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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중앙탑 쪽에서 바라본 탄금대의 원경. 탄금대는 신립을 대장으로 한 조선군이 소서행장의 일본군 1군에게 참패한 전적지이다. 신립, 김여물, 이종장 등 지휘부는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몰하거나, 스스로 탄금대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립 등이 투신한 곳에는 신립장군순절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큰 바위 일원에는 열두대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오롯이 절벽이었지만 지금은 열두대까지 계단이 놓여 있어 누구든지 직접 답사할 수 있다. 열두대는 탄금대공원 최고의 답사지이다.
 충주 중앙탑 쪽에서 바라본 탄금대의 원경. 탄금대는 신립을 대장으로 한 조선군이 소서행장의 일본군 1군에게 참패한 전적지이다. 신립, 김여물, 이종장 등 지휘부는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몰하거나, 스스로 탄금대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립 등이 투신한 곳에는 신립장군순절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큰 바위 일원에는 열두대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오롯이 절벽이었지만 지금은 열두대까지 계단이 놓여 있어 누구든지 직접 답사할 수 있다. 열두대는 탄금대공원 최고의 답사지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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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26일, 신립은 충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단월역(丹月驛) 일대에 8천 군대를 주둔시킨다. 그는 종사관 김여물(전 의주목사), 충주목사 이종장 등과 함께 새재 일대의 지형을 정찰한다. 김여물이 신립에게 건의한다.

"적은 1만 8천 대군이고 우리는 8천으로 병력이 적으니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는 것은 전술상 쉽지 않습니다. 협곡에 복병을 숨긴 채 적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좌우에서 공격을 퍼부어 격멸하는 것이 상책(上策, 최고의 작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만약 적의 날카로운 예봉을 꺾을 수 없다면 한성으로 들어가서 지키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이종장도 비슷한 의견을 낸다.

"적은 지금 승승장구하여 기세가 드높습니다. 우리가 산지(散地, 평지)에 머물면서 야전(野戰, 들판에서 싸움)을 펼치는 것은 불리하니 응당 험하고 높은 것을 지키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새재 곳곳에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여기저기 연기를 피워 올려 적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다음 기습 공격을 하여 승리를 취함이 좋을 듯합니다."

신립도 처음에는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일격의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전략을 바꾼 상태였다. 신립이 말했다.

"적들은 대부분 보병에 대군이고, 우리는 소규모에 쓸 만한 군사들은 기병뿐이오. 기병은 들판에서 싸워야 절대적으로 유리하오. 게다가 아군 보병들은 훈련조차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이오. 상주 북천 전투의 교훈을 볼 때,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은 죽을 지경이 아니면 절대 싸우려 들지를 않소."

신립의 발언은 배수진(背水陣)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디 그뿐이오? 우리가 새재에 모두 매복해 있는 동안 왜적들이 하늘재나 이화령으로 돌아서 한양으로 진격해 버리면 어쩔 셈이오? 우리는 무조건 적들과 마주쳐야 하오."

27일 밤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수립한 신립은 28일 아침 성을 나와 탄금대로 향했다. 이윽고 남한강과 달천이 합수(合水, 물이 합쳐짐)되는 두물머리 낮은 지대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른바 배수진이었다. 싸우지 않고 물러서다가는 결국 등 뒤의 물에 빠져 사망할 터인즉 죽기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한신이 조나라와 싸울 때 쓴 병법이오.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혀 파부침선(破釜沈船)을 했으니 죽도록 싸울 수밖에!"

광흥주부 이운룡이 신립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스스로 죽을 땅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하책(下策, 최악의 작전)일 뿐입니다."

신립이 화를 내면서 꾸짖었다.

"네 놈이 감히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를 훼방 놓느냐!"

신립이 좌우를 시켜 이운룡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다. 이운룡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여물은 아들 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미 필패(必敗, 반드시 패함)와 전몰(戰歿, 전쟁터에서 죽음)을 예감한 그였다.

'삼도에서 병력을 모으려 하였으나 한 사람도 응모하는 자가 없었으니, 우리 무리는 그저 맨주먹만 휘두를 뿐이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물론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한 채 큰 뜻만 품고 한 줌 재가 되고 말 터이니 하늘을 우러러 긴 한숨을 지를 따름이로다. 애비가 죽으면 일가는 모두 행재지(行在地, 임금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곳)로 갈 것이며, 딴 곳으로 피란을 가지 말라.'

신립은 전투력이 모자라는 보병 5천을 모시래들(달천평야)에 풀어 적을 유인한 다음, 그들이 병목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전투 경험이 풍부한 기병 부대를 돌격시켜 한꺼번에 참살을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소서행장 역시 100년에 걸친 일본 통일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백전의 용장이었다. 소서행장은 조선군의 작전을 간파했고, 대군을 거느렸기에 가능했던 포위 전술을 썼다.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가는 작전"이라 말렸건만...

신립 장군이 마지막 순간 강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에는 그가 전투 중 활을 식히기 위해 열두 번 절벽을 오르내렸다는 열두대가 있다. 사진은 열두대의 커다란 바위, 뒤로 보이는 물은 북한강이다.
 신립 장군이 마지막 순간 강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에는 그가 전투 중 활을 식히기 위해 열두 번 절벽을 오르내렸다는 열두대가 있다. 사진은 열두대의 커다란 바위, 뒤로 보이는 물은 북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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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조금 지난 무렵,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왼쪽을 공격하는 좌익대(左翼隊)는 종의지(宗義智, 소 요시토시)가 맡아 3천 군사를 이끌었고, 오른쪽을 공격하는 우익대(右翼隊) 5천 군사는 송포진신(松浦鎭信, 마츠라 시게노부)이 지휘했다. 중앙군 7천 명은 일본침략군 제1군 사령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직접 인솔했다.

소서행장은 충주성 쪽 후미에 예비대 3700여 명도 주둔시켰다. 예비대는 유마청신(有馬晴信, 아리마 하루노부), 대촌희전(大村喜前, 오무라 요시아키), 오도순현(五島純玄, 고토 스미하루)이 나누어 맡았다.

종의지의 좌익대는 달천 오른쪽을 타고 진격해 오고, 우익대와 중앙군은 충주 큰길로 쳐들어왔다. 적은 남한강과 달천을 제외한 탄금대의 3면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탄금대의 북쪽과 서쪽은 강물이었으니 아군과 적 사이의 전투 예정지는 저절로 습지 또는 물기가 축축한 논으로 한정되었다.

말이 달리기는커녕 사람이 걷기도 불편한 땅이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신립의 기병군은 적의 조총 과녁이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 보병은 엎드려서라도 총알을 피할 수 있지만, 말을 타고 있는 기병들은 평지 위로 돌출해 있었으므로 적의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보병은 총알과 화살이 사람을 직접 관통해야 살상이 되지만, 기병은 말만 맞추어도 달리는 속도 또는 떨어지면서 깔리는 피해 등으로 반쯤 살상이 가능했으므로 훨씬 명중률이 높았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아군의 피해는 적의 손실에 비해 몇 갑절씩 늘어났다. 본래부터 군사의 수에서도 차이가 났지만, 죽고 다치는 인원이 증가할수록 아군의 수는 격감하고 적군의 수는 조금만 줄었다.

여러 차례 돌진 명령을 내렸던 신립도 이제는 전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직접 칼을 휘둘러 적군을 계속 참살했지만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죽어 넘어지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적군이 끊임없이 밀려 왔다.

자신의 주변에서 용감히 싸우던 아군 군사들은 어느덧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이미 충주목사 이종장이 외롭게 싸우던 중 적들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들 희립도 아버지를 돕던 중 장렬한 전몰을 맞았다.

신립장군이 순절한 지점을 말해주는 표지석이 저 아래 남한강을 등지고 서 있다. 위치는 정자 탄금정과 신립 장군이 활을 식히기 위해 강물까지 열두 번 오르내렸다는 열두대의 중간쯤이다.
 신립장군이 순절한 지점을 말해주는 표지석이 저 아래 남한강을 등지고 서 있다. 위치는 정자 탄금정과 신립 장군이 활을 식히기 위해 강물까지 열두 번 오르내렸다는 열두대의 중간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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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말을 달려 좌충우돌 적의 목을 베던 중 언뜻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머잖아 자신이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 저들은 나의 목을 베어 창끝 높이 치켜들고서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다. "조선군 총대장의 목이 여기 있다!" 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적들은 호기롭게 호통을 질러댈 것이다' 하는 탄식이 흐르고 지나갔다.

잠시 후 마음을 다스린 신립은 후군을 지휘하느라 여념이 없는 종사관 김여물에게 다가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대를 이 험한 땅에서 살려볼까 하오."

신립은 전투 상황을 조정에 알려 조선군의 향후 작전 계획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김여물은 신립 본인이 이번 출전을 앞두고 조정에 직접 요청하여 종사관(참모)으로 삼았고, 그리하여 함께 충주로 내려오게 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은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4월 14일자 기사가 증언해준다.

당일 실록은 선조가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김여물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긴요한 곳에 근무하게 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명하자 류성룡이 '신이 이번에 김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 군대의 일)를 의논해 보니 무용과 재략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막중(幕中, 본부)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 허락을 받았는데, 신립이 재차 "김여물은 재능과 용맹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입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충주로)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여 다시 임금의 승낙을 얻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김여물이 충주로 오게 되었고,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신립으로서는 그를 어떻게든 살려서 임금에게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김여물은 신립을 향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인들 어찌 죽음을 피한 장수가 되겠소!"

이윽고 신립은 열두대 바위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적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 후, 영원히 신립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申砬將軍殉國之地(신립장군순국지지)' 표지석이 세워졌다.

김여물은 대장의 최후를 지켜본 다음 자신도 강으로 투신했다. 장원 급제한 인재였고, 임금이 알아주는 재목이었지만, 준비가 안 된 대규모 전쟁에 휩싸인 이상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박안민도 이때 강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쳤다.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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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날, 상주 북천 패전 후 충주로 와서 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던 이일은 잽싸게 산 속으로 도주했다. 이일은 숲에서 몇 명의 적군 병사를 만났지만 무난히 물리쳤고, 그중 한 명의 머리를 베어 허리에 꿰찼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충주 패전 소식을 급히 조정에 알린 다음, 왜군 병사의 목과 함께 한강을 넘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 따르면 '(이일을 통해)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다. 병조(국방부)에서는 이일의 죄를 용서하고 바친 왜적의 머리를 남쪽 성문에 매달았다.'

다음날인 4월 29일,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도 충주에 도착했다. 적들은 논의 끝에 소서행장의 1군은 용인을 거쳐 남대문으로 진격하고, 가등청정의 2군은 여주를 경유하여 동대문으로 쳐들어갈 것을 합의했다. 적들은 충주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4월 30일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관련 기사 : '국보 1호 남대문'은 사실상 일본이 정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는 신립 장군

동아일보 1976년 4월 29일자 '역사의 고전장(古戰場, 옛날 전쟁터) (1)' 기사를 쓴 조강환 기자는 탄금대를 '임진란 첫 혈전지(血戰地)', 탄금대 전투를 '최초의 대결전'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강환 기자의 어휘 선택은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실제로도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최초의 전투다운 전투라고 말할 수 있다.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다대포진 전투, 김해읍성 전투, 밀양 전투 뿐만 아니라 상주 북천 싸움조차도 사실상은 조선군 또는 의병부대의 수세에 몰린 방어전에 지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군대가 맞붙어 싸운 대규모 전투로 인정하기에는 크게 미흡한 일방적 패전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탄금대 전투의 참패는 조선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1월 24일자에 사관(史官, 실록을 기록하는 관리)은 '변란(임진왜란) 처음에 신립이 도순찰사가 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조령에서 적을 방어했는데, 험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야로 들어감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모두 패하고 말았다'면서 '그리하여 끝내는 경성(京城, 한양)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이 파천(播遷, 피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금의 피란이 신립의 참패로 말미암아 빚어진 참사라는 통탄이다.

정자 탄금정. 왼쪽으로 가면 신립장군 순절비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신립장군 순절지 표지석과 열두대로 가게 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본래 벼랑길이기 때문이다. 벼랑길에 놓인 계단은 탄금대공원 최고의 답사장소인 열두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준다,
 정자 탄금정. 왼쪽으로 가면 신립장군 순절비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신립장군 순절지 표지석과 열두대로 가게 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본래 벼랑길이기 때문이다. 벼랑길에 놓인 계단은 탄금대공원 최고의 답사장소인 열두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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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다. 심지어 <선조수정실록> 1601년(선조 34) 2월 1일자는 신립이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一敗塗地) 나라가 뒤집어졌다(國隨而覆)'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 기술은 신립에 대한 조정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 기대를 가늠하게 해주는 기사가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4월 17일자에 실려 있다. 신립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군사 책임자)로 임명한 선조는 신립의 군대가 한양을 떠날 때 '친히 왕림하여 전송'했다. 뿐만 아니라 "이일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면서 왕권에 준하는 군사 권력을 주었다.

게다가 선조는 "중외(中外, 나라 안팎)의 정병(精兵, 정예 군사)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 궁궐을 관리하는 관청)의 무기들도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고 허락했다. 중외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의 군기를 있는 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왕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임금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립, 그러나 일패도지

나라의 모든 장졸들을 마음대로 지휘하고, 임금의 거처를 수리하고 경비하는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도 임의로 사용하라고 했다. 이는 임금의 맏아들이라 할지라도 누리기 어려운 권력 이양이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서도 군사 권력만은 줄곧 상왕인 자신이 장악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만하다.

국왕인 선조가 이런 정도였으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립 군의 출정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서울 사람들이 가게 문을 모두 닫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백성들 역시 신립이 일본군을 막아줄 것으로 믿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유적지 답사를 위해 탄금대공원을 찾은 이에게는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되는 곳이 신립장군 순절비이다. 그러나 이 순절비는 1981년에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약한데다 30여년밖에 지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순절비 오른쪽은 대흥사라는 사찰인데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와는 무관하고, 절 경내에 은진미륵불을 본떠 만든 큰 불상 입상이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유적지 답사를 위해 탄금대공원을 찾은 이에게는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되는 곳이 신립장군 순절비이다. 그러나 이 순절비는 1981년에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약한데다 30여년밖에 지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순절비 오른쪽은 대흥사라는 사찰인데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와는 무관하고, 절 경내에 은진미륵불을 본떠 만든 큰 불상 입상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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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립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였다. 임금과 조정, 백성들로부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신립의 일패도지(一敗塗地)를 두고 왕조실록이 '나라가 뒤집어졌다'라고 한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충주는 나라의 한복판으로서 국토의 허리에 해당되는 중앙 지대였으니, 신립의 대패는 사람으로 치면 허리가 부러진 꼴이었다. 이제 일본군이 한양으로 밀어닥치는 것은 거리상으로도 정말 시간 문제가 되었다.

탄금대 서북쪽 남한강 너머 강둑에 서 있는 국보 6호 탑을 흔히 '중앙탑'이라고 부르는 것도 충주가 국토의 중앙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립이 투신 자살한 열두대에서 왼쪽으로 바라보이는 남한강 너머가 중앙탑이 서 있는 지점이다.

탄금대 옆에 있는 국보 탑이 '중앙탑'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사람들의 뇌리에 탑의 위치가 '나라의 중앙'이라는 인식이 박힌 결과이다. 따라서 신립이 탄급대에서 대패했을 때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허리가 부러졌다는 충격이 왔다. 왕조실록은 신립의 패배를 두고 '나라가 뒤집어졌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탄금대 옆에 있는 국보 탑이 '중앙탑'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사람들의 뇌리에 탑의 위치가 '나라의 중앙'이라는 인식이 박힌 결과이다. 따라서 신립이 탄급대에서 대패했을 때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허리가 부러졌다는 충격이 왔다. 왕조실록은 신립의 패배를 두고 '나라가 뒤집어졌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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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의 공식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塔坪里七層石塔)'인데도 사람들은  통일신라기 최대 석탑인 이 탑평리 칠층석탑을 중앙탑이라 부른다. 나라의 중앙에 있다는 인식이다. 원성왕(785∼798) 때 나라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두 사람을 여러 번 출발시켜 보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바로 그 지점에 엄청난 탑을 세워 나라의 중앙이 어디인지를 모두가 알게 했다는 전설이다. 

물론 선조와 조정이 신립에게 큰 기대를 건 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그가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1583년(선조 16) 2월 13일자는 '적이 훈융진을 포위하자 첨사 신상절과 온성부사 신립이 역전 끝에 적의 목 50여 급을 베고 이어 강 건너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부락을 소탕하였다'라고 증언한다.

<선조수정실록> 1583년(선조 16) 2월 1일자도 '오랑캐가 다시 경원부를 포위하였다, 온성부사 신립이 앞장서서 구원하여 성에 들어가니, 적이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신입의 군사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적장 중에 백마를 탄 자가 의기양양하게 보루로 오르는 것을 신립이 한 개의 화살로 쏘아 죽이니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라고 전한 뒤, 이어서 '적이 또 건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중략) 신립이 아산을 구원하러 가다가 안원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성을 넘어 도망하는 자를 발견하고 즉시 목을 베어 깃대에 매달아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니, 적이 그 사실을 알고는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물러갔다'라고 적고 있다.

북방 오랑캐 정벌에 최고 공신이었던 신립

<선조실록> 1588년(선조 21) 윤6월 2일자에도 '남병사 신립이 고미포의 오랑캐 부락에 들어가 정벌하여 20명과 말 3필을 참획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선조수정실록> 1583년(선조 16) 5월 1일자에도 이탕개가 이끄는 1만여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왔다가 온성부사 신립의 반격을 받고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선조수정실록> 1583년(선조 16) 2월 1일자도 '적호가 훈융진을 포위하고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중략)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그때 온성부사 신립이 유원첨사 이박과 황자파에서 샛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라고 말해준다.

신립의 화살을 맞은 추장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오랑캐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의 신립이다" 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중략) 적을 추격해서 70급을 베고, 곧바로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실록은 '(김종서가 개척한) 육진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신립이 앞장서서 용맹을 떨친 덕분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가장 왼쪽에 신립장군 순절비각이 있고, 중앙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대흥사 전경이 보이는 풍경
 가장 왼쪽에 신립장군 순절비각이 있고, 중앙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대흥사 전경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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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에 대해서는 조헌도 극찬을 한다. <선조수정실록> 1589년(선조 22) 4월 1일자를 보면 조헌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신립은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탈영자를) 죽인 작은 허물이 있으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적에게 돌진한 공은(其忘身赴敵之功) 한의 비장이라 할 만합니다' 하고 칭찬한다. 비장(飛將)은 한의 명장 이광을 가리킨다. <사기>는 '흉노는 이광을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피했다'라고 전한다.

심지어 <선조수정실록> 2589년(선조 2) 10월 1일자에는 정여립의 반란군이 한양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신립부터 암살하려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실록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 군수 한응인 등이 "정여립이 모반한다"는 변서(變書, 반란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면서 '자객을 나누어 보내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먼저 죽이고 전지(傳旨, 임금의 명령)를 사칭하여 병사(兵使)와 방백(方伯, 지방 수령)을 죽이기로 (저희들끼리) 약속했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왜적들의 침입을 염려한 선조와 조정은 '대장 신립과 이일을 여러 도에 보내 병비(兵備, 군사적 방비 상태)를 순시하도록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2월 1일자 기사의 일부이다. 물론 선조와 조정이 신립과 이일을 전국의 성곽과 무기 및 군대 상황을 점검하게 한 것은 그 두 사람이 당시의 조선 군부를 대표하는 장군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일은 상주 북천에서,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허무하게 대패함으로써 명성을 잃었다. 두 사람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뒤집어졌다.' (탄금대공원 안의 여러 시설물에 대한 내용은 관련 기사 '왜적과 싸우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장군' 참조)

충주 중앙탑, 탄금대 인근에 있다.
 충주 중앙탑, 탄금대 인근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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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충주, #신립, #김여물, #이종장,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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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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