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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 송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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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탈에다 색칠을 하던 노숙인 A씨는 갑자기 신승녀 소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 제 삶이 '목표가 아니라 방향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표만 정해서 가다보니까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달려 온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 자리네요."

A씨의 눈에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방울방울 맺혔다. 하지만 A씨는 더 이상 삶의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하던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수원역 근처에서 무료급식을 얻어먹은 그는 이제 서점으로 가 신 소장과 함께 얘기했던 서적을 찾아 읽는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는 지난 봄부터 수원노숙인다시서기종합센터에서 진행한 인문학 미술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먹은 게 많지 않아 바지 주머니에 물병 하나를 넣으면 바지가 그대로 흘러내렸던 노숙인 A씨는 다른 노숙인 29명과 함께 수개월간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탈바가지와 연필로 그린 자화상, 찰흙으로 빚은 나의 손 등 수백여점의 작품이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수원시가족여성회관 문화관 2층 갤러리에서 '내가 희망이다'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전시회 초대장에는 노숙인 30명 전원의 이름이 출품인이라는 명칭으로 인쇄됐다. 그들 모두가 전시회를 개최하는 작가가 된 셈이다.

신승녀 소장의 오픈 스튜디오가 다른 이유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 신승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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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지난 봄부터 사회복귀를 꿈꾸며 미술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희망을 찾아가는 그들의 여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그들의 말에 녹아 있었던 인생의 깊은 내공은 미술 작품에도 그대로 투영됐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술가입니다."

전시회 말미인 지난 7일 신승녀 소장(수원푸른교실&미술치료연구소)이 수원시글로벌청소년드림센터(센터장 최병조 신부)에 나타났다.

그가 진행 중인 이주배경 청소년을 위한 집단 미술치료 '오픈스튜디오'는 전혀 색다른 미술 프로그램이다.

"한국의 미술 혹은 예술 치료는 참가자를 투사하고 검사하는 과정을 거쳐 내면을 밝혀내는 것에 매몰돼 있습니다. 참가자의 내면을 많이 들춰낼수록 훌륭하다, 능력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신승녀 소장의 오픈 스튜디오는 철저하게 참가자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한다. 교육실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에 제한이 없고 어떤 재료로 어떤 미술 작품을 만들지도 스스로 결정한다. 신 소장은 조언만 할 뿐이다.

"미술은 원래 창작입니다. 창의성과 같은 순간적인 판단력을 길러주는 활동입니다. 이러한 활동에 짜여진 분석과 틀을 들이대며 미술을 그저 도구로서만 이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가 느끼고 판단해서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결심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 신승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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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그의 오픈 스튜디오에는 중도입국 청소년 2명이 참여했다.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들어와 즐거운 수다를 떨던 두 청소년은 그림을 그리자고 했더니 한 소녀가 어두운 방에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조명을 켜는 그림과 귀가 없는 사람이 놀림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림을 그렸다.

다른 미술 치료사였다면 이 청소년들이 어두운 방에서 왜 블라인드를 내렸는지 귀가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인지 분석하고 의미를 추적하는 일에 골몰했겠지만 신 소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볍게 몇 마디 나눈 정도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두 청소년의 미술작품을 완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도화지에 연달아 그린 그림은 한권으로 묶어서 미니북이 됐고 검은 스크레치 종이에 그린 그림도 작가 이름과 사인을 넣자 작품이 됐다. 자신의 그림에 당황해하던 두 청소년도 작품으로 완성된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보통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 귀가 없는 사람을 그리지는 않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어떤 문제를 내재하고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지로 드러내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숙인들, 밥 얻어먹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아냐"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2016.09.05~09.08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열린 ‘내가 희망이다’ 인문학 미술 프로그램 작품전시회
ⓒ 신승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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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연스러운 대화만으로 충분한가. 미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참가자들에게 주는 효과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상을 살아갑니다. 미술 활동은 이들의 일상에 자극이 되고 그것은 파동을 일으킵니다. 그들의 삶에 일으키는 파동(흔들림)은 변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미술창작이 작품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냥 우리끼리 보고 만족하는 놀이(?)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노숙인들은 사회복지 혜택을 입으며 밥이나 얻어먹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든 미술품은 스스로 먼저 사회에 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외침입니다. 그들의 미술품은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어도 자기 자신을 표현한 '아웃사이더 아트'로써 중요하게 인정되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2016.09.07 수원시글로벌청소년드림센터에서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하고 있는 신승녀 수원푸른교실&미술치료연구소 소장
 2016.09.07 수원시글로벌청소년드림센터에서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하고 있는 신승녀 수원푸른교실&미술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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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앙드레 브르통과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1920년대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작품을 모아 아웃사이더 아트 전시관을 만들었다.

삶에 대한 깊은 사색과 관조가 예술 창작의 기본이라면 노숙인과 중도입국 청소년만큼 자신의 삶을 고민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창작이 작품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래,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기다문화뉴스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태그:#노숙인, #중도입국, #오픈 스튜디오, #수원시글로벌청소년드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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