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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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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개발의 정석>은 가볍게 읽히지만 묵직하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소설입니다. 좀 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야함은 읽는 독자에게나 야하지, 주인공인 이 부장에겐 절박한 현실입니다.

평생 '이런 짓'은 안 하며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절망감이 이 부장의 두 눈에서 눈물을 뽑아냅니다. 그런데 '이런 짓'이 이 부장의 불행한 삶에 한 줄기 광명이 돼 줄줄, 이 부장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책 제목이 <자기 개발의 정석>이잖아요. '계발'이 아니라 '개발'인 이유가 궁금해 국어사전을 찾아봤더니 두 단어 모두엔 상태를 '개선'해 나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개선'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조금 달랐어요.

개선하기 위해 잠재되어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계발'이고, 필요하지 않다면 '개발'이라고요. 쉽게 말해 이미 있는 '능력'을 더 개선하고자 할 때 쓰는 말이 '계발', 없는 능력을 새로이 발굴해 이를 개선하고자 할 때 쓰는 말이 '개발'입니다.

고로, 이 책은 제목을 통해 주인공 이 부장에겐 없는 능력이 있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소설 속에서 개선해나갈 거라는 사실 역시 말해주고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부장에게 없던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아래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부장이 처음 오르가슴을 느낀 것은 그의 나이 마흔여섯 때였다. 그 순간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이 켜진 것 같았어." – 본문 중에서


이 부장에게 없던 능력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능력'이었다는 걸 소설은 초반에 밝힙니다. 그리고 어떻게 없던 능력을 발굴했는지를 웃(기고도 슬)픈 상황을 통해 독자에겐 재미있게, 이부장에겐 처절하게 엮어 나갑니다. 생전 처음 뒤가 트인 바지를 입고 침대에 누워야 했을 때, 피곤한 얼굴을 한 의사가 장갑 낀 손으로 전립선 마사지를 해 왔을 때, 항문을 타고 들어온 의사의 손길을 받으며 모욕감과 수치심에 눈물이 찔끔 났을 때, 이 부장은 당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고, 치욕적인 상황은 그 크기를 더해 이 부장의 삶을 헝클어뜨립니다. 고등학생 때 그는 성기로 장난을 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토를 할 정도로 순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사창가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다 인간 말종이라 생각한 적도 있어요. 사실 그는 부부 관계가 소원해져도 괜찮다 여겼습니다. 어차피 이 부장의 삶에서 중요한건 욕망이 아니라 목표였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전립선염은 그에게 에일리언 알처럼 생긴 자위기구를 사용하게 만듭니다. 의사가 직접 추천해준 자위기구로 스스로 전립선 마사지를 해야 했을 때, 그는 협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뒤로 돌려놓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아요. 본인이 본인에게 하는 행동이 혐오스럽기만 하니까요. 이 부장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생각합니다.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몇 번의 혐오감 뒤로 이 부장은 알아버리고 만 겁니다. 오르가슴이 주는 기쁨을요.

정작 '나'는 없던 지난 삶 

소설에서 오르가슴은 이 부장에게 깨달음을 주는 하나의 장치입니다. 그는 오르가슴을 통해 비로소 그간의 자기 삶에 빠져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건 단지 성욕이거나 쾌락은 아닙니다. 이 부장의 삶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이 부장은 우리 대부분처럼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을 말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교육받았을 겁니다. 절대 한눈 팔지 않고 사회가 제시한 길을 따라 이 부장은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죠. 이런 이 부장의 삶을 소설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전까지 이 부장의 세계는 아주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표와 결과가 있었고, 목표를 향하는 거대한 기계는 그의 인내를 연료로 움직였다. 세상은 쓸모 있는 것과 쓸데없는 것으로 나뉘었고,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면 효율을 위해 버려 마땅했다. 적자생존이란 단어의 의미는 명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이 부장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그 목표라는 것이 결과와 일치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회사나 가족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 본문 중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이 부장에게 사회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감투를 선물합니다. 학생 때는 미친 듯 공부했고, 회사원이 된 후엔 죽어라 일 했습니다. 죽어라 일한 덕에 동기들을 제치고 당당히 부장으로 진급도 하게 됐고요. 이 정도면 안정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이 부장은 불행합니다. 불행에 1, 행복에 10을 준다면, 이 부장은 자기 삶의 행복도는 3.21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며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을 걸어왔던 이 부장. 그런 그가 오르가슴을 통해 그간의 허기와 상실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건데요.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자기 자신은 없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런데 혐오스러운 자세로 자위기구를 사용하는 이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이 부장에게 오르가슴은 쾌락을 넘어선 소중한 의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흔여섯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낸 한 남자를 그리고 있는 건데요.

소설의 제목이 '계발'이 아니라 '개발'인 것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오르가슴'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오르가슴은 성욕의 다른 말이고, 성욕은 본능입니다. 본능은 우리 안에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는 '개발'보다는 '계발'이 어울리는 것이죠. 그런데 소설은 '개발'이란 단어를 써서 원래 있는 그 무엇을 마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지만 불행과 상실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던 이 부장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소설에서 원래 있는 것이지만 없는 것처럼 치부되는 건 이 부장 자신, 그러니까 '나'입니다.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기에, 정작 자기 자신이 부재한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삶. 우리의 삶도 대체로 이렇죠. 그래서 소설 속 이 부장은 자기 자신을 챙길 겨를도 없이 바삐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없어진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을 '나'를 위해 처음으로 시간을 좀 내보는 게 어떻겠냐고요.

덧붙이는 글 | <자기 개발의 정석>(임성순/민음사/2016년 04월 22일/1만3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자기 개발의 정석

임성순 지음, 민음사(2016)


태그:#임성순, #자기 개발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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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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