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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북천전적지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의 모습. 그러나 이 문이 사당 충렬사의 외삼문인 것은 아니다. 그저 이곳 사적공원의 정문일 뿐이다. 외삼문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 앞에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북천전적지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의 모습. 그러나 이 문이 사당 충렬사의 외삼문인 것은 아니다. 그저 이곳 사적공원의 정문일 뿐이다. 외삼문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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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을 답사할 때에 해당 서적을 미리 읽고, 관련 기념관이나 박물관 등을 사전에 둘러본다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특히 단위가 작은 지역의 기념관일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그런 뜻에서, 경상북도 상주시 임란북천전적지 경내에 들어온 이상 무엇보다도 먼저 임란기념관을 둘러볼 일이다.

역사유적 답사 때는 기념관부터 둘러보면 좋아

사당으로 가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뜰 좌우에 재실과 임란기념관이 기다리고 있다. 재실은 여느 곳에서나 보는 평범한 건물이지만 임란기념관은 이름만 그럴 뿐 내용은 평범할 리가 없다. 상주북천전적지의 임란기념관인 만큼 지역적 특색이 잘 반영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과연 기념관 안은 북천 전투와 이곳 경내에 있는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일이 없도록 임진왜란 전체에 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해설해준다. '임진왜란 전체 개관'이라는 게시물이 바로 그것이다.

비각과 기념관 사이 계단으로 사당 내삼문이 보이는 모습
 비각과 기념관 사이 계단으로 사당 내삼문이 보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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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 부른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군 20만 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벌어졌다. 이후 왜군은 부산, 동래성을 함락하고 세 갈래로 진격하였으며, 채 한 달도 못되어 조선은 한양을 점령당하였고, 함경도 지역까지 짓밟히는 등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선조는 4월 29일에 한성을 떠나 개성을 거쳐 6월 11일에 평양에 머물렀다가 다시 6월 24일 의주로 피란하였으며,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한편 육상과는 달리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해상을 장악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도 왜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특히 명의 지원과 관군의 재정비로 더욱 수세에 몰린 왜군은 급기야 휴전을 제의했고, 잠시 진행되었으나 왜군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이후 1597년 강화회담 결렬을 핑계삼아 왜군은 재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공격은 일부 지역에서 저지되었고,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곧 물러갔다. 7년에 걸친 왜란은 조선, 명, 왜 3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

왼쪽부터 재실, 외삼문, 가장 오른쪽에 기념관이 보이는 북천전적지 제향 영역의 모습. 사진에서, 사당과 내삼문은 외삼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세워져 있는 다섯 개의 비석은 이곳에서 순절한 분들을 기려 건립된 것들이다.
 왼쪽부터 재실, 외삼문, 가장 오른쪽에 기념관이 보이는 북천전적지 제향 영역의 모습. 사진에서, 사당과 내삼문은 외삼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세워져 있는 다섯 개의 비석은 이곳에서 순절한 분들을 기려 건립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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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일본을 '왜'로 표현하고 있다. 왜는 일본을 낮춰서 말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감정적 표현일 뿐 1592년 당시 그 적국의 나라 이름은 아니다. 일본은 그때 '일본국'이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10년(670) 조에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倭國更號日本), 해돋는 곳과 가까이 있다(近日所出)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효소왕 6년(697)에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日本國使至)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라는 기록이 있고, 성덕왕 2년(703) 조에는 '일본국 사신이 왔다(日本國使至).'라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덕왕 21년(722) 조에는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막았다(以遮日本賊路).'라고 적었다. 성덕왕 30년(731) 조에도 '일본국 병선 3백 척이(日本國兵船三百艘) 바다를 건너와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越海襲我東邊) 왕이 장병을 출동시켜 대파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무왕 10년 이후부터는 '왜'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왜의 침입은 신라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혁거세왕 8년에 이미 '왜인은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倭人行兵欲犯邊) 돌아갔다.' 그 이후 일본은 줄곧 '왜'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문무왕 이후부터는 '일본'으로 적고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체 개관'의 마지막 문장은 '7년에 걸친 왜란은 조선, 명, 왜 3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가 아니라 '7년에 걸친 왜란은 조선, 명, 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로 적어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진'왜'란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임진왜란'보다는 '7년전쟁' 또는 '조일전쟁'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있어도 임진'일본'란이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북천전적지의 사당 외삼문에서 내려다 본 북천과 상주 시가지 방면의 풍경.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정자 침천정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북천전적지의 사당 외삼문에서 내려다 본 북천과 상주 시가지 방면의 풍경.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정자 침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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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기념관은 답사자가 임진왜란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임진왜란 연표'도 작성하여 게시해 두었다. 연표는 대체로 주요 전투를 시기 순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전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기념관은 또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주요 무기를 설명해주는 '임진왜란 무기'도 게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무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궁시(弓矢, 활), 창, 도검(刀劍, 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화차(火車), 총통(銃筒), 신기전(神機箭) 등이 있었다.'로 시작된다.

임진왜란 전체를 살펴본 후 북천전투를 해설해주는 기념관

'임진왜란 전체 개관', '임진왜란 연표', 그리고 '임진왜란 무기'로 임진왜란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준 기념관은 이제 북천 전적지 자체에 대한 해설을 시작한다. '상주와 북천 전적지 개관', '북천 전적지 연혁', '상주 전투', '전투 참여 인물', '관련 유적 및 유물'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상주 전투' 게시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북천전투를 기려 세워진 기념비로, 사당과 침천정 사시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왼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지붕은 기념관의 것으로, 기념관은 사당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다.
 북천전투를 기려 세워진 기념비로, 사당과 침천정 사시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왼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지붕은 기념관의 것으로, 기념관은 사당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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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들의 침략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4월 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고, 성응길, 조경을 각각 좌우방어사로 삼아 영남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이일이 군사를 모아 명령을 받은 지 3일만에 출정하였고, 경상감사 김수도 열읍(列邑,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수령들로 하여금 각자 소속 군사를 이끌고 정해진 지역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고을 수령들은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대구 냇가에 나가 순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순변사는 오지 않고 왜군의 북상 소문이 들리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비가 내리는데다 군량미마저 끊기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4월 23일 상주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상주목사 김해가 이미 적을 피해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판관 권길만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이일이 판관을 시켜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모기를 수습하게 하여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조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급히 상주 북천에 진을 치고 대오를 편성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장졸들과 함께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일 휘하의 장졸들은 산을 의지하고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여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900여 명이 순국하였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 중앙에 패보(敗報, 패한 소식)를 전한 다음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으나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충렬사(사당) 유허비와 세 분 순절 의사를 기리는 비석들이 북천전적지 정문과 사당 중간 지점에 세워져 있다.
 충렬사(사당) 유허비와 세 분 순절 의사를 기리는 비석들이 북천전적지 정문과 사당 중간 지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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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전투 패배의 최고 책임자는 이일이다. 그런데 기념관의 '전투 참여 인물' 중 이일 부분을 보면 그가 <증보 제승방략>을 저술했다는 대목이 있다. 앞에 '증보'가 붙은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제승방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승방략>은 본래 김종서가 저술한 병서로, 여진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치하기 위해 함경도 8진과 이에 속한 각 보(堡, 작은 성)를 지킬 방법이 논술되어 있다. 이를 이일이 다시 시대에 맞게 정리, 증수한 책이 <증보제승방략>이다.

김종서의 <제승방략>을 증보해서 펴낸 이일

이일이 이런 병서를 저술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장수였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북방 국경에서는 용맹을 떨쳤던 그가, 임진왜란 첫 중앙군 출정 전투인 상주 북천 싸움에 대장으로 참전해서는 끝까지, 또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한 채 도주하여 오명을 남겼다. 그래서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임란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1603년에 정경세가 지은 계정으로, 방 1칸 마루 1칸의 작고 소박한 초가집이다.
 1603년에 정경세가 지은 계정으로, 방 1칸 마루 1칸의 작고 소박한 초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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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일을 변명하는 기록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으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선조실록> 1595년 7월 24일 정경세는 선조에게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이일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며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 왕이 보낸 장수)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 여러 고을)의 군졸들은 소속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고 칭찬한다.

이어 그는 "이에 (상주 군사들이) 평야로 나아가 진 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고 재차 이일의 대담무쌍한 성품을 높여 세운다.

모두들 이일을 비난하는 중에 정경세는 그를 옹호

정경세는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과 박호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로 탈출하여 충주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한 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아뢴다.

정경세의 말은, 부산에서 송상현, 정발, 윤흥신이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변변하게 왜적에 대항한 장수가 없었는데 이일이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대적하여 전투를 펼쳤으니 그만하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는 논지이다. 정경세의 발언에 대해 선조는 어떤 대답을 하였을까? 당일 실록에는 선조의 말이 실려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류성룡이 선조 대신 <징비록>에 한 마디를 남겼다. '한 곳에서도 적들을 막아 기세를 누그러뜨린 자가 없으니 열흘도 지나지 않아 상주에 이르렀다. 이일은 (중략) 수하에 군대가 없었는데 갑가지 싸우게 되니 당연히 적과 맞설 수 없었다.'

이일을 기리는 공간이나 유적은 없는 북천전적지

북천전적지 경내에서 이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게시물의 일부를 이일에 대한 해설로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이일과 관련되는 비석이나 추모 시설은 전혀 없다. 그가 순절하지도 않았고, 적과 싸워 공을 이룬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북천에서 다들 죽어갈 때 그는 대장이면서도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정경세와 류성룡이 비록 옹호하고 있지만,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그는 후세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뭔가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경세의 말에 대한 선조의 반응이 전해지지 않듯, 이일의 넋두리 역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많은 선조들이 죽어갔지만 지금은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북천전적지, 그저 바람소리와 저물어가는 햇살 뿐이다.

(상주 북천전투에 대해서는 '명장 이일은 왜 일본군 피해 달아 났을까''임란 때 불타고, 식민지 때 철거 위기 맞은 두 건물' 기사 참조.)


태그:#이일, #북천전투, #징비록, #임진왜란, #정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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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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