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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일보>에 게재된 칼럼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가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 문단 내의 '여혐'을 다룬 이 글은, 흔히 말하는 통속적인 문학 작품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얼마 전 <한국일보>에 게재된 칼럼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가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 문단 내의 '여혐'을 다룬 이 글은, 흔히 말하는 통속적인 문학 작품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 한국일보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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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일보>에 게재된 칼럼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가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 문단 내의 '여혐'을 다룬 이 글은, 흔히 말하는 통속적인 문학 작품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다. 칼럼은 한발 더 나아가 김현 시인의 글을 빌려 한국 문학에서 여성혐오가 가능했던 배경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러모로 탁월했던 이 글은 다소 엉뚱한 사건으로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로 칼럼에 익명으로 언급된 시인이 SNS를 통해 직접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이 칼럼이 자신의 시집을 '여혐에 대한 총알받이'로 사용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칼럼이 겨냥한 것은 한국 문단 전반이었기 때문에 특정 개인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사람들은 그 시인이 누군지 관심도 없었다.

아무튼 해당 시인이 SNS를 통해 드러낸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그는 '시에 대한 오독과 모독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며 칼럼이 그런 일을 한 것처럼 전제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는 그 글이 '개인적 지레짐작'만으로 자신의 시를 폄하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나는 시를 통해 여성혐오를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부당하게 매도하냐는 것이다.

사실 해당 칼럼은 그 정도로 그의 시에 비중을 두지 않았으므로, 이 같은 불만은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보인 반응이 여러모로 곱씹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반응은 '혐오'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혐오를 보지 못하는가

지난 2015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반대집회 참가자들이 '돌아와, 기다릴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과 혐오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사랑해서 구원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사람들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일상에 녹아있는 혐오를 느끼지 못한다.
 지난 2015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반대집회 참가자들이 '돌아와, 기다릴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과 혐오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사랑해서 구원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사람들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일상에 녹아있는 혐오를 느끼지 못한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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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막 '혐오'라는 키워드가 회자되기 시작하던 시기, 지금처럼 사회가 여성혐오 담론으로 들끓기 전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에 대해 질문했다. 구체적으로는 당신이 생각하는 혐오란 어떤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상이했는데, 가령 성소수자인 친구들은 퀴어퍼레이드에서 마주친 혐오 시위대를 언급했고 또래 여성 지인들은 생활에서 마주치는 여성 펌하 발언을 언급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성애자 남성인 친구들의 답변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KKK단으로 대표되는 인종 차별 사건이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 등 역사적 사례를 언급했다.

다시 말해, 성소수자나 여성 등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답변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혐오는 생활 속에서 매번 마주치거나 경험하는 것이다. 반면에 혐오의 대상이 아닌 이들, 혐오를 행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의 답변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었고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이들에게 혐오는 굳이 겪을 일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이미 사회적으로 승인된 말과 행동의 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이다('OO녀'와 같은 단어나 여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그 문제점을 지적받기 전에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사용되어 왔던 것을 떠올려보자). 말하자면 이들에게 혐오란 극단적인 증오와 배제를 동반한 돌출 행위에 가깝지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는 왜 중요할까. 바로 답변에서 보이는 간극이 혐오가 가능한 조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통상 혐오는 그 사회가 내재한 권력 관계와 선입견을 반영한다. 가령 이성애가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비이성애는 불순한 것으로 치부되고, 이는 곧장 성소수자 혐오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권력관계와 체제들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것은 곧 상식적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혐오를 겪지 않는 사람들이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두지 않고, 소수자의 위치에 이입하지 않으면 무엇이 혐오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자기가 혐오를 행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자. 그 사람들을 '사랑해서 구원하려 한다'고 말한다.

왜 시인은 억울해하는가

이는 여성혐오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사회적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여성은 남성들을 경유해서만 권력에 닿을 수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원래' 무능하거나 의존적인 존재로 폄하된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철저히 가려진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없거나 들리지 않는 존재는 극단적으로 대상화되기 십상이다.

많은 예술 작품에서 여성이 개인이 아닌 특정한 역할로만 등장하고(어머니, 혹은 성애적 대상) 기능적이거나 은유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부장적 체계는 여성에게 딱 그만큼의 역할을 할당했다. 이렇게 볼 때, 칼럼에 언급된 시인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말들이 혐오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이해할 수 있느냐와 정당하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사람이 그것을 인지했건 하지 않았건, 어쨌든 그가 사용한 언어가 혐오에 기반했다는 건 그대로다. 특히나 예술의 영역, 언어를 다루는 문학의 영역에 있어서 이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앞서 언급한 칼럼이 탁월하게 지적했듯, 시는 본질적으로 '부적응의 언어'이자 '세계 밖의 말'을 탐구하는 장르다. 때문에 자기가 사용하는 텍스트를 뿌리부터 의심하고 대안적인 말을 상상하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소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젠더가 예외가 될 순 없다. 혐오에 기반한 기성의 성별 체계도 시인이 불화하고자 하는 세계의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번 사태를 놓고 '평론가들이 부당하게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칼럼이 지적한 것은 시인의 언어가 관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었다. 젠더적인 측면에서 그의 시는 가부장적 사회가 구획한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말하자면 칼럼이 지적하는 것은 시인의 빈곤한 상상력이고 요구하는 것은 언어의 확대다. 이는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영역을 더욱 넓혀달라는 요청이다. 세계와 불화하고 익숙한 말들과 씨름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시인 스스로가 지금까지 써온 말들과 대립하는 일이 될지라도.

예술가로서 그가 해야 했던 일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 이 영화의 감독은 왜 여성 중심의 코미디 영화를 만드냐는 질문에 "자기 주변에는 웃긴 여자들이 너무도 많은데 대다수 영화에서 여성들이 도구적으로만 쓰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 이 영화의 감독은 왜 여성 중심의 코미디 영화를 만드냐는 질문에 "자기 주변에는 웃긴 여자들이 너무도 많은데 대다수 영화에서 여성들이 도구적으로만 쓰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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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 바로 영화, 특히 최근의 할리우드 상업 영화계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고스트버스터즈>,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등 최근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이전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단지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주제 의식에 있어서도 급격한 변화를 이룩했다. 가령 <매드 맥스>를 보라. 이 영화는 남성 중심의 장르로 평가받던 유사 서부극의 틀 속에서 강력한 페미니즘 서사를 전개한다. 익숙하지만 이질적으로 평가받던 요소가 혼합되었을 때,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이 영화의 창작자들이 거창한 작가적 야심을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든 건 아니다. 고스트버스터즈의 감독 폴 페이그만 해도 그렇다. 그는 왜 여성 중심의 코미디 영화를 만드냐는 질문에 "내 주변에는 웃긴 여자들이 너무도 많은데 대다수 영화에서 여성들이 도구적으로만 쓰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은 이야기꾼으로서 감독들이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을 보여준다. 판에 박힌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탐색의 과정은 익숙한 선입견이나 관습과 결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이번 칼럼을 통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던져졌다. 오직 게으르지 않은 예술가들만이 여기에 부응할 것이다.



태그:#여성혐오, #문학, #페미니즘, #시인 ,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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