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포스터

영화 <터널> 포스터. <터널>은 인권의 관점에서 읽어도 괜찮은 영화이다. ⓒ (주)쇼박스


김성훈 감독의 <터널>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 의식 없이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드나드는 수많은 터널들이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심장을 서늘하게 한다. 그래서 굳이 이 영화를 (200년만의 더위라던 1994년 이후 최고라고 하는) 이 무더운 여름에 개봉을 했나 보다.

자동차 딜러로 열심히 일하며 단란한 가정을 이끌던 이정수씨는 18번 국도에 있는 하도터널을 지나다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가던 길에 느닷없는 재앙이 닥친 것이다.

"저 구할 수 있는 거죠?"
"그럼요, 금세 구하게 될 겁니다."

누구나 초기엔 이렇게 생각한다. 별 일 아니라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갇힌 이가 '바깥' 사람들에게 "걱정 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다. 많은 경우, 그렇게 좋게 끝난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산사태로 터널이 무너지는 순간, 2014년 4월의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아, 제2의 세월호 참사가 이런 식으로 또 터지는구나'하는 이런 느낌 말이다.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재난과 인권'이란 맥락 속에 생각할 때, 내게는 크게 세 가지 포인트가 떠오른다.

[하나] 생명권: 기레기와 타락한 관료는 '공공의 적'

첫째는, 생명권이다. 살 권리. 살아 있을 권리. 살아남을 권리. 잘 살아갈 권리. 행복하게 살 권리.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다 마찬가지다. 흙도 공기도 돌도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이 살 권리가 생명권이다. 생명권의 관점에서 보면, 쓰레기 같은 기자들(기레기)이나 무능하고 타락한 관료들은 '공공의 적'이다. 이들은 생명체의 관점보다는 허접한 인기나 이미지 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살아 있되, 내면이 죽은, '좀비들'에 불과하다. 평범한 아빠 정수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 아내 세현은 남편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레기들은 붕괴 현장에 중계차를 대놓고 무작정 "(정수와의) 전화 통화를 생중계 하겠다"고 우긴다. 배터리를 최대한 아껴 써야 하는 마당에, 쓸데없이 전화를 걸어 "고립된 심경이 어떠하냐? 기분이 어떠신가?"라 묻는다. 생명권보다는 취재권을 앞세운 결과다.

언론에 추측성 기사들이 넘치고 특종을 잡기 위한 취재 경쟁만 무성하다. 관료들은 대국민 이미지만을 중시하기에 뭔가 하는 척만 한다. 장관 등 고위층이 행차하면 구조 실무자들의 손발도 묶여 구조가 지연된다.

"대통령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다."

물론이겠지. 그러나 문제는, '평소에' 책임성 있게 일을 잘 하는 것이다.

평소엔 허술하게 해놓고 막상 사고가 나면 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생쇼'를 한다. 어느 광고처럼, "쇼를 하라, 쇼!" 정치가나 관료들은 생명권보다 통치권을 앞세우기에 쇼를 한다. 이미지 정치를 하는 것이다. 전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 (늦게) 팽목항에 가서 세월호 가족을 만나 가슴 아파 하는 것도 차기 대선 준비용 이미지 정치가 아닌가. 이들은 위험에 처한 생명을 코앞에 두고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영화 <터널> 중 한 장면.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귀가하던 중 터널이 무너져 차 안에 갇힌다.

영화 <터널> 중 한 장면.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귀가하던 중 터널이 무너져 차 안에 갇힌다. ⓒ (주)쇼박스


[둘] 공생권: 정수와 미나, 그리고 탱이

둘째, 공생권이다. 터널에 갇힌 정수는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연약한 목소리 하나를 새로 듣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렵사리 입사 시험에 갓 합격한 젊은 여성, 미나다. 미나가 엄마 차를 빌려 몰고 터널을 지나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채 운전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 옆에는 반려동물 탱이도 있다.

정수 입장에서는 물 한 방울도 소중한데, 미나도 탱이도 물을 요구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마실 물도 없는데 남 줄 게 있냐?'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정수는 속으로 약간 거리낌이 있지만 그래도 흔쾌히 힘겨운 통로를 넘나들며 물을 갖다 준다. 주유소 알바 노인의 실수로 인해 얻게 된 생수 두 병과 딸아이를 위한 생일 케이크는 절박한 상황에서 희망의 샘물이었다. 이것을 정수가 나누어주니, 일종의 '재난 공동체'가 형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정수가 미나나 탱이에게 도움을 일방적으로 준 것 같지만, 실은 정수 또한, 미나나 탱이 덕분에 살아갈 용기, 살아남아야 한다는 희망을 더 크게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완전히 혼자 고립된 느낌이 든다면 쉽게 절망에 빠지고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바로 이것이 공생권이다. 함께 살아남을 권리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또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빅토르 프랭클도 비슷하게 말했다. 원래 빅터 프랭클은 의사였는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데, 이런 말을 한다. 자기처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엔, 수용소에서 주던 작은 빵 한 개를 다 먹어도 배가 고플 그 시점에, 또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절박하고 불안한 그 시점에조차 빵 한 쪼가리라도 옆 사람하고 나눠 먹으면서 우애와 인정을 나누었던 사람, 아니면 자신처럼 꼭 살아남아 이 사악한 역사적 범죄 행위를 낱낱이 고발하겠다는 명확한 나름의 삶의 의미를 가졌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정수 또한 그 캄캄한 터널 안에 갇힌 채 또 다른 생존자 미나와 탱이를 만났을 때 운명 공동체라는 느낌을 받았을 터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나는 콘크리트 더미에 짓눌려 먼저 죽고 만다. 하지만 얼핏 보아 귀찮기만 할 것 같았던 탱이도 나중에 터널이 추가로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정수를 요리조리 이끌어나간다. 탱이가 정수를 더 오래 살아남게 도운 셈이다. 이렇게 '재난 공동체'는 동일한 재난을 당해 '마지막' 삶의 순간을 목전에 둔 이들이 (그 모든 '하찮은' 것들을 제쳐두고) 최우선적으로 존재의 근원에 집중케 한다. 즉, 같이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와 위로를 하는, '상호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더불어 살아갈 권리, 공생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인권 개념일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이 (사회적인) 공생권이 충분히 실현될 때 오히려 (개별적인) 생명권도 제대로 보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터널>이 비추는 재난 현장, 그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대비시킬 수밖에 없다.

<터널>이 비추는 재난 현장, 그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대비시킬 수밖에 없다. ⓒ 쇼박스


[셋] 시스템: 터널과 세월호, 그리고 골든타임

셋째, 시스템이다. 앞의 두 포인트(생명권과 공생권)가 재난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면, 바로 그 재난을 초래한 시스템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영화에서는 터널이 붕괴한 참사가 핵심인데, 이 참사는 예고된 것이었다. 부실공사였던 것이다. 평소에 일반인들은 모른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시스템 자체가 부실하기 때문에 부실공사가 나온다.

일례로, 영화에서는 터널의 설계도와 실제 터널의 상태가 다르다. 시공사와 감리사가 문제다. 대표적으로, 환풍기가 모두 7개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는 6개밖에 없다. 정수가 갇힌 위치는 3번 환풍기 부근이다. 그래서 오랜 시일이 걸려 시추작업을 해서 구조를 하려고 했으나 정수가 갇힌 위치가 아니었다. 앞이 캄캄해진다. 원래는 2주일만 버티면 구조가 가능할 거라 했지만, 3주일이 지나고 이제 또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터널 설계도와 다르게 공사가 진행된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막상 사고가 터지면 진실이 드러난다. 불법 증개축으로 인한 전복 위험에도 불구하고 안전검사 통과 및 운항 허가가 계속 났던 세월호의 경우가 그랬던 것과 같다.

그러나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은 이미 '골든타임'은 다 지난 뒤다. 다행히도 영화 <터널>에선 정수씨와 탱이가 끝까지 용케 잘 버텨 주었다. 영화니까. 또, 주인공이니까.

그리고 또 다른 부분도 있다. 그것은 인근에서 제2터널 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번 터널 붕괴 사고로 인해 발파 작업이 지연되고 있던 사정과 연관된다. 자본을 대변하는 자가 말한다. "지금 공사 지연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인데, 죽었는지 산지도 모르는 한 사람 때문에 더 이상 지연을 하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바로 이때 구조대장 대경씨가 말한다.

"지금, 저 안에는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 있어요, 사람."

그렇다. 한 사람이 곧 우주다. 사람이 곧 한울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자본과 권력은 사람보다 돈벌이를 우선한다. 발파 공사는 강행되고 터널은 더 많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영화니까 주인공은 살아남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실제는? (사족 같지만, 착하고 의리 있는 정수가 'K자동차 딜러'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밝히면서 간접적으로 K자동차 광고를 하는 것 역시 이 영화가 자본의 품 안에서 놀고 있음을 보인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 문명의 문제다.

오늘날 인간 문명은 편리와 속도를 추구하느라, 또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추구하느라, 본연의 정신, 인간성을 상실했다. 전국 곳곳을 파헤쳐 공장 부지, 산업 단지, 아파트 단지, 오피스텔, 자동차 도로, 직선화 공사, 터널 공사, 교량 공사, 고속철도 사업, 4대강 사업 등을 강행해왔다. 정말 모든 게 편리해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온갖 물품도 넘쳐나고 모든 게 풍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림이 다르다. '풍요 속의 빈곤'도 많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누리는 자는 더 많이 누리고, 누리고 싶은 자라도 돈이 없으면 절대 누리지 못하는 게 너무도 많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편리와 속도를 좇는 사이, 잃어버리거나 놓치는 게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더 이상 생존자 구조를 포기하고 제2터널 공사를 속행하자고 강변하는 자들에게 정우의 아내 세현이 말한다. "만약, 제 남편이 살아 있으면 미안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렇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이것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생명에 대한 예의 내지 책임감이다.

 영화 <터널> 중 한 장면. 작은 손전등과 스마트폰에 의지한 정수는 과연 붕괴된 터널에서 탈출할까. 혹은 그저 희망고문에 그칠까.

ⓒ (주)쇼박스


결국, 사람들이 자본 합리성(경쟁력과 효율성, 수익성)을 추구하는 사이에 본연의 인간미를 잃어버린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 인권 감수성을 상실한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이 원리는 돈과 권력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에 근원적인 인간미를 잃고 만다는 것을 이미 영화 <내부자들>이나 임상수 감독의 <하녀>도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망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당착인가?
  
요컨대, 우리는 생명권, 공생권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고, 파괴적인 시스템 자체를 대수술해야 한다. 우리는 인권 감수성을 회복하면서도 그 위에 건강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잘 살고 모두가 잘 사는 길이다. 갈 길은 멀지만, 더우나 추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여럿이 함께 가면, 서로 힘이 되면서 같이 걸으면, 진짜 행복하지 않던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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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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