 가방에 챙겨 넣는다. 기내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착륙준비 아나운서 멘트에 잠이 깼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크고 작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3시간의 시차 때문에 밖은 여전히 대낮이다. 오후 6시 경에 모스크바행으로 환승하여 한참을 갔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은 겨우 저녁 9시이다. 알마티와 또 다시 3시간의 시차, 우리나라와는 6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짐을 찾고 유심 칩을 사서 호텔에 픽업 서비스 전화를 했다. 조금 기다리니 소형차 두 대가 왔다. 세 사람씩 분승하고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호텔로 가는 길이 영 심상찮다. 뒤차는 보이지도 않고, 비포장의 좁은 숲길로 빠진다. 덜컥 겁이 나며 온갖 상상에 빠진다. 덩치 좋은 러시아 사람이라도 내가 혼자 막고 있는 동안 여사 둘은 탈출할 수 있겠지. 여기까지 상상이 미치자 슬슬 자심감도 생긴다. 그 순간 어렴풋이 'Отел(호텔)'이라는 안내판이 스쳐지나간다. '아, 역시 아는 게 힘이다.' 키릴문자 읽는 법을 조금 공부한 덕에 그 글자가 호텔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순간 긴장이 풀리며, 뒤를 돌아보며 다 와간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두 여사도 내 표정을 보며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조금을 더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호텔이 나타났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숲속의 별장 같은 느낌이다. 'Sharm Hotel'. 깔끔한 룸을 보고서야 여행하는 기분에 들뜬다.

아침 산책을 나선다
▲ '샤람 호텔' 아침 산책을 나선다
ⓒ 권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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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첫날밤을 이렇게 푹 자기는 또 처음이다. 시차 때문인지 이른 시간에 잠이 깼다. 아침 식사가 8시 30분에 시작된다고 하여 산책을 나갔다. 작은 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시골 동네는 어제 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한가롭다. 멀리 한 노인이 그만큼 나이 먹은 개를 끌고 산책을 나왔다.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네나 무표정에 무대답이다. 그렇지. 여긴 러시아지. 처음으로 러시아 땅을 밟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보거나 웃지 말라는 여행책자의 경고가 떠올랐다.

평소에 안 하던 아침산책 끝이라 시장기가 돈다. 투숙객이 우리뿐이었는지 호텔 식당에 자리를 잡은 팀이 우리밖에 없다. 덩치 큰 러시아 아줌마가 주방에서 부산스럽더니, 구운 빵과 버터를 내온다. 이어서 계란을 들고 눈짓 손짓으로 먹겠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러더니 또 줄 게 있다는 손짓이다. 흰죽 같다. 귀리에 우유를 섞은 죽 같은데 이게 러시아의 가장 일반적인 수프 '까샤'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한동안 그 죽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더 맛있는 까샤는 맛보지 못했고, 그 뚱보 아줌마의 까샤는 이후 까샤의 기준이 되었다.

[에피소드 둘] 의외의 관광지 - 역과 호텔

강렬환 빨간색이 인상적이다
▲ 아에로 익스프레스 열차 강렬환 빨간색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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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연도인 1914년과 1941년이 적힌 동판 사이에 두 연인이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
▲ 밸로루스키역 광장의 동상 제1,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연도인 1914년과 1941년이 적힌 동판 사이에 두 연인이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
ⓒ 권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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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아웃을 하고 두 번째 숙소로 가기 위해 무정차 아에로익스프레스 열차를 탔다.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내린 역은 벨로루스키. 역 광장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1914년과 1941년을 표시한 깃발 사이에 총을 멘 군인이 연인과 작별 키스를 하는 동상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 역에서 이처럼 수많은 연인들이 이별했을 터이다. 전쟁의 비극에 관해서는 어떤 말보다도 더 웅변적이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또 냉전시대를 기념하는 역사적 관광지이다. 대부분의 모스크바 지하철은 출입구 계단이 없다.

대신 에스컬레이터로 출입을 하는데 그 길이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다. 족히 150미터는 넘어 보이는데 속도까지 엄청 빠르다.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 같다. 계단으로는 출입하지 못할 정도의 깊은 지하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지하 역사 공간을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한 냉전시대의 산물이리라.

깊이를 보면 핵전쟁이 나도 끄떡없겠다. 전쟁에 관한한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 들어선 선로 복도는 또 한 번 반전이다. 매끈하고 대리석 기둥과 세련된 벽면으로 장식된 홀에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정교한 조각상과 장식들이 삭막한 지하철의 이미지와 대비되며 더욱 감탄스럽게 만든다.

러시아의 지하철 출입은 대부분 에스컬레이트로만 가능한데, 그 길이와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깊다
▲ 지하철 출입구 에스컬레이트 러시아의 지하철 출입은 대부분 에스컬레이트로만 가능한데, 그 길이와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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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내부에 화려한 장식이 어우러져 멋진 예술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 지하철 역 로비 웅장한 내부에 화려한 장식이 어우러져 멋진 예술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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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있어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 벨로루스키 지하철역 내의 동상 입구에 있어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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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처음 마주친 모스크바의 두 역은 우리 계획서에는 없는 '의외의 관광지'였다. 두 번째 숙소인 페트로프 왕궁(Petroff Palace) 호텔도 그랬다. 이 호텔은 말 그대로 궁전의 일부를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왕궁호텔로서 그 자체가 훌륭한 관광지였다.

얼리 체크인을 마치고 룸을 나오니 푸른 하늘과 맞닿은 왕궁의 첨탑이 눈부시다. 러시아에서의 첫 관광 포인트는 아무래도 이 왕궁호텔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모두들 '왕궁'이라는 역사성에 잠시 왕족 같은 기분의 속물성을 숨기지 않는다. 거기에다 낯설음이 주는 편안함과 이국이라는 해방감은 우리를 더욱 들뜨게 했다.

호텔 뒤편으로 나가자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왕궁 정문이다. 한참을 관광객 모드로 사진 찍고 기웃거린다. 정문 수위에게 단체 사진을 부탁했더니, 딱딱한 얼굴로 근무 중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다시 사무실에 다리를 벌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관리인에게 부탁을 했지만 역시 '노'란다. 두 번의 '까임'도 우리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마침내 점심도 우아하게 이 왕궁 호텔 레스토랑에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이 사람들이... 이제 여행 시작인데... 그래, 폼 한번 잡자.' 이건 순전히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아름답고 역사적인 왕궁 탓이다.

야외 테이블에서 기념 촬영
▲ 페트로프 왕궁 호텔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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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레스토랑의 서비스는 영 말이 아니다. 웨이터는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웃지 않는 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접시와 포크도 던지듯이 내려놓는다. 기본이 안 된 서빙 솜씨이다. 이 정도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이런 서비스라면 다른 곳은 기대를 접어야겠다.

돈쓰러 와서 이런 대접 받아보긴 처음인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서빙의 개념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하고 태연한 얼굴이다.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웃으며 'good afternoon!'이라는 인사를 한다. 러시아에서 처음 받아보는 인사이다. 레스토랑 들어올 때 웨이터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인사인데, 감격스럽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태그:#러시아, #모스크바, #역,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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