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들의 섬>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들의 섬> 포스터 ⓒ (주)시네마달


부산 영도엔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다. 국가 기간산업으로 일컬어지며 한때는 전 세계를 주름잡기도 했던 한국 조선업의 역사가 이곳에서 태동했다. 패망 후 일제가 버리고 간 조선시설을 나라에서 인수해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한 게 모태로, 공기업 형태로 존속하다 극동해운을 거쳐 1989년 한진에 매각됐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운동의 역사를 그렸다. 혹자는 한진중공업의 역사가 한국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진 노동쟁의의 역사라고까지 말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고 이에 대한 반발을 갖은 방법으로 탄압해온 자본의 역사, 그것이 한진중공업의 화려한 과거 이면에 길게 자리한 그늘이다.

어느 시사회 자리에서 김정근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경제성장의 빛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들을 그림자라 생각해 지었다"고 밝혔다. 조선소가 자리한 영도가 그림자 영(影)에 섬 도(島)자를 쓴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조선소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그림자였다. 아침 조회부터 퇴근 후 종례까지 편히 쉬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일만 하는 삶을 꼬박 한 달 살고, 그렇게 손에 쥔 돈은 술값이며 방값을 대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회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으고 모아서 방 한 칸 내 집을 마련하면 며칠을 잔치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술만 마시면 세상을 다 바꿀 것 같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보면 그렇게 말 잘 듣는 직원이 따로 없었다는 사람들. 회사는 이들을 온종일 강도 높고 위험하기까지 한 노동환경으로 몰아넣어 불만 없고 일 잘하는 기계로 만들어간다.

20년을 가로질러 되풀이되는 그림자의 역사

 영화 초반부 차츰 영도 조선소로 가까이 다가서는 도입부는 이 영화에서 손꼽을 만큼 아름답게 연출됐다.

영화 초반부 차츰 영도 조선소로 가까이 다가서는 도입부는 이 영화에서 손꼽을 만큼 아름답게 연출됐다. ⓒ (주)시네마달


한 발 잘못 디디면 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하는 위험한 환경을 매일 같이 누비다 누군가 하나 떨어지면 '저기 저놈 가는구나' 남일 보듯 말하는 무신경함에 혀를 내두르고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는 김진숙 지도위원. 그런 그녀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는 어느 날의 이야기가 영화를 보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엉겨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그녀는 한 노동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사용자 측은 김 지도위원에게 이미 작성해 사인만 하면 된다는 진술서를 내밀고,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서류에 사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서, 밖에 나와 쭈그리고 아빠를 기다리는 망자의 자식들을 발견한 그녀는 '아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했구나!'하고 느꼈다는 것이다. 성실한 직원의 길과 충실한 인간의 길이 절대 같지 않음을 깨달은 날이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그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시작이 되었던 작은 불꽃. 그 불꽃을 점화한 20대 여성 노동자 김진숙의 대의원 출마. 어용노조가 판을 치던 당시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돼 빨갱이 취급을 받고 해고된 그녀는 식사거부 투쟁 등 당시 노동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운동을 이어나간 끝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출범시키게 된다.

1991년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고(故) 박창수 노조위원장, 2003년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사측을 규탄하며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살아 내려오지 못한 김주익 노조위원장, 김 노조위원장의 죽음이 알려지고 4도크 아래로 몸을 던진 곽재규씨까지. 한진중공업, 나아가 이 나라 노동자들에 의해 열사로 기억되는 이들의 죽음도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다.

특히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장례식장에 난입, 그 주검을 탈취한 공권력의 무도함은 영화가 시작하며 사진관 안에 들어선 한진중공업 노조원의 가슴팍에 달린 리본 위 이름과도 묘하게 얽힌다.

'최종범 열사 정신계승'이라 적힌 검은 리본은 삼성전자 수리기사로 일하다 2013년 10월 사측의 노조탄압에 자살을 선택한 최종범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징표인데, 이후 2014년 5월 역시 삼성전자 수리기사였던 염호석씨가 자살하자 시신탈취와 화장논란이 재현된 바 있다. 당시 노조는 경찰이 300여 명의 공권력을 투입해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탈취해 화장했다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서 일어난 믿기 어려운 사건이 20여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오늘의 한국에서 되풀이된 것이다.

전반부는 '만족', 후반부는 '글쎄'

 1980년대 부산 영도 조선소 직원식당 모습.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소에서도 식당은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1980년대 부산 영도 조선소 직원식당 모습.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소에서도 식당은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 (주)시네마달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조가 써온 지난 30여 년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사실상의 어용노조에 밀려 사측과의 협상 테이블에도 앉지 못하는 제2 노조가 됐지만 그 어느 노조보다 찬란한 성취를 이룩했던 과거를 안은 이들.

영화는 지난 2010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부터 6년간 이들 곁에서 카메라를 들어온 김정근 감독이 찍었다. 그는 노조가 지나온 30여 년의 길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적절히 자르고 붙이며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자료 사이사이로 김진숙, 박성호, 윤국성, 박희찬씨 등 한진중공업 노조의 역사를 함께한 이들이 카메라 앞에 나서 직접 지난 시간을 증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장단이 명확하다. 지난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해 성취와 절망의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면 후반부는 그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역시 정돈돼 있지 않아 다큐멘터리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유효함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구획이 뚜렷하다. 앞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회상에 초점을 맞춰 한진중공업 노조의 탄생과 승리를 감동적으로 그린다. 뒤는 그렇게 만들어진 민주 노조가 일시적 승리감에 도취돼 해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위기에 처해 마침내는 오늘에 이르는 고난의 역사로 채워진다.

전반부는 목적지가 확실한 이야기지만 후반부는 오늘날 노동운동이 마주한 복합적인 문제가 반영돼야 했다. 많은 고심이 있어야 했지만 영화엔 그런 고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노무현과 박근혜를 보여주는 방식

 2011년 11월 10일,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지 309일만에 내려오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2011년 11월 10일,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지 309일만에 내려오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 (주)시네마달


무엇보다 다양한 시선과 해석이 담길 수 있었던 후반부가 현 노조원의 인터뷰에 더해 방송, 신문기사를 덧붙인 정도로 채워진 게 아쉽다. 현 노조에 등 돌리고 어용노조에 가입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거나 정부의 노동정책이나 노조의 실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나아갔다면 이보다 명확하고 파급력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같은 다소 불편하고 까다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현 노조원들의 과거 회상과 현재의 모습 정도를 비추는 데서 만족한다. 영화의 후반부가 안이하고 편하게 찍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 건 이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노조의 실책을 김진숙 지도위원의 몇 마디 말로 가볍게 다루고 지나간다. 회사와 사회, 회사 내 비정규직 등을 백안시하는 '귀족노조'라는 개념이 주류 언론들을 통해 익숙하게 전해지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 노조가 노동자의 지지를 잃어가는 과정을 가볍게 치고 넘어간 건 너무나 안이한 선택이었다. 당시 노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래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조금은 더 가까이에서 다룰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 영화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2차례에 걸쳐 등장시킨다. 첫 등장은 1991년 초선 국회의원 시절로 의문사를 당한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장례식장을 찾은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되고 파업에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상대적으로 노동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온 대통령임에도 취임 후 노동운동에 강경한 자세를 취한 데 대한 은근한 비판으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두 장면의 의미심장한 배치, 그 이상으로 나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참여정부가 오늘의 노동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 노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 역시 한 차례 등장하지만 관객의 실소를 자아내는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한진중공업의 어제와 오늘을 다루는 이 영화는 이미 흘러간 과거를 복원하는 노력 이상으로 현재진행형인 오늘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 한진중공업 노조와 한국 노동운동의 오늘에 정부의 정책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본래 목적한 바는 그저 노조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왜 이 같은 고난을 감내하며 가시밭길을 걷는지, 왜 크레인 위에 오르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들이 왜 이 같은 길을 걸어가는지, 우리 사회는 대체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의 답은 이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들의 삶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큰 영화였다. 하지만 의미도 적지 않았다. 한국 노동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아로새긴 한진중공업 노조와 그 역사를 만들어온 노조 구성원들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임을 보여준 게 이 영화가 거둔 가장 큰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한국사회 한 켠에서 기득권 세력의 저열한 공작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보여준 점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림자들의 섬 근무 중 사망한 동료 노동자를 애도하는 한 노동자의 모습

▲ 그림자들의 섬 근무 중 사망한 동료 노동자를 애도하는 한 노동자의 모습 ⓒ (주)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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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들의 섬 (주)시네마달 김정근 한진중공업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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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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