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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원래 땀도 좀 흘리고 그런 거지 뭐. 안 그래?'

찜통더위란 말에 곧잘 이렇게 응수했다. 내게 있어 여름은 겨울에 비해 쉽게 넘어가는 계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땀도 좀 흘리는…'이란 표현이 쏙 들어갈 만큼 혹독하다.

부엌 들어가기가 두렵다. 그뿐인가 온종일 돌아가는 선풍기로도 부족해서 아이스팩을 부둥켜안고 잠을 청해보지만 역시나 자다 깨기를 반복한다.

# 입추(8월 7일) 1주일 전

봄날 미사리 조정경기장의 시원한 바람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은 김밥과 얼음이 송송 들어간 주스 하나씩을 손에 들고 조정경기장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나무그늘은 두어 명을 제외하고 텅 비었다.

그 낯선 분위기가 의아했지만, 곧 다들 휴가를 간 것이라 여겼다. 적당한 곳을 골라 주차하고 차 문을 여는 순간 훅 들이치는 열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문을 닫고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아~ 이래서 사람이 없었구나!"

그래. 그래. 그러니까 여름은 실내에서 보내야지. 이럴 때 캠핑은 정말 아니다. 갤러리나 영화관이 최고지.

# 입추 1주일 후, 금요일 오후 3시

그날도 아이스팩과 선풍기를 앞세워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씨름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늘어지는 벨 소리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어기적어기적. 느린 영화 속 인물처럼 전화를 받았다. 친정아버지다.

"너 내일 뭐 하냐? 괜찮으면 O서방이랑 다 같이 캠핑이나 가지 뭐."

지금이 한창 휴가철이고 더워서 힘들 것이라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흔들림이 없다.

"캠핑이 별거냐. 가다 좋은데 나오면 자고 오는 게 캠핑이지."

사실 부모님의 캠핑 경험치는 초급이다. 어느 날 캠핑장에서 식사 준비하던 신랑이 내게 색다른 제안을 했다.

"장인 장모님도 부를까?"
"안 오실걸…."
"그래도 해 봐. 같이 드시면 좋잖아."

신랑 성화에 못 이겨 전화하면서도 오실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피서나 놀러 가는 것을 돈 내고 고생하러 가는 무모한 행동 쯤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수박까지 사 오시며 캠핑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셨다.

의외였다. 그 후로도 다섯 번 정도 더 오셨는데 그 몇 번 안 되는 경험이 얼마나 색다르고 강렬했는지 최근에는 작은 카라반까지 장만하셨다. 그러니 성수기라 자리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더위에 캠핑은 힘들다는 것 쯤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째 양평에서 시작해서 강원도와 동해 쪽 캠핑지를 검색했다. 적당한 그늘, 계곡은 있나? 샤워시설은 어떤가를 확인한 후 일일이 전화를 했다(당일 예약은 직접 전화를 해야 한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예약 완료' 만석이다.

"엄마, 휴가철이라 그런지 자리가 없네요. 조금만 더 기다렸다 가요."
"그래. 안 그래도 그럴 거라 말했는데… 너희 아버지가 어디 내 말을 귀담아듣니! 네가 고생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몇 주 후면 성수기도 끝날 것이고 더위도 한풀 꺾이겠지. 그럼 지금보다 저렴하고 여유 있게 갈 수 있다. 내일도 무자비하게 더울 테니 부모님 모시고 영화나 보러 가야겠다.

# 토요일 아침 8시 30분

아버지 전화다.

"어제 니 엄마가 자리 없다고 하던데 그럼 가까운 계곡이나 갈까?"

잠시라도 아버지의 캠핑 열기를 가라앉히려면 계곡이라도 가야 할 것 같다. 시원한 방바닥을 찾아 굼벵이처럼 옮겨 다니고 있는 신랑과 아이를 준비시키고 간단한 먹거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저희는 준비 다 되었는데 혹시, 제가 더 챙겨갈 것 있어요?"
"고기랑 채소 정도만 가져가면 안 되겠니?"
"근처 계곡 가는 거 아니예요? 그런 데는 취사금지예요."

아버지는 가서 보고 마음에 들면 기어이 일박하실 요량이다. 이 고집스러울 만큼 강한 열의에 슬슬 짜증이 났다. 구시렁거리며 석쇠와 버너 등을 주섬주섬 챙기자 길게 늘어져 있던 신랑이 한마디 한다.

"이걸 다 가져가게? 이럴 거면 한두 주 있다 차라리 캠핑을 가시지…. 장인어른도 참."

차에 짐을 싣는 신랑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땀이 나를 더 미안하게 만든다.

채소, 과일, 고기까지 장만해서 도착한 곳은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남한산성. 가뭄으로 계곡 물은 힘들게 흐르고 구불구불 늘어선 그늘막과 돗자리가 물길을 대신한다. 점심시간 다 되어 도착했으니 저 많은 인파 속에 엉덩이 디밀 곳이라도 있을까?

그래도 운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는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늘막과 의자, 아이스박스를 옮긴 후 한숨 돌리는데 아버지가 뒤늦게 다가오신다.

"아버님, 점심시간인데 뭐라도 드셔야죠?"
"난 조기 위에서 열무국수 먹었네."
"아빠!! 뭐예요?"
"장인어른 같이 드셔야죠."
"맛있나 없나 먼저 먹어봤는데 맛없더라."

이런 황당한 상황이 있을까?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짐 나르는 동안 혼자 열무국수를 드신 걸까?

어쩔 수 없이 수박 윗부분만 잘라서 수저 하나씩 들고 속을 파먹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모양새가 다리 밑 난민이 따로 없다. 원래 에너지 넘치시는 아버지는 그동안 이곳저곳 둘러보시더니 집으로 가자 하신다. 별로 볼 것도 없고 시원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구동성으로 아버지의 돌발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 O 서방 나랑 C동 좀 다녀오세."
"거긴 왜요? 지금 차 빼면 주차 못해요. 아빠."
"주차를 왜 못해? 그럼 직접 농사 지은 블루베리 준다는데 우리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냐?"
"글쎄 주차 때문에 안된다니까요."

모두가 말리자 C동 가는 것 역시 포기하셨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장식용 에어컨 대신 시원한 그늘과 계곡 물을 찾아 왔건만 아버지의 돌발행동에 내게는 진땀 빼는 하루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지루하고 무료한 하루였는지 잠깐 앉아 계시다 다시 사라지곤 하셨다.

# 월요일 아침

신랑 출근 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느이 아부지 이제 캠핑 안 가신다더라. 그날 너무 힘드셨데."

35도를 오르내리는 여름 나기는 80 넘은 아버지에게도 조금 젊은 내게도 힘들다. 줄줄 흐르는 땀에 살짝만 건드려도 짜증이 툭툭 배어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화낼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힘든 여름, 아버지에게 더위만큼 힘들었던 것은 날 선 '안돼요!'란 말이 아니었을까? 자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만 읽어드리고 말벗을 해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앞으로 올해보다 더 심한 열대야가 찾아오겠지? 벽에 붙어 있는 에어컨을 보고 있자니 '자린고비'의 굴비가 생각나 입맛만 쩝 소리 나게 다셔본다. 그나저나 우리 아부지는 정말 다시는 캠핑 안 가실까?



태그:#여름,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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