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희망의 종이학 프로젝트>는 후쿠시마 참사 5주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71주기를 맞아 기획된 탈핵을 위한 프로젝트로, <희망의 종이학 프로젝트> 노동당 참가단은 후쿠시마와 히로시마 등 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지난 8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간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연재합니다. - 기자 말

탈원전텐트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호소 중인 후쿠시마 주민
 탈원전텐트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호소 중인 후쿠시마 주민
ⓒ 안현진

관련사진보기


지난 8월 2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참사 이후 약 5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천막농성을 하며 일본 원전 반대 운동의 상징이 된 '탈(脫)원전텐트(Anti-Nuclear occupy tent)'가 철거됐다.

'탈원전텐트'는 도쿄 경제산업성 청사 앞에 설치된 천막으로, 후쿠시마 참사 이후 6개월 뒤인 2011년 9월 11일경 원전 재가동 반대시위를 하며 만들어졌다. 이후 활동가들은 돌아가며 천막을 지켰고, 처음 만들어질 당시 한 개였던 천막은 세 개로 늘어났다. 텐트를 지키는 주민/활동가들은 대부분 60~80세의 고령이었다.

카메야 유키코씨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난민이다. 사고가 발생한 발전소로부터 약 1.2km 거리에 거주하고 있던 카메야씨는 첫 대피명령을 듣고 피난을 시작해 도쿄에 정착하기까지 5~6번 정도 피난지를 옮겨야만 했다.

참가단과 교류 중인 카메야 유키코
 참가단과 교류 중인 카메야 유키코
ⓒ 안현진

관련사진보기


"방재훈련은 실제 재난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큰 지진이 나 땅이 많이 흔들렸다.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남편이 내 뒷덜미를 잡고, 같이 기어나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방사능이 유출됐으니 대피하세요'라고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인근의 고향집으로 대피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다. 평상시에는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고향집에 가는 데 5시간이나 걸렸다. 도착했지만 지진으로 인해 가스가 끊겨, 집에서는 추위를 피할 수 없었다. 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차에 있었는데 12일(2011년 3월) 새벽 6시경 사이렌이 울리며 '핵발전소 인근 10km 지역에 있는 모든 이들은 대피하라'는 방송이 들렸다."

그는 대피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고향 집에 함께 있던 9명이 차를 타고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친척집으로 다시 이동했다. 친척집은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TV를 보며 상황을 알 수 있었다"며 카메야 씨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13일 새벽에도 가족들과 함께 차에 있었다. 새벽이 되자 날이 추워 모포를 덮었지만,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10분 만이라도 히터를 틀고 싶었지만, 휘발유가 부족해 모포를 덮고 버텼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힘들면 죽는 게 낫겠다'고 하자 남편은 바보 같은 말 하지 말라며 화를 냈고, 조카는 내게 같이 힘내자는 말을 해주었다."

카메야 유키씨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통해 피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배급권을 받지 못한 자신들의 사정을 듣고 몰래 기름을 나눠준 주유소 직원, 피난 중인 사람들을 보고 집으로 데려가 빵과 옷을 나눠준 할아버지의 사연도 들려줬다. 

한편, "피난소에 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저 생리 시작했어요'라고 울면서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피난소에는 생리대가 없었고,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비닐봉투와 휴지를 주었다. 이후 밤에 다시 찾아와 고맙다고 우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며 피난소의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천막은 제2의 고향"

1789일(참가단이 텐트를 방문한 8월 3일 기준)째 천막농성
 1789일(참가단이 텐트를 방문한 8월 3일 기준)째 천막농성
ⓒ 안현진

관련사진보기


카메야씨는 사고 이후, 3월 28일이 되어서야 도쿄에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생활을 이어가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메야씨는 "후쿠시마에 대한 대책 마련도 없이 원전을 재가동하려는 시도들을 보며 탈원전텐트의 농성에 참여하게 됐다. 내가 살던 곳은 후쿠시마 후타바마치다. 나는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도쿄에 살며 처음으로 안전과 안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됐다"며 농성에 함께 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텐트 철거 판결을 확정한 후, 텐트는 1807일 만에 강제 철거됐다. 지난 7월 28일, 재판부는 국유지를 점거하고 있는 점을 빌어 강제집행이 권리 남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탈원전텐트'의 책임활동가인 후치가미 타로씨에게도 손해배상 판결이 떨어졌다. 국유지에 텐트를 설치함으로써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 이유다. 이 소송에서 패소해, 후치가미씨는 하루 당 2만1000엔을 배상해야 한다. 총 약 4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원전은 존재 자체가 범죄

탈원전텐트의 책임자로 약 4억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후치가미 타로씨
 탈원전텐트의 책임자로 약 4억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후치가미 타로씨
ⓒ 안현진

관련사진보기


후치가미 타로씨는 "이곳이 국유지인 것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원전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국민으로서 항의하는 것은 당연한 민주주의의 권리"라며 "우리는 원전을 없애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 전혀 불법적인 점거가 아니다. 철거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정의와 정부가 말하는 정의 중 어떤 것이 더 의미를 가지는가 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현재 정부와 도쿄전력은 사고 수습은커녕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이나 진상, 상황 등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원전을 재가동하겠다는 것인가. 원전사고 이후 원자력규제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부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후쿠시마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사고로 인해 후쿠시마는 공동체가 파괴됐다. 방사능을 제거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한편, 피난 생활을 하는 난민들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주거제한이 해제되는 구역 또한 안전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런데도 지원금이 끊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쿠시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생긴다."

'탈핵' 국제연대가 필요한 시점

탈원전텐트의 주민/활동가들과 교류를 하는 도중 텐트 밖에서 누군가 확성기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익단체의 회원들이 '텐트를 철거하고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한다. 정부의 철거명령과 손해배상청구, 우익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고령의 분들이었다. 왜 고령의 주민들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가를 묻자 후치가미 타로씨는 이렇게 말한다.

"고령의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세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기억, 전쟁에 대한 반발을 젊은 세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전쟁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평화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4백여 개의 원전이 있다. 일본에는 폐로가 결정된 원전이 있지만 10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 폐로를 결정한 이후에도 후속조치를 위해 50~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원전을 없애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금 73세인데, 모든 원전이 폐로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

그럼에도 여러분과 함께 큰 방향을 만들어가고 싶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로운 이유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인 탈핵 운동에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국제연대를 바란다."


태그:#후쿠시마, #원전사고, #탈원전텐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