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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일제 강점기 조국을 배신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세력들을 청산하지 못한 일이다.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 용케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기득권에 흡수되어 승승장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이들을 요직에 기용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친일과 망각>
 <친일과 망각>
ⓒ 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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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친일세력을 단죄하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제헌의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에 근거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꾸렸다.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악질 고문경찰 노덕술 등을 잡아들이는 등 나름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 조사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했고, 끝내 무력화시켰다. 우리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99% 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가 지금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추적해 나갔다. 그 결과물은 <친일과 망각> 4부작으로 지난해 8월 방송됐다. 이어 올해엔 취재 핵심 내용과 방송에 담지 못한 이야기까지 한데 묶어 <친일과 망각> 제목의 책을 냈다.

확실히 방송으로 볼 때와 책으로 읽을 때 느낌은 달랐다. 방송은 한 번 휙 보고나면 그뿐이었는데, 책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분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특히 친일 부역자 후손의 현재 소유 재산을 기술한 4장 '부의 대물림', 그리고 가난에 찌든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을 적은 5장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를 읽을 땐 손이 떨려 책장을 넘기지 못할 지경이었다.

친일후손 '승승장구', 독립운동가 후손 '패가망신'

현재 친일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들은 선대의 친일행적은 극구 부인하는 한편, 국가가 자신들의 재산에 손대는 일에 격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국가에 소송을 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끼리는 주로 혼인을 통해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고발한다.

"선대의 반민족 행위를 부정하고 친일재산의 국가 귀속에 반발하며 소송을 낸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10억 원이 훌쩍 넘는 고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보통의 서민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꿈꾸지 못할 고가의 집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를 소개하면 조선 귀족 이해승의 후손은 서울 성북동 2층 저택에서 살고 있다. 대지 면적이 949㎡에 이른다. 공시지가로는 30억 원이지만 시세로는 2~3배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 귀족 자작 민영휘의 후손 중 한 명은 서울 청담동 최고급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다." - 본문 170쪽


이에 비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비참 그 자체다. 취재진들도 이들의 처지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월 개인 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50만원 미만이 10.3%, 50~100만원이 20.9%, 100~200만원이 43%였다. 2015년 3분기 기준 2인 이상 가구 평균 소득이 월 440만원 남짓이고 4인 가구 최저 생계비가 166만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 본문 199쪽


친일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의 궤적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대목은 학력이다. 뉴스타파 취재진에 따르면 친일 후손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서울대나 연세, 고려 대학 출신이고 27%가 유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고등학교마저 변변히 다니지 못하는 처지다.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학력이 중졸 이하인 사람이 40%나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 초등학교 졸업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 66%다." - 본문 200쪽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꿴 대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참으로 부끄럽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일제 식민지가 근대화의 씨앗을 뿌렸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친일 청산을 저지한 이승만을 국부로 받들려는 움직임이 날로 거세다.

그뿐만 아니다. 현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다시피 추진했다. 이렇게 하는 배경엔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를 비롯한 친일세력의 과거를 세탁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역사는 '만약'이란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가정한다면, 친일전력을 지닌 박정희의 운명은 뒤바뀌었을 테고 동시에 이 나라의 앞길 역시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픈 현대사에 진실의 빛을 밝히다 

이런 와중이다 보니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 4부작과 단행본 출간은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다. 무엇보다 가까운 과거를 쫓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감정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취재진들은 이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방대한 자료와 수개월간 씨름하며 확보한 사실 정보를 기반으로 끈질기게 취재를 해나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싶다.

또 하나, 취재진들이 친일 후손에게 접근해 나간 태도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취재를 맡은 김용진, 박중석, 심인보 기자는 탐사보도에 잔뼈가 굵은 언론인들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친일 후손을 취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회의 끝에 취재 목적과 취지를 밝힌 이메일을 후손들에게 보낸 뒤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이메일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 본다.

"이 메일이 다소 불편하게 여겨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선생님께서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비난을 하거나 심판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 청산이 없이는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없고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도 없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치유 없이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메일에서 알 수 있듯 취재진들은 '친일'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심판자가 아닌, 치유와 성찰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갔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친일청산 실패, 제주 4.3, 한국전쟁과 그 와중에 이뤄진 양민학살, 광주 5.18, 세월호 등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다.

이런 역사를 규명하는데 얼마의 시간과 자원이 들어갈지 가늠조차 어렵다. 그러나 뉴스타파 취재진들이 친일후손 취재에 접근한 태도와 관점은 다른 현대사의 아픔을 재조명하는데 훌륭한 지침으로 남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신약성서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가 떠올랐다. 자캐오는 로마 제국의 세금징수원이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했던, 말하자면 로마의 앞잡이였던 인물이다. 자캐오는 세금징수원 노릇을 하면서 재산을 모아 나갔다. 현대의 세무관리들이 세금 빼돌려 치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자캐오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는 회심했다. 그는 예수와 만난 자리에서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으며, 부정 축재를 했다면 4배를 보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친일 후손들은 부를 누리며 산다. 그런데 그 부는 민족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일제에 빌붙은 데 따른 대가다. 조상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캐오처럼은 아니더라도 조상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이 누리는 부가 부정하게 얻어진 것임을 깨닫고 알면 된다.

그러나 뉴스타파 취재진이 접촉한 친일 후손 350명 가운데 선대의 잘못을 시인하고 카메라 앞에서 공개 사죄한 이는 3명에 그쳤다. 친일 후손들이 진실을 알고 회심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친일과 망각

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 다람(2016)


태그:#뉴스타파, #친일과 망각, #자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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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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