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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기류가 한반도의 상공을 뒤덮은 올 여름은 유난스레 더웠다. 그 열기를 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사드(THAAD)로 한반도는 열띤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어느덧 논쟁의 중심은 '어떤 지역에 사드를 설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바뀌어갔다. 이건 문제의 본질이 완전히 변질된 셈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드의 설치가 최선인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드란 무엇일까. 사드는 정말 북한의 핵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시스템일까.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는 꼭 군대를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여담으로 들려주신 선생님의 이야기였던 모양인데, 집으로 들어선 아이의 낯빛이 평소와 달리 침울했다.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울상을 짓고 있었다. 침통한 아이의 눈빛에 글썽글썽 눈물이 고였다. 급기야 울먹이며 이런 말을 했다.

"으앙! 나 군대 가기 싫어. 나 싫단 말이야."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주는 내내, 가슴 아팠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라는 오명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 입에서 튀어 나온 '군대'라는 말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반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비무장 지대의 녹슨 철모 위에서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 그림책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겉표지 비무장 지대의 녹슨 철모 위에서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 마루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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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이와 함께 이 그림책을 같이 읽었다.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비무장지대에 있는 생태 숲에 관한 그림책이다. 전쟁의 화마가 세월에 씻겨나간 그곳엔 씨앗이 자라고 동물들이 찾아와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드문 원시림을 이룬 숲 말이다. 그때 무엇보다 휴전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더 크다고 일러주었다.

비무장지대에서는 멧돼지와 까마귀도 함께 살아간다. 까마귀가 멧돼지 털에 사는 벌레를 잡아주었다. 까마귀는 질 좋은 먹이를 구했고, 멧돼지는 건강한 살결을 유지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 사이가 공생 관계로 발전하기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둘의 공생 관계는 비무장지대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배고픈 멧돼지들은 군인을 봐도 달아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눈에 익은 군복의 무늬는 멧돼지에게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겨울철 부족한 먹이를 챙겨주는 군인을 보면 반가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오랜 시간이 흘러 멧돼지도 늦춘 긴장을 아직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건 오직 우리 민족뿐이었다.

시베리아의 추위를 피해 날아든 두루미에게 비무장지대만큼 안전한 피신처도 없었다. 비무장지대의 계곡에서 태어난 알래스카 연어는 알을 낳으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소본능의 자유를 마음껏 행세하는 연어의 자유가 참으로 부러웠다. 1급수 맑은 물에 사는 열목어에게 비무장지대는 천혜의 서식지였다. 알을 낳는 5월이 되면 열목어는 계곡의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왔다.

비무장지대에 사는 동식물들은 전쟁을 잊은 지 오래다.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한 건 오직 사람뿐이다. 멸종위기의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는 비무장지대에서 싹을 틔우지 못한 건 오직 통일뿐이다. 멧돼지는 새끼에게 지뢰를 피할 안전한 길을 알려주는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평화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일까.

그곳에서 발견할 것이 아름다운 금강초롱꽃만은 아니리라. 그곳엔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높은 장벽이 우리의 심장을 짓눌렀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삼팔선의 역사적 진실이란 자명한데, 왜 우리는 가시 박힌 철조망 앞에서 두 발이 묶여 있는 것일까.

요즘 들어 자주 떠오르는 말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경고한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남긴 말이다.

"당신의 이웃이 불행하면, 당신도 불행해진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참혹한 응징이었다. 매년 20억 마르크씩 66년간 연합국 측에 배상하고, 영토의 8분의 1과 철광석 산지를 반환해야 했다. 당시 베르사유 조약에 영국 재무성 대표로 참여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지나친 압박이 불러올 비극적 결말을 우려했다. 이십여 년 후 케인스의 경고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지금 북한은 최악의 경제상황에 봉착해 있다. 지난 3월 2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UN 안보리 제재 2270호는 '70년 UN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제재'라고 정평 나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던 외화벌이용 교관 파견도 불가능해졌다. 물론 최대외화수입원인 석탄, 철광석 등의 수출 역시 금지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북한의 핵 도발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위험한 경고로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경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질 것이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테지만, '케인스의 경고'가 내내 잊히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벌인 햇볕정책 역시 패전국 독일을 바라보는 케인스의 경고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겨울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 북한의 핵 도발을 멈추게 하는 것 역시 강경한 맞대응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허심 터놓고 얘기하는 대화가 아닐까.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두고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드 배치가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최선책인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방어용 무기라 해도, 사드는 엄연히 북한을 향해 겨누고 있는 미사일이다. 24시간 작동되는 레이더망의 감시 속에 놓인다면, 북한이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반색할 리 없다.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은 상황이 아닌가. 역지사지로 우리 영토가 다른 나라의 레이더망에 의해 감시된다면, 우리 정부 역시 반대할 것이 자명하다.

자연은 시간의 수레바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시간은 황폐한 잿더미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도 천연의 원시림으로 돌려놓았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하는 건 사람뿐이다. 오직 남과 북만이 공생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

알을 낳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열목어의 점프력이라도 빌려, 혹은 멧돼지와 까마귀가 이웃사촌지간이 된 비법이라도 전수받아, 삼팔선 철조망을 뛰어넘고 싶다. 군복의 무늬를 헤아린 멧돼지의 시력이라도 빌려 삼팔선의 실체를 바라보고 싶다.

오래된 철조망 그 너머에 있을 '통일'이라는 민족의 큰 사명 앞에서 '사드'는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불황의 늪에 빠진 자본의 시대라도, 통일은 잘 팔리지 않는 구시대의 전리품이 아니다. 사드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을 것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지킬 것이 오래된 철조망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사드로 인해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때는 칠곡의 투쟁으로, 지금은 성주의 투쟁으로, 앞으로는 김천의 투쟁으로 옮겨갈 태세다. 사드 배치 지역을 두고 우왕좌왕 말을 바꾸는 정부의 대응방식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사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바둑판의 돌이 아니다. 한반도는 어떤 세력을 지키기 위한 바둑판도 아니다.

한반도는 이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꿈이 어려 있는 곳이다.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은 사람들, 죽어서라도 북녘 땅을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의 꿈이 녹슬지 않은 곳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군대'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은 부모들이 살고 있는 땅이다. 휴전선 부근의 비무장지대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는 분명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이 되어야 한다. 그런 숲에 '사드'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덧붙이는 글 |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전영재 글/ 박재철 그림/ 마루벌/ 값 12000원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 희망의 땅 비무장지대 1

전영재 지음, 박재철 그림, 마루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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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드 , #통일 ,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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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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