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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을 받기 시작한 때의 일이다. 나는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받을 교육에 대해 이야기 했고, 우리는 자연스레 가정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인은 나에게 가정 폭력 피해자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던졌다. 이유를 묻자 그는 나에게 '그렇게 폭력이 고통스럽고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면, 왜 피해자들은 도망치지 않았냐'고 질문했다. 나는 그의 질문이 무척이나 불편했지만, 막 교육을 듣기 시작한 입장이라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폭력을 겪은 사람에 대한 이런 식의 의문들, 왜 도망치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았냐는 질문들은 사실 사회적으로 굉장히 만연하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결국 누군가가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거나, 혹은 피해자가 폭력의 요인을 제공했다는 식의 결론에 다다른다. 가령 1964년 미국에서 행하여진 '아내 구타자의 아내'라는 연구는, 피해 여성들의 무력함이나 쌀쌀맞음, 수동성이 남편의 폭력을 불러왔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거기에 폭력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여성들이 지닌 성격 장애라고 진단하고, 도리어 피해 여성들의 성격을 뒤바꾸는 '치료'를 감행하기도 했다.

정신적 외상을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트라우마> 겉표지.
 <트라우마> 겉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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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피해자에 대한 몰이해와 잘못된 진단은 위치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폭력이 발생하는 외부의 공간, 그곳에서의 '상식'으로는 피해자들의 행동을 납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력과 학대를 겪는 공간, 즉 피해자의 위치로 이동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같은 연구를 제대로 수행한 책이 있다. 바로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열린책들 펴냄)다. 이 책은 가정폭력과 전쟁, 아동학대 등 다양한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외상을 분석한다. 단지 증상을 관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상 피해자의 위치에서, 그 사람이 폭력에 이 같이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해리나 억제와 같은 증상이 발생하는 인과를 설명한다. 서두에 언급한 가정폭력 피해자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기본적인 생존에만 몰두해야하는 삶을 살았던 피해자의 임상적 상이 사건 이전에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저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 외상을 이를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피해자의 행동과 증상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형성된다. 책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폭력의 경험은 피해자에게 전(前)언어적인 방식으로 남아있다. 물론 피해자의 경험을 설명하는 단어는 있다. 성폭력, 감금, 구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피해 당시의 고통, 공포, 절망은 어떤 언어로도 그 깊이를 표현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피해자에게 있어 폭력의 경험은 감각이나 심상으로 남아있다. 어떤 사건이 기억이 되고, 과거의 일로 남겨지기 위해서는 언어로 갈무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경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피해의 경험은 말이 아니라 증상으로,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그 경험에 종속된다. 폭력 경험 앞에서 외상 환자는 자신의 경험을 장악할 언어를 잃어버리고, 몸은 그 순간의 감각에 예속되며, 시간은 과거의 순간으로 교란되고 침탈당한다. 한 마디로 폭력의 경험은 피해자의 언어와 몸, 시간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폭력과 이로인한 외상의 경험은 식민의 경험과도 같다. 때문에 외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은 식민에서 벗어나는 과정과도 같다. 나의 언어를 되찾을 것, 나를 종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분석할 것. 그리하여 그 지배에서 빠져나올 것.

정신적 외상 극복하기 위해선 '역량 강화'가 먼저

때문에 정신적 외상을 겪는 사람들이 안정과 회복기를 거치고,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할 자원이 생기면 가장 먼저하는 일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서사를 재구성하고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이 기억으로 전환되었을 때, 피해자는 자신의 경험과 마주하고 그것을 곱씹으며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신체적·정신적 감각을 경감시킬 수 있게된다. 이때에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 증상에서 점차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입으로 사건을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기억이 더 이상 생생하지 않다면, 신체의 다른 부분이나 특정한 행위를 통해 이야기를 지속할 필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해자가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역량 강화가 전제된다. 특히나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고 고립되었던 피해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피해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외상을 겪는 사람의 자아와 세계관, 타인과 신뢰 관계를 맺는 능력은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폭력의 경험과 마주하는 것은 피해자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다. 피해자가 홀로 스스로의 힘을 회복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에, 이 과정에는 조력자가 필수적이다. 치료자,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 등이다. 여기서 이 책이 기성의 정신적 외상을 다룬 책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등장하는데, 책은 또 다른 조력자로 사회 단체나 사회운동가를 지목한다.

이는 단체나 운동가들이 피해자가 겪은 폭력의 전문가라는 이유도 있지만, 저자는 외상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대부분 사회 문제라는 점도 언급한다. 가령 이 책에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가 등장한다. 만약 사회가 이들의 피해를 없었던 것이나 크지 않은 것, 혹은 피해자가 자초한 것이라고 평가하면 외상의 회복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폭력을 벗어난 사람이 진공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폭력을 정당하게 인식시키고 피해자가 제대로 된 지위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회복과정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해 자신이 겪은 폭력을 증언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식으로 회복을 도모하기도 한다.

피해자 한 명이 일어나는 데는 사회 전체가 필요하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을 정신적 외상에 대입한다면 '피해자 한 명이 일어나는 데는 사회 전체가 필요하다'가 될 것이다. 책은 이 지점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회복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정신적 외상은 피해자 개인과 치료자, 피해자의 지인과 사회 전체의 도움과 변화 없이는 회복이 어렵다. 저자는 개인에서부터 사회 전반에까지 다다르는 회복의 지도를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가치다.

이 책은 정신적 외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질문은 남는다. 외상의 원인이 된 폭력의 발생과 회복 사이의 간극이다. 고통받는 한 사람과 함께 하는 데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해자는 소수고 그 사람들은 손쉽게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 나는 아직도 이 간극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열린책들(2012)


태그:#트라우마, #사회운동, #정신적 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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