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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가 지난 6월 약 20억 원의 교회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고발돼, 곧 검찰 조사를 받게 된다. 이렇듯 한때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대명사였던 한국 진보적 종교인들 중 지금은 김진홍과 박홍 처럼 정반대 편에서 권력에 안주하며 수구세력의 대변자로 자리바꿈한 자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외양적 규모와 정치·사회적 영향 면에 있어서 타종교나 타집단을 불허할 정도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웬만한 지성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봐도 뭔가 잘못되어있다. "장로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교회를 이용할 뿐이지,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정치나 정책을 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지적, "한국 교회가 신도 수를 믿고 권력 속에 쏙 들어와 있다"는 비판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지금 내가 잘못된 곳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면 인간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고 문제의식을 느낄 때까지는 아직 늦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힘들다. 이를테면 혈색이 이상한 환자가 진찰받기를 거부하고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일삼으면 치료될 가망이 없다. 나는 한국 기독교·천주교가 변화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이들의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과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김진홍(1941~ ), 빈민의 친구가 재벌의 친구로

 김진홍 목사(자료사진)
 김진홍 목사(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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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은 지난 1971년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설립하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쳤다. 당시 김진홍의 생활은 눈물겨웠다. 열악한 곳에서 구제활동을 할 때, 정작 자기 집안은 돌보지 않고 아이들은 굶기기가 일쑤였다. 밀가루 한 봉지만 생겨도 옆집에 가져다주니 아이들은 폐병에 걸리고 또 집은 비가 샜다. 그의 아내는 마침내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고, 청계천 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해서 두레공동체를 설립했다. 1980년대 김진홍은 공동체운동, 대안교육운동, 북한 돕기 운동 등을 펼친다. 위의 이러한 김진홍의 행적은 우파보다는 좌파에 가까웠고 예수의 정신을 삶으로 보여준 실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 김진홍은 180도 변했다. 그의 연민의 대상은 빈민에서 재벌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업그레이드됐다, 이명박 당선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거친 그는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의 방송통신정책 대토론회 환영사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바뀌었지만 정권교체 사명이 완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면서 "방송·통신·문화·언론 모든 분야에 좌파의 일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직도 국민여론을 그릇되게 이끄는 면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역설한다.

그는 또 뉴라이트가 공영방송을 비롯해 방송 논조와 국민 여론을 우파성향으로 바꾸고, 방송문화계의 좌파세력 퇴출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더욱이 그는 "노근리 사건을 KBS가 1시간 특집으로 다뤘는데 미군이 마치 남한의 양민을 학살하러 온 것처럼 그런 내용으로 비쳤다"며 이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방송인가, 평양에서 나오는 방송인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좌 성향으로 기울어졌다"고 비난했다.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빈 노근리 희생자들의 아픔과 절규는 김진홍에게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미군이 예수보다 소중하고, 목사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덕목인 사랑보다 '반공'이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김진홍은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아니다.

그는 좌에서 극우로, 진보에서 수구로, 부자와 기득권자들을 위한 대변자로 변신했다. 이제 검찰이 '뉴라이트전국연합'을 이끌던 김진홍 목사를 교회자금 횡령 혐의로 조사할 방침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오늘의 김진홍이 한국교회의 병든 모습을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과장일까?

박홍(1941~ ), 불의에 맞선 항거자에서 거짓예언자로

 서강대 메리홀에서 김기설씨 분신자살에 대해 기자 및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박홍 서강대총장. 1991.5.8
 서강대 메리홀에서 김기설씨 분신자살에 대해 기자 및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박홍 서강대총장. 1991.5.8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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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은 별명을 한국의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매카시는 냉전시대 허위증언으로 미국에서 찰리 채플린(1889~1977)을 포함한 진보인사들을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과 추방을 일삼았다.

박홍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정치꾼이 아닌 '성직자'라는 가톨릭신부 임에도 불구하고 매카시 수준의 거짓증언과 근거 없는 모함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인권탄압을 유도했다. 1991년 박홍이 근거 없이 내뱉은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거짓말은 가뜩이나 종교인의 보수성에 고개를 절래 흔드는 이 땅의 젊은 세대들에게 아예 종교로부터 절교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해 준 면에서 박홍의 죄는 이루 표현 할 수 없이 크다.

박홍의 1970년대 행적은 분명치 않으나 그가 김지하와 막역한 사이였다는 소문은 있다. 요즘은 김지하가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말년을 보내고 있지만 당시 김지하는 '5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깊은 고뇌와 자기 성찰적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반면 박홍은 당시에도 '악동' '괴물'이라는 그의 별명이 암시해주듯 종교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성숙함이나 교양하고는 좀 거리가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점이 오히려 '항거자'의 모습으로서는 어울려, 1980년 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수사본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도 5일간 단식으로 맞섰다는 무용담은 유명하다.

박홍이 단순히 소영웅주의자 이었는지 진보적 가톨릭신부였는지 여부에 관한 논의는 일단 미뤄두자. 여하간 적어도 1970~80년대 그는 매카시주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한국의 매카시로 첫 데뷔를 한 것은 1991년. 당시 강경대 사망사건 등으로 시작된 분신정국 때 그는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 제비뽑기를 통해 죽을 사람을 정한다" 는 등 그는 거침없이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목소리를 높였다. 근거도 구체성도 없는 거짓증언으로 박홍은 레드 콤플렉스가 팽배한 남한 사회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그는 서강대 대학총장으로 재직한다. 유교적 교육열과 '신분질서'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신부이자 대학총장의 말 한마디는 거의 '모세십계명' 대우를 받는다. 그런 그가 1994년 7월 청와대 오찬에서 '결정적 발언'을 한다. "대학 내에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으며...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 그는 한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명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 후 정치, 언론 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다.

이런 '박홍계명'에 대해 당시 <조선일보>는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 다음 날부터 박홍의 거짓말을 그대로 대서특필함으로써 남한사회 매카시즘의 광풍에 기름을 퍼부었다. "박 총장 발언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주사파" 라고 <조선일보>는 여론을 몰아붙였다. 그 보수적인 검찰이 박홍 "발언의 신빙성이 없다"고 발표했음에도 <조선일보>는 투우사를 향해 질주하는 '미친소'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박홍을 옹호했다.

박홍과 <조선일보>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나 할까. 결국 박홍의 발언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7년 5월 법원이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대해 근거 없이 주사파 발언을 한 박 총장은 7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함으로 박홍의 매카시즘 사기극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박홍 주연, <조선일보> 조연의 주사파 발언소동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레드콤플렉스에 노출되어있는지를 여지 없이 보여주는 서글픈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강기훈 대필 조작사건 재심 무죄 확정이 났을 때 박홍이 총장으로 있던 서강대 동우회·교수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강기훈 대필 사건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의 만행에 대해 비판하고 박홍이 이제 참회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라며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박홍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만행'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명동성당, 더 이상 약자들 위한 공간 아닌가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명동성당을 찾은 가톨릭 신자들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명동성당을 찾은 가톨릭 신자들
ⓒ 오마이뉴스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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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라고 불렸다. 각종 집회와 민주화를 촉진하는 성명서는 명동성당에서 발표되었고 김수환 추기경이 있는 명동성당에는 독재자들도 감히 시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전·의경이나 형사들을 투입시키지 못했다.

특히 1976년, 지금은 그 말도 사라진 '재야' 인사 함석헌이 야당지도자 김대중 등과 명동성당에서'3․1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한 사건은 '명동사건'으로 불리며 국내는 물론 세계에도 명동성당이 널리 알려지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서슬이 시퍼렇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우뚝 솟았던 명동성당은 그래서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주화를 열망하는 씨알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런 명동성당에 단군 이래 최초로 경찰을 투입한 것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현충일 아침이었다.

당시 장로 대통령 YS는 전경들에게 명동성당에 대한 기습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을 잡아갔으니 그것도 한국 현대사의 아이러니다. 평소 교회를 안방 드나들듯이 하던 YS는 전혀 교회나 성당의 '권위'를 오히려 못 느꼈던 것 같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명동성당의 보수성이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1997년 6월 14일 한총련 지도부 단식농성 때 명동성당 측은 농성자들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여준다. 당시 성당 측은 배고프고 목마른 학생들을 따스하게 받아주기보다는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한 40대 여신도는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이런 냉정한 반응은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한총련이 주최한 8.15 통일대축전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로 인하여, 정부의 대대적 제재와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전반적으로 여론도 한총련의 폭력시위를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으니, 명동성당 측 역시 여론에 따라 강경하고 냉혹한 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한총련 입장에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굉장히 섭섭했을 것이다.

1998년 7월에는 직장을 잃은 은행퇴출 노조원들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당 측은 이들에게 격려나 위로를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농성 천막을 직접 철거했다. 당시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은 "어느 시대에나 성역은 필요하고 국민적 합의에 따라 명동성당이 그 역할을 해왔으나 구약에서도 국민적 지탄을 받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 만큼 성역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무조건 보호해서는 안 되며 그래야 명동성당을 성역으로 지켜나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부터 역설적으로 명동성당은 더 이상 '성역'이 되기를 포기했고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의 위치를 스스로 버린 '실낙원'으로 전락하였다.

1999년 4월 서울지하철노조 파업농성 때에는 검찰에서 급기야 직접 명동성당에 찾아와 "공권력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혹시나 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명동성당을 계속 찾아왔지만 더 이상 성당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2000년 12월 한국통신노조 농성 때도 명동성당은 초강경으로 대응했다. "각종 단체의 집회 신고 시 장소가 명동성당으로 명기된 경우에는 항상 명동성당의 동의서 첨부가 있어야 허가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공권력 요청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단호히 밝힌 것이다. 이것은 향후 집회를 불허한다는 방침이자 경찰투입을 스스로 요구한 셈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대해 무관심하겠다는 공식선언인 셈이다.

그럼 1970년대 한국의 진보교회를 상징하고 사회정의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이자 친구였던 명동성당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 뿌리를 김수환 추기경의 변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김 추기경은 가난하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친구이자 후원자 역할을 했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는 균형을 잃은 수구적 발언으로 한국사회에 논란과 파장을 일으켰고 진보 인사들에게는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공개발언으로 김대중 정부가 호남편중 인사를 한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영남 출신 고위공직자는 28%로 호남 출신 22%보다 많았다. 그런 김 추기경이 영남 정권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45%대를 넘나드는 영남편중 인사에 대해선 일체 침묵했다.

그는 2004년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고,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오히려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함세웅 신부는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종교의 세속화라는 차원에서 보면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메카라는 영광스런 역사적 자리를 스스로 박차버리고 그저 고딕양식의 건물을 대표하는 서울의 관광명소로 전락한 것은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고난받고 소외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할 때 그 종교는 아편과 같은 마약의 위치로 전락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보아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메카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해악인 아편이 될 것인가? 향후 선택은 명동성당 스스로에게 달렸다.

과거 군사정권기 중 한국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희생하며 이 땅에 민주화운동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진보기독교 인사들 중 김진홍과 박홍 등 상당수는 그 후 현실과 타협함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상적 종교인의 모습을 상실해 간 것이다.

진보기독교인들이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그들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역동성과 추진력을 보여주며 한국의 '양심'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진보기독교 인사들도 현실에 안주하며, 힘과 권력의 단맛에 중독되면 보수·수구화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오히려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용산참사나 세월호참사 희생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벌판에 놓아두고 오히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박근혜정부 하에서는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을 돌보는 일,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진리로 정의를 베푸는 것"이 곧 예수 제자라는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 가르침의 정반대 편에 있는 오늘 한국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적 전도전략이나 경제대국을 이룩하기 위한 기도회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냉엄하고 뼈아픈 성찰과 반성이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상실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을 회복할 때 역사는 한층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국의 '양심'으로 부활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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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영국에서 역사학 학/석/박사 공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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