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황석정을 서울 불광동 그의 단골 카페에서 만났다. "저를 왜 만나러 하셨어요?"라며 대뜸 묻는다. <오마이스타> 창간 5주년이라며 주저리주저리 덧붙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특유의 밝고 깊은 에너지를 뿜기 시작했다. ⓒ 이정민


부러웠다. 최근 내한한 영화 <스타트렉> 시리즈의 배우 사이먼 페그가 자연스럽게 세계관과 철학을 설파하는 모습이. 그는 한 예능에 출연해 SF의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던 차에 본인이 가진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언급하며, "인류가 계속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랄 수밖에 없다"며 "우리가 좀 더 관용적인 존재일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라"서 안타깝다고도 했다. 그 배우는, 여유롭고 지적이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 보였다.

그 부러움과 허기가 가시지 않고 있던 8월 23일, 약속된 카페로 한 배우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린 계열의 강렬한 헤어, 정갈한 외양과 당당한 목소리, 조리 있고 거침없는 언변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 그리고, 무대, 정극과 예능을 넘나들며 대중에게 성큼 다가온 배우 황석정. 그는 예상만큼 진지하고 예상보다 훨씬 털털했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사람과 '그 사람'을 기반으로 한 연기에 대한 애정을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배우였다.

어쩌면 그건, 그가 지금껏 걸어온 다채로운 이력을 접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바탕일지 모른다. 국악과 연기에 있어 엘리트 코스를 섭렵한 학창시절(그는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나온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진학했다-기자 주), 무대와 스크린에서 자기 신만큼은 강렬하게 각인시켰던 필모그래피, 그리고 예능과 토크쇼, 드라마를 통해 대중과 더 가까워진 현재까지.

하지만 <오마이스타> 창간 5주년을 맞아 만난 황석정은 그런 화려한 이력이 아닌 그 보다 훨씬 더 넓은 우주를 품은 배우였다. 인류의 다양성을 설파하던 사이먼 페그의 철학이 부럽지 않을 만큼. 최근 황석정은 올해 들어 음악극 <천변살롱>과 뮤지컬 <페스트>에 출연하며 자신에게 새겨진 음악 DNA와 연기에의 열정을 합일시키며 보폭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그래서 부러움은 확신이 됐다. 이 배우,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켜 볼 만하다고. 그와의 진중했던 인터뷰를 주요 키워드로 풀어 봤다.

① 운명적인 뮤지컬, <페스트>

 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뮤지컬 <페스트> 이야기를 하며 황석정은 'X세대 감성'과 서태지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이정민


<페스트>는 작가 알베르 까뮈의 동명 소설에 서태지의 노래를 엮어 만든 창작뮤지컬이다. 황석정은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가 담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컸다.

"지금 헤어도 뮤지컬 때문인데, 마음에 들어요. 회색도 해 봤다가 뺐다가, 디자이너에게 하고 싶은 색 다 넣어 달라고 했죠(웃음).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 끝나고 섭외가 들어왔는데, 운명이다 싶었어요. 대형 뮤지컬은 태어나서 처음인데, 원래 까뮈도, 페스트라는 작품도 그렇고 인류의 미래나 전염병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게다가 저도 X세대예요. 서태지씨의 그 반항·저항 정신을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즐거움이 대단해요.

제 역할은 시를 통제해서 시민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시장이에요. 완전한 악한은 아니고, 좀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죠. 이런 거악을 연기하는 건 처음인데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진실을 은폐하는 시장이고, 입에서는 칼날 같은 말이 나가야 하니…. 연극할 때 살인자 역을 맡은 적이 있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토하고 그랬어요. 악함과 몸이 싸우는 거죠. 연기는 거짓말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연기가 거짓말일 수 없더라고요. 평소 사람은 의로워야 한다, 선해야 한다,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 마음들이 있는데 몸이 싸우는 거죠.

이번 작품이 제게는 큰 도전이고, 동료 배우들에게 누를 안 끼쳤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근데, 공연하면서는 항상 배가 고파! (웃음). 기다리는 시간에 볼이 쏙! 들어가…(일동 웃음)."

② 대중에게 황석정을 소개한, 예능

최근 대중에게 황석정이 많이 알려진 계기가 바로 여러 예능 프로들이다. 감사한 마음도 있지만 평소 황석정은 웃고 즐기는 예능보다는 자신을 공부케 하는 예능에 관심이 컸다. 일단 무언가를 맡으면 푹 빠져서 공부하는 그다. 영화 <강적>(2006) 때 형사 역을 맡았던 그는 조연이지만 서대문 경찰서를 찾아가 한 달 간 형사들과 범인을 쫓아 다녔다. 여성 범죄를 주제로 한 토크쇼에 나갔을 땐 범죄심리학 책을 섭렵하기도 했다. "예능이든 교양이든 공부하게끔 하는 프로가 너무 좋다"며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출연 기준을 전했다.

"사실 여러 사람이 나와서 서로 비교하는 프로는 가슴이 아파 못하겠어요. 남의 말을 뛰어넘고 하는 재능이 없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유쾌하게 잘 웃고,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MBC <나 혼자 산다>에서도 비춰졌지만, 집에 TV가 지금도 없어요. 그래도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할 수 있는 건 유쾌하게 잘 웃으며 하고 싶죠. <나 혼자 산다>로 많이 알려졌지만, 모험도 하고, 도전하고, 제가 공부할 수 있게끔 하는 프로그램도 좋아요. 종교인들과 토론하는 <오마이갓>이란 프로그램은 전 시즌에 다 출연했는데, 책을 하루에 두 권씩 읽고 했어요. 종교 지도자분들이 워낙 '말빨'이 세셔서(웃음).

여성범죄 심리토크쇼인 <빨간핸드백>도 했는데, 범죄 심리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어요. 어떤 경향을 갖고 가리면서 선택하는 건 아닌데, 누구를 비하한다든지 꼬투리를 잡는 건 피곤하고 재능도 없어요. 제가 또 그렇게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최근 기후에 대한 방송 다큐를 촬영 중인데,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사실 쉽진 않고요. 이제는 다큐도 예능화 됐고, 리얼리티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거짓말을 하면 그냥 픽션이 돼버리잖아요."

③ 무대의 감동을 새삼 느끼다, <천변살롱>

 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각종 영화에 짧게 나와서 관객 입장에선 아쉬울 따름인데 본인은 "배우가 무슨 자존심이야~ 역할에 경중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명쾌하게 지론을 펼져갔다. ⓒ 이정민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토대로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인물의 애환을 노래로 푼 게 바로 음악극 <천변살롱>이다. 이 작품에서 황석정은 '만요'(1930년대에 발흥했던 희극적 대중가요)를 통해 모단이라는 소녀를 표현해야 했다.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깊은 내공의 황석정에겐 또 다른 의미로 고통스러웠던 작품에 속한다. "정서와의 괴리 때문에 몸이 또 역할과 싸웠"기 때문.

"1인 음악극이라, 혼자 서른 몇 곡을, 그것도 악곡을 불러야 했지요. 또 역할상 17살처럼 해야 하는데, 정서의 괴리도 있는 거고. 진짜 차 안에서 혼자 욕 하며 준비했어요(웃음). 왜 이렇게 긴장하고 울고 무대에서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하지? 진짜 뭐 같은 인생이다! 싶다가 공연을 하러 서산에 가서 무대에 올랐는데 어른들부터 아이까지 다 너무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아,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끊임없이 도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직업이 끼를 발산하고 매사 즐겁고 그럴 줄 알거든요. 그게 아니거든요. 다른 배우들은 모르겠지만, 전 그렇지 않아요. 매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분이에요. 다만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을 때,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동을 받을 때, 그 힘을 받아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에너지가 순환돼요. 감사한 일이죠."

④ 황석정에겐 절실함 그 자체, 연기

이쯤에서 그가 배우를 택한 계기를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어려웠던 유년 시기를 언급한 바 있다. 북한 인민군 군악대 출신의 아버지와 성악을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독 엄격한 통제와 제한을 겪으며 스스로의 감정을 안에 가두는 내향적인 소녀로 자랐다. 음악 DNA를 물려받아 그 재능이 뛰어났지만 알 수 없는 분노의 감정으로 꽉 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되려 절망하던 때였다.

"제가 연기자를 택한 건 무대에서 날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전 무대에 설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에요. 영혼이 자유롭지도 않아요. 연기를 잘 하려면 자유로워야하고 편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편견이 많고, 독단적이고, 남하고 교류도 잘 안 하고. 또 배우는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게 자유롭게 훈련 돼 있어야 하는데, 저는 좋아한다는 말도 해 본적도 잘 없고, '사랑해요' 말하는 것도 10년이 걸리더라고요. 스스로를 가둔 거죠.

돌아보니, 슬픈 거 화나는 거만 가득 있고. 그래서 편견도 깨 보고, 극단적인 성향도 없애고, 균형이 잡힌 인간이 되어 보고 싶었어요. 사실 음악을 할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제 성향에 가장 잘 맞기도 해요. 혼자 미친 듯이 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나, 나는? 그럼 연극이나 그런 분야에 가서 사람도 많이 만나고 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학교(한예종)를 다시 간 건데, 입학할 때 절 보고 다른 학생들은 연출과나 극작과 소속으로 보더라고요. 왜 내가 연기과일 거란 생각은 안 한 거지?(웃음)." 

⑤ 음악 유전자

 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 역사를 기억하는 것. 황석정이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들이다. ⓒ 이정민


연기를 하기 전 그는 피리 부는 국악 학도였다. 학창시절 우연히 접한 국악에 빠져 피리를 불기 시작했고, 무덤가에서 혼자 피리를 불며 연습하다가 국악과에 합격한 일화는 예능 프로에서도 종종 소개됐다.

"음악 집안이고 그래서 음악을 자연스레 처음 한 건데, 지금은 음악을 했기에 참 다행인 거 같아요. 제 피 속에 음악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 거든요. 말이 음악적으로 들릴 때가 많고, 사물이나 자연 소리나 음악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아요. 게다가 국악이어서 더 감사하죠. 지금도 음악이 저랑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도 종종 국악 프로그램 사회도 들어와요. 국악의 대중화에 힘 써달라는 메시지로 들려서 노래를 연습해 부르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부터 연극영화과를 가려고 했는데 반대가 심하셨어요. 떨어지면 원하는 학교를 가라고 하셨는데, 서울대 국악과에 붙은 거죠. 반대를 하도 하시니까, '내가 꿈꾸는 대로 살게 하고 싶지 않으시냐'고 직접 묻기도 했어요. 음악을 하다가 교향악단에 들어갈 걸 생각하니 숨을 못 쉴 거 같은 거예요. 분명 안정되고 보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 완성된 인간,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다시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간 거죠."

⑥ 예능으로 떴다고? 누가, 황석정이?

그를 지켜보지 않은 대중이라면 예능 프로에서 급부상한 배우로 알기 십상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오산이다. 황석정이야말로 인내를 통한 준비와 나름의 승부수를 던지며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온 '자립형 배우'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노력에 안주하는 성품도 아니다. 수많은 오디션을 봤고 맡기는 역할은 다  해내려 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그는 "배우가 무슨 자존심을 세우나"라며 "이 세상에 이상한 캐릭터는 없다고 본다"고 지론을 밝혔다.

"어떤 분들은 제가 예능으로 뜬 걸로 아실 거예요. 이해는 가죠(웃음). 근데 제 입장에선 단 번에 하나로 뜬다는 생각도, 경험도 없었죠. 계속 오디션 보고, 단역도 하고, 자존심 버리고 끊임없이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래도 보폭을 넓힌 작품이라면 드라마 <비밀>이에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7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살아남았어요. 황정음씨가 감옥에 갔을 때 만나는 캐릭터였거든요. 원래는 2회 분량이었는데, 배우들 모두 너무 좋았고 시청률 반응도 좋았던 거죠. 그 후부터 <선암여고 탐정단>도, <식샤를 합시다2>도 열심히 했고 사랑을 받았고요.

<그녀는 예뻤다> 속 편집장 캐릭터도 독특하게 접근을 했는데, 처음 보이던 거부감이 갈수록 없어지더라고요.  그 캐릭터하면서 저 사람은 이래야 한다 식의 한 면만 보는 시각을 없애고 싶었어요. 누구는 천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나이 상관없이 거침없게 자유로워 보이고 또 그게 다 이유가 있고. 헤어나 의상 회의도 참여하면서 같이 만들어 간 캐릭터거든요. 여성 캐릭터의 확대에도 영향이 있을 거고, 나이로 사람을 구분하고 그런데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캐릭터를 한다는 게 겁도 났죠.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매번 있으니 그런데 하면서 점점 심지가 생기는 거 같아요. 이렇게 단계를 거치면서 연기를 알아가고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심지가 생기는 게 큰 선물이죠! 대중이 더 많이 알아주고, 돈이 좀 더 들어오는 거? 사실 그건 제 것이 게 아니거든요. 거기에 빠지면 삶이 참 소모적이 되겠죠."

⑦ 여전히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미움의 승화

황석정은 인간지상주의자다. 무슨 말이냐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그를 통해 희망을 건다는 뜻이다. "선의의 목적을 위해 하나가 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며 인류의 역사도 그렇게 진보해 갈 것"이라 말했다. 이 정도면 득도한 종교인이 부럽지 않다. 그가 웃어 보였다. "스스로가 그 반대로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신 안에 음악 유전자가 흐르고 있음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평소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음악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더라"며 그는 인터뷰 하는 기자의 말씨도 나름 분석하기도 했다. ⓒ 이정민


"자연에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다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13살 된 우리 개 대박이도, 꽃도, 자연도 모두. 열매를 맺고, 꽃을 맺고, 생장을 하잖아요, 생명 자체가. 그런 걸 다 몰랐던 거죠. 이제는 엄마도, 사람도, 자연도 다 아름다워 보여요. 자라면서 내 부모를, 조상을 미워하는 마음이 컸는데 그게 바로 내 근본을 짓밟고 목을 스스로 조르는 거더라고요. 30대까지도 그 과정을 반복했죠.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봤는데 전쟁통에 피난을 가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그 시대를 살아 낸 엄마도 할머니도 한 여성이고, 가난한 형제들 사이에서 자기 뜻을 못 이룬 거잖아요. 그 시대를 생각하니 마치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빙의돼서 엉엉 운 적이 있어요. 그 후로 미움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역사를 아는 게 나를 아는 것이고 근본을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누군지 아는 게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찾는 거죠.


제가 그래서 불의를 싫어해요.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막 들이받어! (웃음) 겁이요? 물론 나죠. 누구나 다 겁이 있어요. 그걸 욕하면 안 돼요. 누구는 느리게 행동할 수 있고 누구는 빠르게 행동합니다. 리듬은 다 다르지만 자기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한다면 인정해줘야 해요. 누구나 양심이 있다는 그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망각하면 끝나는 겁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일을 겪어요. 똑같이 정의를 부르짖고 싸우는데도 누군가는 망각하죠. 그러면 그를 때려야 할까요? 내 가치를 짓밟는다고 내 가치가 꺾이거나 밟힐까요? 그렇진 않아요. 가만히 보면 그와 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를 사는 거죠. 그 경계가 바로 망각인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미울 수 있지만! 내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을 반추할 수 있잖아요. 조절해야지 무조건 미워한다면 가슴이 너무 아플 거 같아요."

⑧ 그리하여, 앞으로 배우 황석정은…

쉽게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집에 빗과 거울이 없는 아주 프리하고 자연주의(?)적 삶으로 <나 혼자 산다> 시청자들을 폭소케 한 그는 실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품고 있었다. 다른 배우들이 여러 이유로 거절했던 연극 <잘자요 당신>(한진 중공업 사태의 김진숙 지도 위원을 소재로 했다)을 품었고,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 연극 <날 보러 와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끔찍한 단면을 표현했다.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그의 지론을 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도 분명한 기준을 지닌 그가 앞으로 보일 모습에 새삼 두근거린다.

"내 자신한테 부끄럽지 않고 싶어요. 전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작품 속 나사 하나일 뿐이거든요. 같이 맞물려야 하니까, 내 역할도 잘해야 하고, 나사를 잘 돌려서 작품이 잘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작품 자체가 가진 도덕성, 밝음, 희망이 빛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잔인하든, 슬프든, 서사적이든 간에, 인간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을 하고 싶고요.

인간을 너무 왜곡시킨다거나, 무조건적으로 폭력적인 것은 싫죠. 또 캐릭터로 보면, 단편적인 인물로 보이는 걸 싫어해요, 나쁜데 귀엽기도 하고, 나쁜 짓을 보면 나도 저런 짓을 하는데 싶은 그런 인간을 연기해 보고 싶죠. 앞으로 계속 실험해 보려고요. 한순간도 없어요, 계획한 건. 저 나온 작품들도 여전히 잘 못 보고. 이제는 좀 달라지긴 했어요. 열심히 모니터도 해야겠다, 어른스럽게(웃음)."

 배우 황석정이 23일 오후 서울 불광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밝고 깊음. 인터뷰 내내 그는 진심을 숨기지 않았으며 진중하고도 친절하게 답했다. 짧은 시간의 좋은 강연을 들은 기분이랄까. "망각하지 않기!" 황석정이 다짐하듯 몇 번을 강조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 이정민


황석적이 바라는 대중문화 매체, 그리고 뉴스는?
배우이자 문화인으로서 황석정은 "문화예술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이런 문화예술이 인간의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그는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또 어떤 게 인간이고 우리 역시 인간을 위해 어떻게 복무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뚜렷한 문화예술론을 펼쳤다.

인터뷰 전 그에게 황석정이 제안하는 대중문화 매체와 뉴스라는 질문을 미리 던진 것에 대한 답의 일부였다.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합일하는 연기를 추구해 온만큼 그는 대중문화 뉴스가 흥미위주, 자극적이고 빠른 속보 중심인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요즘 너무 빠르고 각박해요. 또 주로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가 서로 비난한다거나 새로운 스타와 새로운 물건 등등 새로움에 대한 것이고요. 근데 그게 더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요(웃음). 가십이 아닌 우리 저변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은 권장하고, 좋은 일을 했다면 칭찬도 해주고. 좋은 쪽으로 인도도 해주고요.

경쟁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우리의 정신과 문화는 낮은 수준인 거 같아요. 사회에 대해 좋은 방향을 문화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도 사실 그래야 하는데 이런...(웃음) 좋지 않은 여건에서도 애쓰시고 나누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소개해주고, 권장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윤기 없는 사회에 윤기를 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기자님들이 갖고 앞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으쌰으쌰! 밥에 윤기가 있으면 서로가 척척 붙잖아요. 우리 마음에 돈을 바르는 게 아니라 윤기로 발라 서로 선한 마음으로 붙게 무언가를 제시해줬으면 해요. 기쁨이나 희망이 없으면 꿈을 꿀 수 없으니까요."



황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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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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