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독재자 김정일과 함께 사진을 찍은 신상옥, 최은희 커플.

▲ 연인과 독재자 김정일과 함께 사진을 찍은 신상옥, 최은희 커플. ⓒ (주)엣나인필름


8년 전 <난 영화였다>라는 책을 읽었다. 신상옥 감독 사후 발간된 자서전으로 내겐 신상옥이란 이름을 처음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상옥은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빨간마후라> 등 한국영화계에 오래 기억될 명작을 여럿 남긴 감독이다. 하지만 오늘 그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세월이 지난 시대의 흔적을 지우는 건 순리라고들 하지만 신상옥과 같은 무거운 이름이 이토록 빨리 사라진 데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신상옥의 자서전 <난 영화였다>가 자서전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히 대처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감독 신상옥의 작품을 제대로 본 적도 없거니와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이 책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이 신상옥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보고 나서는 그에 대해 조금쯤 더 잘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상옥은 1978년 7월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납치돼 북한으로 끌려간다. 같은 해 1월 유명 배우이자 신상옥의 전 부인이기도 한 최은희가 홍콩에서 실종된 지 6개월 만이었다. 이후 수년이 흘러 신상옥과 최은희는 북한에서 모습을 드러내 함께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는 공산권 유력 영화제서 수상의 영광을 안은 <소금>을 비롯해 특색 있는 소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불가사리> 같은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왜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한 걸까? 그들이 북한에서 보낸 8년여의 세월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2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를 사랑한 감독과 감독을 사랑한 여배우의 피랍기

연인과 독재자 196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였던 신상옥, 최은희.

▲ 연인과 독재자 196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였던 신상옥, 최은희. ⓒ (주)엣나인필름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로스 애덤과 로버트 캐넌이 만들었다. 거대한 대륙을 건너 저기 반대편 끝자락에서 3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적국의 감독과 배우를 납치한 독재자, 그로부터 무한한 지원을 받았으나 끝내 탈출을 선택한 예술가의 이야기는 그 장대한 시간과 공간 모두를 넘어서는 특별한 감흥을 안겨줬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은희와 그 가족들을 2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설득했을 리 없으니까.

의기투합한 두 감독은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의 북한 피랍기를 관련자 인터뷰와 음성녹취분 등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밀도 있게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녹음했음이 분명한, 신상옥 감독과 김정일 사이에 오간 대화 녹취본을 비롯해 그간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여러 자료가 다큐멘터리 안에 포함돼 그 자체로 상당한 흥미를 자아낸다.

영화엔 신상옥과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된 이유부터 납치 이후 겪은 일들, 당시 그들의 심경 등이 상세히 담겼다. 신상옥 감독이 자서전과 인터뷰 등에서 수차례 공개한 바와 같이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 감독을 납치했다는 사실은 알고 봐도 충격적이다. 이게 정말 40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다.

납치된 후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마침내는 정치범 수용소에 5년여 동안 감금돼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던 신상옥, 자신이 왜 잡혀 왔는지도 모르면서 긴 세월을 견뎌야 했던 최은희, 한순간 부모를 모두 잃고 빨갱이 자식이란 조롱을 견디며 자란 그들의 자녀들까지.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독재자와 분단체제라는 게 이 다큐멘터리가 도달하는 종착역이다.

독재자가 앗아간 자유, 독재자가 가져다준 자유

연인과 독재자 김정일의 지원 아래 감독과 스태프, 배우까지 도맡아 원없이 영화를 찍은 신상옥과 최은희.

▲ 연인과 독재자 김정일의 지원 아래 감독과 스태프, 배우까지 도맡아 원없이 영화를 찍은 신상옥과 최은희. ⓒ (주)엣나인필름


김정일은 신상옥을 납치해 원하는 모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자유를 줬다. 기차를 원하면 기차를, 탱크를 원하면 탱크를, 다리를 원하면 다리를 내줬다. 남한에선 늘 제작비에 쪼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선 원하는 모든 장면을 구현할 수 있었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억압하는 독재자는 신상옥에 일신의 자유를 앗아갔지만 동시에 더없는 예술적 자유를 허락했다.

반대로 다른 독재자도 있었다.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했던 신상옥 감독에게 4년 넘는 시간 동안 영화를 찍을 수 없도록 한 독재자 박정희가 바로 그다.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신상옥 감독의 육신은 안전하고 편안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 그의 삶은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과 북, 두 명의 독재자가 지배하는 한반도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빼앗겨야 했다. <연인과 독재자>는 영화를 사랑한 감독과 감독을 사랑한 여배우의 괴뢰국가 피랍기인 동시에, 독재자가 앗아간 자유와 독재자가 가져다준 자유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남과 북 두 명의 독재자가 어떻게 순수한 예술혼을 파괴하는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이기에 너무 많은 이야기는 부적절하다. <연인과 독재자>는 오는 22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연인과 독재자 외국 감독의 집념이 느껴지는 이 영화는, 독재자가 어떻게 예술가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연인과 독재자 외국 감독의 집념이 느껴지는 이 영화는, 독재자가 어떻게 예술가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주)엣나인필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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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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