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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이 고장 이름이 정해진 지 60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양양군은 그동안 '현산문화제'란 명칭으로 매년 단오 직후에 개최하던 양양군의 축제를 올해만 날짜를 바꿔 오는 9월 1일부터 9월 3일까지 개최한다. 또한 37회까지 현산문화제로 치렀던 축제를 올해부터는 '양양문화제'로 바꿨다.

정명 600년, 물론 그 이전엔 양주도호부가 있었고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던 유적이 있는 고장이니 이는 '양양군(襄陽郡)'으로 양주군에서 고장의 이름이 바뀐 뒤부터의 기간이다. 그 오랜 세월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간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저마다 어떤 삶들을 살다 갔을까? 불과 반세기 조금 넘게 살아온 입장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는데….

한계령으로 불리는 오색령은 1970년대 지금의 44번 국도가 개통되긴 전까지는 오색령으로 불렸다.
▲ 오색령 한계령으로 불리는 오색령은 1970년대 지금의 44번 국도가 개통되긴 전까지는 오색령으로 불렸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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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양양읍내에 얼마간 살 때 마당가엔 주물로 만든 '펌프'라는 시설이 우물을 대신했다. 펌프 옆엔 항상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이 있었다. 이 물은 먼지가 앉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얼마간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오래지 않아 묽고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진다.

쓰임을 다한 물은 그대로 흘려보내 땅을 적시고 다시 맑은 물로 돌아가 개여울로 합류한다. 제 쓰임을 다했으니 귀하게 여겨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스스로 마중물의 역할을 해 새로운 물을 끌어올린 것으로 만족한다.

펌프를 다 사용하면 다시 마지막엔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받아 펌프 옆에 두어 새로운 마중물의 역할을 맡긴다.

이 마중물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기 위해 썼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꺼이 마중물의 역할을 해 주셨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저작권이 일부라도 돌아오기까지 드림위즈의 부사장으로 계시던 박순백 박사님께서 그런 역할을 해주셨다. 아직 제대로 "고맙습니다"란 인사도 못 챙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힘이 되어 주셨음을 잘 안다.

한계령 정상에 세워진 오색령 표지석
▲ 오색령 표지석 한계령 정상에 세워진 오색령 표지석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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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를 비롯해 참으로 많은 이들이 한계령을 불렀다. 그런 노래들을 대부분 들어 본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이들이 불러준 한계령은 의미가 또 다르다.

이 노래를 지난 2014년 10월 3일 오색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박강수씨가 불렀다. 산악영화제에 초대가수로 온 박강수씨는 직접 낸 음반도 6장이나 된다. 그런 그가 한계령을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두 곡의 노래가 끝날 때 찾아 온 이와 함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도로로 나와 있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로 한계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강수란 가수는 올림픽공원에서 박순백 박사님의 소개로 2001년 처음 만났고, 그 다음해에도 같은 시기에 만났다. 그러나 이번엔 장소가 바뀌어 오색에서 개최되는 산악영화제에 초대되었기에 한계령을 불렀으리라.

그의 노래가 끝나고 스피커를 통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박강수씨의 무대도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스피커를 통해 들린 사회자의 말은 예상을 빗겨났다.

"이곳에 지금 박강수 씨가 부른 한계령의 원작자가 계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계시면 잠시 무대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200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무대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날 박강수씨의 무대가 끝나고 함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시절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놓고 흐뭇한 표정을 짓던 이들처럼, 가난한 이들이 높게 쌓아올린 장작가리와 같은 따뜻함에 대한 충만한 동질성이 있다.

따뜻한 온기를 더 많이 느끼기 위해 톱날을 나무를 자르기 좋게 손질하고 도끼를 잘 들도록 벼린다. 노래를 부르는 이가 더 많은 감동을 듣는 이에게 안기고자 함도 자신에게 돌아올 성원이 그에 비례함을 알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며,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도 더 오래 고향이 지닌 푸근함을 가슴에 간직하고자 함이다.

숲에 빛이 고루 비추어지게 만들려고 나무를 솎아내는 나무꾼은 없었다. 가족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눠야하기 때문에 나무를 베고, 돈이 되기에 나무를 잘라 낼 뿐 숲을 위한 행동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목적에 충실하다. 숲을 가꾸는 이가 땔감을 위해 나무를 자르는 이들을 보면 속이 바짝 탈 노릇이겠으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엔 구역을 정해주고, 땔감으로 자를 수 있는 나무의 크기와 조건 등을 지정하는 방법 외엔 도리가 없었다. 노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에서 만들어지고 불린다. 숲을 가꾸기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고 부르라면 열정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오색천의 지류엔 이와 같은 폭포가 곳곳에 자리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 박달폭포 오색천의 지류엔 이와 같은 폭포가 곳곳에 자리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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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일도 시간이 흐른 뒤 이야기를 하면 많이 완화되고 희석되어 있다.

한계령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가장 아팠던 때로부터 40년이란 시간이 이미 흘렀다. 지금 당시를 회상하라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당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느꼈던 당혹감도 이젠 무뎌졌다. 이젠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로 돌려진다.

7360X4912픽셀의 풀프레임 사진 26장을 촬영하여 상하 각 13장씩 두 줄로 연결작업을 하여 완성한 약 13000X55000 크기의 양양군 파노라마 사진.
▲ 양양군 파노라마 7360X4912픽셀의 풀프레임 사진 26장을 촬영하여 상하 각 13장씩 두 줄로 연결작업을 하여 완성한 약 13000X55000 크기의 양양군 파노라마 사진.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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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계령 외에도 '미움을 내려놓고 그리움 하나'란 제목으로 '다시 오색령에서' 연작시 중 한 편을 '4월과 5월'의 백순진 선생께서 곡을 쓰셨던 일이 있다. 그리고 지난해 봄, 울산에서 활동하는 유정탁 시인이 '다시, 한계령에서' 연작시의 한 편을 노래로 만들었다.

다시, 한계령에서
-찔레꽃 피면 고향길 나설까

멀어~
가지 못 하는 것 아닌데
그리워
사무치는 것도 아닌데
여기 쓸쓸한 향수의 노래
어느 먼 동네 떠돌다
구석진 마음, 한켠에 고인 양
계절의 변화를 잊고 늘 한목소리로 부르는가
세월, 이만큼 흘렀구나
가끔 자각하는데…

원소 기호로서의 물이 아닌 자연 그대로
내 마음을 타고 흐르는
혈류 같은 물줄기 있어
인생이란…
항상 새롭건만 마음은
찔레꽃 흐드러진 고향 그리워
물결 재잘거리는 소리 환청으로 듣는구나

흘러 돌기엔 순수한 생명
고여 썩어지는 물보단
흘러 고달파도 연원한 순수가 그리워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인데
귀류(歸流) 보이지 않아 슬퍼.

찔레꽃 피면
찔레꽃 피면 돌아갈까
아,
돌아갈 수 있을까
새암에서 내(川)로
내에서 강으로 바다로 떠났던 물이
흘러 돌아 기어코 새암으로 돌아오듯 그렇게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찔레꽃 피면은…

이 노래가 완성된 뒤 울산광역시 성남동 새즈문해거리에 있는 문화카페 '애령'에서 시와 노래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고, 양양으로 돌아와 그동안 촬영했던 사진들로 동영상을 만들었다.

한 고장을 이끌어가는 힘 중에 가장 오래 기억되고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문화적으로 외연을 키우는 것이다. 문화는 문학 하나로 되어질 수도 있으나, 노래와 미술을 비롯해 소중히 보존되고 전승되어질 가치를 지닌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다.

600년을 넘어 1천년, 그 이상 장구하게 양양의 고유성을 지키며 번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모습을 그리며 그 영상을 이제 소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양양군, #양양여행, #양양문화제, #오색령, #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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