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발을 말리며 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발을 말리며 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 ⓒ 시네마달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안이 다 텁텁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그리 맑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원하게 비가 내리지도 않는다.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 하늘빛이다. 하지만 그 하늘빛을 닮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드디어 스크린으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전으로 발을 뗐다.

지난달 8월 25일,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 <그림자들의 섬>이 2년간의 인고 끝에 개봉했다. 스토리펀딩을 통해 시민들의 모금액을 모아 어렵사리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직을 맡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309일 간 농성을 이어가던 때, 그곳으로 향하던 수많은 희망버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스를 타라>에 이은 김정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푸른 옷의 그림자들이 전하는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30년

"또 한 놈 깨졌네."

민주노조가 세워지기 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열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뚜렷한 비판의식을 내세우지 않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비롯한 박성일, 윤국성, 박희찬 등 민주노조의 터를 함께 지키고 닦아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스크린 위로 전해지는 수많은 말들이 이를 방증한다. 쥐똥이 즐비한 도시락, 제대로 갖추어져있지도 않은 화장실, 일터와 쉼터 사이의 무경계.

그들은 그 와중에 동료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이나 분노 등의 인간이라면 가지게 될, 인간이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외면해야만 했다. 같이 일하던 동지가 나무로 덧대어진 구조물 사이를, (1년에 한 번 나오던) 안전화를 신고서 걸어가다 미끄러져 떨어져 죽음을 맞아도 "또 한 놈 깨졌다"라는 말로 위로하는 그런 현실. 그것이 곧 나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커다란 선박 옆으로 올라가 다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일을 했다.

그러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유례없는 대의원 출마를 하게 되면서 변화가 일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저 아침이면 술 얘기, 혹은 여자 이야기뿐이던 아저씨들이 대의원 선거에 '진숙이가 나갔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김진숙 위원은 해고당한 채 아직도 복직되지 못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행동이 시작됐다. 사측에서 노조를 수동적으로 구성하던 과거와 달리 직선제를 통해 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단결이 이뤄졌다.

ⓒ 시네마달


마침내 제대로 된 식당이 지어지고,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너무도 당연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의 기억으로 빚어진 영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모습은 투박했다. 그들이 보인 인간된 움직임이 모여 한진중공업의 민주노조를 이끌었고, 이는 1987년 7월 25일 유례없는 총파업을 통해 분출됐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고자 한 사람들

<그림자들의 섬>은 숱한 정리해고에 투쟁으로 맞선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역사를 풀어낸다. 김정근 감독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한 장면, 한 장면 꾹꾹 눌러 담아 담백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노순택 작가를 비롯한 사진작가들의 생생한 사진들이 출연자들의 목소리 위로 겹치며 그들의 말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영화는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서있고자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춘다.

어떻게 투쟁의 길이 순탄하기만 하겠나. 흑자를 기록하는 상황에서도 이유 없는 정리해고를 발표하고, 복직을 약속한 이후에도 차일피일 미뤄지는 복직 탓에 빚이 늘어가는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적인 삶에 갈증을 표한다. 몇 백 명씩이나 되는 푸른 그림자들을 덜어내려는 한진 자본의 행보 속에서 한진중공업 민주노조는 동지 4명을 잃었다.

한진중공업의 민주노조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걸어온 30년의 역사는 곧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온몸으로 빚어낸 투쟁의 역사이다. 영화 속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 김주익 지회장이 올랐던 그 길을 다시 오르기로 한 때에 "이미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은 채였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가 그곳에 올랐던 날부터 309일이 지나기까지 많은 이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한 이유는 한 인간이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도무지 만나기 힘든 그림자들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투쟁 역사가 피어난 거점지인 부산을 비롯해 대구와 경북,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그래도 상영관이 눈에 띄지만, 그 외의 지역은 상영관이 거의 전무하다. 특히 충청권에는 상영관이 대전 아트시네마 하나뿐인데다, 그마저도 상영 날짜가 많지 않다. 상업 영화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회의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영화관을 들어가 봐도 천편일률적으로 비슷비슷한 영화들만 타임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은 씁쓸하기만 하다.

<그림자들의 섬> 배급을 맡은 시네마달을 통해 공동체 상영을 신청하면 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적어도 20명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상영관을 찾기 어려운 지역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는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만약 주변 상영관을 찾아보고 싶다면, 시네마달 페이스북 페이지나 인스타그램을 참고해 상영관 및 일자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은 곧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그들이 인간이기 위해 투쟁해온 시간들은 그들처럼 푸른 옷을 입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삶에도 해당된다.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는 인간에 대한 공감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전하는 그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이를 진실 되게 <그림자들의 섬>으로 담아 전달해 준 김정근 감독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 포스터

영화 <그림자들의 섬> 포스터 ⓒ 시네마달



그림자들의 섬 김정근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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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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