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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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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가 29일 첫 회를 방송했다. 제목부터 복잡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고려 제4대 주상인 광종이다. 그는 태조 왕건의 셋째아들이며 이름은 왕소다. 

광종은 조선 태종 이방원을 어느 정도 닮은 왕이다. 그는 둘째형인 왕요와 합세해 첫째형이자 이복형인 제2대 임금 혜종의 권력을 빼앗을 목적으로 혜종을 끊임없이 압박했다. 이러던 도중에 혜종은 서른네 살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혜종은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인 세자 이방석을 닮은 인물이다. 이방석과 달리 장남이었다는 점, 세자에 머물지 않고 임금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은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권세가 약해서 이복형제들의 압박을 받다가 죽은 점은 이방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혜종을 상대로 광종은 왕요와 힘을 합쳐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그 와중에 혜종이 숨을 거두자 왕소는 친형인 왕요를 왕위에 앉히는 데 기여했다. 이 왕요가 제3대 주상인 정종이다. 정종은 한자로 定宗이다. 조선의 이방원은 이방석을 죽인 뒤 친형이자 둘째형인 이방과를 왕으로 앉혔다. 이방과 역시 定宗이다. 

이방원은 정종을 왕위에 앉힌 뒤 2년 만에 정종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권을 차지했다. 이방원은 형의 양보를 받는 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소는 이방원처럼 형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종 왕요가 죽기 전에 그의 양보를 받는 식으로 왕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는 이방원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광종은 이방원과 똑같지는 않지만, 이래저래 많이 닮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재벌에 비견될 만했던, 대규모 호족

잔혹한 이방원을 닮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광종은 경제민주화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한 군주였다. 요즘 말로 하면, 재벌 개혁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군주였다. 

고려시대의 거부들은 농토를 대량으로 소유했다. 거부들은 그 땅을 노비 가정들에게 소작으로 나눠준 뒤 그들을 하청업체처럼 관리하면서 이익을 취득했다. 이 점에서 고려시대 거부들은 농업 기업의 대주주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거부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이들을 역사학에서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호족들 중에는 수천 명의 소작농 노비를 거느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음력으로 조선 태조 1년 8월 20일자(양력 1392년 9월 7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소작농 노비를 포함해서 1천 명 이상의 노비를 보유한 호족들이 적지 않았다. 

소작농 노비 집안은 흔히 4~5명 정도의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이 하나의 하청업체가 되어 소작지를 경작했다. 1천 명 이상의 노비를 보유한 호족 가문 밑에는 200~250개 정도의 소작농 하청업체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규모 호족은 오늘날의 재벌에 비견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고려시대 호족이 대한민국 재벌과 유사했다는 점은, 단순히 노비와 재산이 많았다는 사실 외에 다른 데서도 더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재벌과 함께 등장한 국가다. 고려 역시 그런 나라였다. 호족과 함께 등장한 나라였다. 이런 점에서도 호족은 재벌과 비슷했다.

1945년 해방 뒤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적산 기업체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을 민간에 불하하는 과정에서 재계 안에 지지기반을 구축했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업들을 싼값에 분배하는 방법으로 자기 세력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례로,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 시기에 미쓰코시 백화점은 이병철(삼성)에게, 조선이연금속은 정주영(현대)에게, 선경직물은 최종건(SK)에게, 조선제련은 구인회(LG)에게, 소화기린맥주는 박두병(두산)에게 넘어갔다. 이런 사례는 한둘 아니다. 이렇게 지금의 주요 재벌들은 해방 뒤부터 정치권력의 비호 하에 기반을 잡았다. 대한민국의 등장과 함께 재벌이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태생부터 '친재벌적'인 나라였던 고려 왕조

고려 왕조 역시 그랬다. 태조 왕건은 순전히 자기 힘으로 건국과 통일을 이룩한 게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은 평안도 정주의 유씨, 충청도 충주의 유씨, 경상도 경주의 김씨 및 의성의 홍씨, 황해도 평산의 박씨 같은 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왕건의 건국 및 통일 과정에서 호족들도 사회 지배권을 구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렇게 고려 역시 '고려판 재벌' 즉 호족과 함께 성장한 나라다. 왕건 정권을 호족연합체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왕건이 스물아홉 명의 부인을 둔 것 역시 그런 이유에 기인했다. 자신을 도운 호족들을 일일이 배려하자니 그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 왕조 역시 태생부터 '친재벌적'인 나라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처럼 재벌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이나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벌을 위해 작동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의 연인>의 고려 광종(이준기 분).
 <달의 연인>의 고려 광종(이준기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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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왕들이 이런 풍토에 불만을 품었겠지만, 그런 불만을 겉으로 표출한 용감한 왕이 바로 <달의 연인>의 주인공인 광종이다. 광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풍토에 만족하지 않았다. 재벌 중심, 호족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해야 하는 불합리한 풍토에 그는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깨고자 했다.

광종은 949년 왕이 돼서 975년 세상을 떠났다. 26년간 '청와대'를 지켰던 것이다. 이 26년 동안 그는 '재벌왕조 고려'의 오명을 벗고자, 호족들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호족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이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호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종의 시대는 '경제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종은 상당히 집요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처음 몇 년간은 아무런 속내도 드러내지 않았다. 호족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그들과 좋게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 그는 재벌들이 보기에 '경제를 생각하는 좋은 왕'이었다.

이 점은 '시무 28조'로 유명한 최승로가 광종 사후에 성종 임금에게 제출한 상소문에도 나타난다. 경주 출신 귀족인 최승로는 왕실이나 백성보다는 호족의 편에 선 사람이었다.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 실린 상소문에서, 최승로는 집권 초기 몇 년간 광종이 보여준 친재벌 정책을 두고 "즉위한 뒤로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아지고 공평해졌다"고 극찬했다. 집권 초기 여러 해 동안 호족들을 배려해준 결과로 집권 8년차가 됐을 때는 호족들이 만족스러워 하는 상태가 됐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호족들의 만족이 극에 달한 집권 8년차 때부터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장에 호족들의 기반을 흔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는 조치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권 8년차인 956년에 나온 노비안검법과 10년차인 958년에 나온 과거시험 실시가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부당하게 소유한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데 취지가 있었다. 호족들의 농토를 경영하는 노비들을 빼앗은 것은 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호족들의 관직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그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실력 위주의 관료 선발제도를 실시했던 것이다.

광종은 재벌들이 싫어하는 군주였다

이렇게 노비안검법과 과거시험으로 호족들의 기운을 서서히 빼앗던 광종은 집권 12년차가 되는 960년부터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호족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호족들의 역모 사건을 적발하거나 혹은 조작하는 방법으로 공안 정국을 조성한 뒤 그들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던 것이다. 가슴 한구석에 꼭꼭 숨겨두었던 본심을 집권 12년차 때부터 드러냈던 것이다.

광종이 반(反)재벌로 돌아서자 그를 좋게 평가했던 최승로의 마음에도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점은 위의 상소문에서도 나타난다. 960년부터 최승로가 광종을 안 좋게 보았다는 사실이 상소문에 반영된 것이다.

최승로는 "(광종께서) 말년에는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라면서 960년 이후의 16년간은 사람 살 세상이 못 되었다고 혹평했다. 최승로가 이 정도로 싫어했다면, 호족들이 광종을 얼마나 증오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광종은 재벌들이 싫어하는 군주였다. 

최승로의 혹평을 뒤집어보면 잘 느낄 수 있듯이, 광종은 재벌이 서민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실까지 압박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대부분의 왕은 이런 일을 시작했다가 제대로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지만, 그는 무려 16년간이나 재벌을 압박하면서 그 시대 나름의 경제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광종이 죽은 뒤에 그 개혁이 상당부분 물거품이 되기는 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사후에도 개혁이 제대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지도자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인물이다. <달의 연인>의 주인공인 광종은 그렇게 용감한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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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