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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전적지 정문 오른쪽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임란 북천 전적지 안내도'. 사진 왼쪽 가장 먼 곳에 있는 (1)이 사당이다. 사진 앞부분 가로로 거대하게 놓인 건물이 객사인 상산관이다. 오른쪽의 빨간 점은 '현 위치', 즉 이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이다.
 북천전적지 정문 오른쪽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임란 북천 전적지 안내도'. 사진 왼쪽 가장 먼 곳에 있는 (1)이 사당이다. 사진 앞부분 가로로 거대하게 놓인 건물이 객사인 상산관이다. 오른쪽의 빨간 점은 '현 위치', 즉 이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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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 북천전적지 주차장에 닿으면 가장 먼저 정문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임란 북천 전적지 안내도'부터 보게 된다. 정문에서 가장 먼 사당이 ①번,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②번, 내삼문 입구의 전시관이 ③번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안내도의 전시관은 현장에 가보면 '임란기념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안내도의 번호가 답사 순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순서를 따라 움직이면 동선이 상당히 오락가락하여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⑨상산관,  ⑧침천정, ⑦전적비, ⑥외삼문, ③전시관, ②내삼문, ①사당, ④비각, ⑤재실, ⑩순국비, ⑪태평루…… 순서로 새로운 답사 차례를 정한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정문 오른쪽 안내판의 북천전적지 해설문부터 읽는 것이야 당연하다.

북천전적지의 정문에 걸린 현판 '壬亂北川戰跡地(임란 북천 전적지)'
 북천전적지의 정문에 걸린 현판 '壬亂北川戰跡地(임란 북천 전적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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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임란북천전적지(尙州壬亂北川戰跡地)
경상북도 기념물 제 77호

이곳 북천변(北川邊) 자산(子山) 기슭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군에 대항하여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격전한 전적지이다.

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 지방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서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과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수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하였으나 임란 사상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라는 큰 뜻을 지니고 있다.

1990년부터 사당, 전시관, 사적비 등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박걸 단소(壇所)' 및 '권길 사의비(死義碑)'를 이건하여 사적(史蹟)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 장소라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부산 등지에서 벌어졌던 전투들은 모두가 지방 주둔군이 일본군과 싸운 사례였지만 북천에서는 처음으로 한양에서 내려온 중앙군이 전투에 나섰다는 뜻이다.

전주객사와 더불어 조선 시대가 남긴 최대의 객사로 평가받는 상주객사 상산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종전 이후 다시 지었다.
 전주객사와 더불어 조선 시대가 남긴 최대의 객사로 평가받는 상주객사 상산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종전 이후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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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현장을 보러 정문의 '尙州壬亂北川戰跡地(상주임란북천전적지)' 현판 아래를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정문 안 바로 왼쪽의 거대한 객사(客舍)가 눈을 사로잡는다. 상주시 경상대로 3123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객사의 이름은 '상주 상산관(商山館)'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57호인 건물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객사는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로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이다. 이 건물은 1328년(충숙왕 15) 목사 김영후(金永煦)가 중수했다는 <상산지>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객사이다.

1526년(중종 21) 소실된 것을 목사 윤탕(尹宕)이 중건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 재건하고, 1666년(현종 7) 다시 중건하였다. 근대에는 현 상주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에 옮겨와서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망궐례가 가장 낯선 단어이다. 조선 시대 상주목(尙州牧)의 객사 상산관에서는 목사가 부임할 때,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그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배례의식(拜禮儀式, 절을 하는 행사)이 열렸다. 행사는, 궁궐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하례(賀禮, 절)를 하듯이 이곳 전청(殿廳, 상산관 마루)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대궐을 향하여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 절하는 의식으로 치러졌다.

상산관 내, 망궐례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인형들
 상산관 내, 망궐례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인형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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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관 바로앞에는 이 객사가 현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이력을 말해주는 조그마한 안내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이 안내판은, 1940년 경찰서를 짓기 위해 헐리게 된 상산관을 당시 상주군수 김규년이 옮겨지으며 작성한 기문(記文, 역사를 기록한 글)의 일부를 중점 소개한다.

김규년은 '지난 정미년(1907)에 상산관을 수리하여 소학교로 사용한 지 30여 년이 되어 많은 학생이 배출되고 입학하여 사용에 불편함이 있었으나 상주초등학교가 신축되어 옮겨가니, 빈 집은 헐어버리게 되었다.'라고 서두를 꺼낸다.

안내문 속 '상주초등학교'는 오늘날의 답사자를 위한 배려 차원의 표현이다. 중학교 이전의 학교를 초등학교로 부르게 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니 1940년에는 결코 초등학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주국민학교'였을까? 그것도 아니다. 국민학교라는 군국주의적 이름은 1941년부터 쓰였다. 답은 안내문 안에 이미 나온다. 1907년에 '상산 제1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소학교'였다.

침천정 뒤로 전적비가 보이는 풍경
 침천정 뒤로 전적비가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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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붙인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독립 이후에도 살아남아 무려 51년 동안이나 계속 사용되었다. 식민 잔재이므로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했지만 쇠귀에 경읽기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의, 그중 아직도 제국주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일부 일본인들 눈에 비친 한국은 여전히 '국민학교'를 쓰는 국가였다. 자신들이 남긴 유산이 변함없이 살아있는 나라…….

그러나 1940년 당시 상주 지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객사 기능을 잃은 상산관은 1907년 이래 소학교로 활용되었는데, 학교 건물이 신축되면서 비어 있던 중 그 자리에 일제가 경찰서를 짓는다며 허물겠다고 나서자 상주 지역민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방 유지들의 성원에 힘입어 거금을 내어 관청에 매수를 신청하고 다시 공유재산으로 기부하겠다며 나(김규년)에게 이건을 부탁하니 비로소 기성회를 설립하고 주민들의 도움으로 수 개월에 거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상산관을 살리자" 상주 주민들 일심동체 되어 막아

요약하면, 침략군과 맞서 싸운 정신을 기념하는 역사공원 북천전적지의 상산관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재건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경찰서 부지로 정해지면서 또 다시 사라질 위기를 맞이했고, 상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를 막아내었다.

나는 상산관 앞에 서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유산을 지키기 위해 애쓴 상주 지역민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상산관 건물 안의 인형들이 한양에 계시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절을 올리고 있듯이 나는 상산관을 바라보며 묵념을 한다. 침략군과 직접 칼을 들고 싸우고, 죽고, 돈과 노동을 바쳐 문화유산을 지켜낸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침천정 마루와 천정의 모습
 침천정 마루와 천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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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객사와 더불어 조선 시대가 남긴 최대 규모의 웅장미를 자랑하는 상산관 옆 정면 3칸짜리 정자 침천정(枕泉亭)에도 일본 침략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이 건물은 1577년(선조 10) 상주목사 정곤수가 읍성 남문 밖에 처음 지었다. 정곤수는 이 정자를 지어 선비들의 강학 장소로 제공하는 등 관정(官亭, 관청의 정자)으로 사용했다.

침천정의 본래 이름은 연정(蓮亭)이었다. 연꽃이 아름다운 연못가에 지어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 예쁘장한  정자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연정은 1612년(광해 4)에 이르러 중건되었다. 그런데 1914년 일제가 상주읍성을 없앨 때 또 다시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상주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건물을 사서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다. 침천정이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침천정 바로 뒤에 세워진 임란북천 전적비

침천정 뒤 높은 곳에 '임란 북천 전적비'가 있다. 1991년에 건립된 이 기념탑 모양의 전적지는 저 아래 북천을 바라보며 서 있다. 북천에서부터 이곳 산비탈 일원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쟁터이다. 전적비가 왜 이 자리에 건립되었는지 저절로 가늠이 된다.

침천정에서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임란북천전적비 앞으로 다가선다. 류시완(柳時浣)이 지은 비문을 읽어본다.    

'영남의 큰 고을 상주 자산성(子山城) 아래 증연(甑淵) 일대의 북천 이곳은 선조 임진(1592년) 4월 25일 순변사 이일 및 그 부하 중앙군 육십여 명과 급히 모집한 향병(鄕兵, 의병), 이졸(吏卒, 하급 관리와 병사) 등 팔백여 명이 침략자 왜군의 선봉 일만칠천여 명으로부터 급습을 받아 분연히 싸워 순국하여 민족정기를 드높인 옛 싸움터이다.

상주 북천은 조선의 중앙군과 왜적이 최초로 접전한 곳이라는 점에서 임진전 사상 주목받고 있다. 당시의 아군은 전사(戰士)의 수효로도, 무기의 신예(新銳)로도 대적이 못되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최후까지 싸워 호국의 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지금도 자산을 철환산(鐵丸山)이라 하는데 비 내리는 으스름 달밤에는 귀대(鬼大)가 흐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충의혼백(忠義魂魄)이 슬프고 분한 원한을 품은 지 사백여 년, 새와 짐승과 솔소리만이 그 넋을 위로하던 곳, 이제 전적지로 지정 정화하여 역사와 충렬과 자위(自衛)의 산 교육의 터전으로 삼는 한편 충렬사를 세워 절개와 의리에 산 지휘관 및 이름조차 밝힐 길 없는 수많은 병졸의 영령을 위안하고 숭고한 호국의 뜻을 길이 빛내며 지난 일을 귀감삼아 내일을 경계하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운다.'

'상주 북천은 조선의 중앙군과 왜적이 최초로 접전한 곳'이라는 대목이 가장 눈길을 끈다. '새와 짐승과 솔소리만이 그 넋을 위로하던' 이곳 전적지에 지금은 사당과 기념관 등이 잘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에 들러 북천전투의 역사를 알아보고, 사당에서 '절개와 의리에 산 지휘관 및 이름조차 밝힐 길 없는 수많은 병졸의 영령을 위안'해야겠다. 임란기념관과 충렬사는 임란북천전적비 바로 뒤 산비탈에 있다. (계속)


태그:#북천전투, #상산관, #침천정, #임진왜란, #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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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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