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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비 아래로 덕양정과 한강이 보이는 풍경
 행주대첩비 아래로 덕양정과 한강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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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392년 건국 이후 200년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했다. 명나라는 황하의 홍수와 몽골 및 여진의 반란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계속 패했고,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 수군이 승리하고, 의병이 활약하고, 조선군이 정비되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의 조명연합군은 평양 탈환에 성공하지만 고양 벽제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물러난다. 권율 장군과 백성들은 행주산성에서 힘을 합쳐 일본군을 대파한다. 왜적은 한양에서 밀려나 경상도로 물러가면서 명나라에 강화 회담을 요청한다.

1602년에 세워진 행주산성 대첩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뒤로 1970년에 세워진 새 대첩비가 보이는 풍경
 1602년에 세워진 행주산성 대첩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뒤로 1970년에 세워진 새 대첩비가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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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과 일본의 강화 회담에 반대한다. 그러나 명과 일본은 회담을 개시하고,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왜적은 울산, 부산, 거제 일원의 남해안에 주둔군을 남겨둔 채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서로 무리한 요구를 내걸었던 강화 회담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1597년에 다시 재개된 전쟁을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전쟁 초기와 달리 정비를 끝낸 조선군은 명군의 도움을 받아가며 왜적을 압박한다. 일본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벗어나 더 위로 쳐들어오지는 못한다. 조선 수군도 정유재란 초기에는 참패하지만 이내 승리를 거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일본군은 전면 철수를 시작한다. 조선 수군은 도망가는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다. 마지막 노량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한다. 임진왜란 7년은 조선과 중국,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상은 행주산성관리사업소가 발간한 소형 책자 <행주산성> 중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부분에 약간의 윤문을 보탠 것이다. 7년전쟁 시기 중 행주산성(사적 56호)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3년 2월 12일이다.

명군과 협공하려 했지만 홀로 일본군 3만과 싸우게 된 권율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오기 전에 오산의 독산성에서 한 차례 일본군을 꺾는다. 사진은 독산성에서 바라본 오산의 아파트 단지 풍경.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오기 전에 오산의 독산성에서 한 차례 일본군을 꺾는다. 사진은 독산성에서 바라본 오산의 아파트 단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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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긴 후 남쪽으로 물러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제압한 기세를 몰아 다시 북진을 노린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권율 부대를 미리 진압함으로써 평양에서 내려오는 조명연합군과 권율군 사이에 자신들이 끼어 앞뒤에서 공격당하는 일을 사전에 막으려 했다.

권율은 이치 대첩 후 북진했다. 장차 한양 탈환 전투에 힘을 보탤 계획이었다. 권율군은 북쪽으로 올라오는 도중 독산성(禿山城, 오산)에서 일본군을 한 차례 격파하기도 했다. 그 후 권율은 한강에서 가까운 안현(鞍峴, 광양 북쪽)에 진을 치려 했다. 하지만 장수들은 안현이 도성에서 너무 멀다며 반대했다. 평양에서 내려오는 조명연합군과 남북으로 협공하여 왜적들을 맹렬히 무찌르고 싶은 의욕이 장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주둔지를 서울 근교 서쪽에서 물색해보라고 했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넌 지점에 병영을 설치할 만한 곳이 있다고 보고했다. 행주산성이었다. 권율은 조경에게 행주산성 둘레에 목책을 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권율군은 은밀히 행주산성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본래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 원수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한 뒤 북쪽으로 물러가버린 것이었다. 권율 군은 홀로 일본군과 대적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당시 권율군은 2300명 수준, 일본군은 무려 3만 대군이었다.

행주산성의 아군은 모두 이곳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권율은 일본군이 한꺼번에 밀어닥칠 것을 대비하여 나무 철책을 이중삼중으로 만들고 흙언덕을 쌓아 적들의 조총에 대비했다. 3만여 적들은 전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행주산성의 토성
 행주산성의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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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오전 6시경, 일본군 1군인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와 2군인 석전삼성(石田三成, 이시다 미쓰나리) 부대가 앞장서서 공격을 개시했다.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등 첨단 신무기를 동원하여 반격, 적들을 무참하게 궤멸시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3군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는 긴 방둑 위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조총수들을 배치하여 총격을 난사해댔다. 조경 장군이 대포를 쏘아 적들의 사격대를 아주 초토로 만들어버렸다.

계속 전투에서 밀리자 일본군 총대장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우키타 히데이에)가 화를 내면서 직접 4군을 지휘하여 성벽을 향해 돌진해왔다. 아군의 화살이 빗발쳐 상당수 왜적들을 쓰러뜨렸지만 일본군은 워낙 대군이었으므로 멈추지 않고 공격해왔다. 잠깐 아군의 전선이 흔들렸다.

전군을 지휘하던 권율은 화차를 모두 일본군 4군을 향해 집중시켰다. 당시 행주산성 안에는 40대의 화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연속하여 200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화차들이 벼락같이 행주산성의 하늘을 뒤덮었다. 일본군 총대장 우희다수가와 2군 대장 석전삼성까지 부상을 입자 일본군은 마침내 물러났다.

처영(處英) 등 1천 승병군들도 일본군 5군과 6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때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이끄는 일본군 7군은 산성의 가장 낮은 쪽을 공격 중이었다. 7군은 행주산성 서북쪽을 줄기차게 공략한 끝에 마침내 성 안으로 진입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 겸 총통기의 사진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 겸 총통기의 사진
ⓒ 행주산성관리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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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도 직접 칼을 뽑아들고 왜적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부녀자들조차 짧게 자른 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행주치마'라는 단어의 민간어원(民間語源)이 되었고, 병사들은 그 돌을 왜적들을 향해 집어던지며 싸웠다.

조선군의 무기 부족 상황을 눈치챈 일본군은 재차 총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경기수사 이빈(李蘋)이 화살 수 만 개를 싣고 한강에 나타났다. 이빈이 뒤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자 일본군은 크게 당황, 황급히 군사들을 빼내어 서울로 퇴각했다. (1593년 2월 24일 <선조실록>에는 '화살이 다 떨어져갈 때 충청병사 정걸이 화살을 가져와 위기를 구해주었다矢幾垂盡 而適忠淸兵使丁傑 運箭以濟其急'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행주대첩의 의의

<행주산성>은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 요인'을 말해준다. <행주산성>은 '1) 민, 관, 군, 승려, 부녀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을 건 전투 2) 권율 장군과 휘하 장수들의 전략과 전술 3)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 무기 사용 - 화차, 총통기, 신기전 등  화약을 사용한 무기 4) 강과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지리적인 조건'의 네 가지를 행주대첩 승리의 바탕으로 들고 있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이치 대첩(권율), 진주 대첩(김시민), 행주 대첩(권율)'을 들고 있다. 또 '임진왜란 3대첩'으로 '진주 대첩(김시민), 한산 대첩(이순신), 행주 대첩(권율)'을 들고 있다. 행주대첩은 두 곳에 두루 들어 있다. 행주대첩의 의의를 알아보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신편 한국사>를 읽어본다. 

1970년에 세워진 행주산성 대첩비
 1970년에 세워진 행주산성 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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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의 행주대첩 관련 기술은 '선조 26년(1593) 2월 한성 근교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는 명군의 벽제관 패전 이후 조선측 관·의병이 잘 싸워서 일격에 일본군을 섬멸한 대표적인 전승이었다.'로 시작된다.

당시 일본군은 '명군의 공격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군부터 퇴치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명군의 도성 진공 작전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3만 대군을 투입하고도 그들은 2300여 조선 관군과 의병에게 대패했다. 행주대첩은 '1차 진주성 전투와 더불어 조선 측이 침략군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정적인 전승을 거둔 것'으로서 '명군의 벽제관 전투 이후 조선 측 관, 의병이 잘 싸워 일격에 일본군을 섬멸한 대표적인 전승'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으로 볼 때 행주산성 참패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3만 대군을 투입하고도 '한낱 고립된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아 풍신수길에게 보고하기를 꺼릴 만큼 충격을 받았던' 1차 진주성 싸움의 대패에 버금가는 참사였다. 그래서 행주대첩은 1차 진주성 대첩, 한산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에 나란히 꼽히게 되었다.

과학적으로 설계된 신무기의 위력

그런데 <행주산성>이 행주대첩이 가능했던 이유로 꼽은 네 가지 중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 무기 사용'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해서는 <신편 한국사>도 '행주산성 전투는 병력과 조직, 그리고 군사들의 전술면에서 조선 측이 일본측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화력의 운용과 군관민이 일치된 항전 의식에서는 조선 측이 우세하였다.'라는 기술을 통해 같은 시각을 보여준다.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 무기 사용'과 '화력의 운용'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따라서 행주산성 답사에서는 화차, 총통기, 신기전 등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 무기'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행주산성>은 화차를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으로 소개하면서 '총통기(다연장 로켓포)'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도'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도'
ⓒ 행주산성관리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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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火車)는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 수십 개의 총으로 구성된 발사용 무기)를 장착함으로써 쉽게 이동하면서 동시에 수십∼수백 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도록 제작된 무기로, 조선 시대 이전에는 없던 신무기이다. 최초의 화차는 아버지 최무선(崔茂宣)의 뒤를 이어 각종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최해산(崔海山)이 1409년(태종 9)에 발명했다.

두 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에 만들어졌다. 이 화차는 문종이 직접 발명했다고 해서 문종화차(文宗火車)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문종화차는 세계 역사상 왕이 직접 발명하여 대량으로 제작, 사용된 우수 무기로 평가받고 있다.

세 번째 화차는 문종화차를 약간 변경한 것으로 1490년(성종 21) 무렵에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 변이중(邊以中)이 문종화차를 개량하여 네 번째 화차를 만들었다. 변이중의 화차는 박진(朴晉)이 경주를 탈환할 때와 권율의 행주대첩에 사용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권율 장군 사당인 충장사 뜰에 백일홍이 만발했다.
 권율 장군 사당인 충장사 뜰에 백일홍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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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화차는 19세기 초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변이중의 화차를 조금 변화시킨 것이다. 현재 조선 시대의 화차 실물은 남아 있지 않고, 채연석(蔡連錫)이 1980년에 복원한 문종화차가 행주산성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기전(神機箭)은 귀신이 붙은 기계화살이라는 뜻이다. 1448년(세종 30)에 제작된 무기로, 고려 말에 최무선이 제조한 로켓형 화기(火器)인 주화(走火)를 개량했다. 현대의 로켓엔진에 해당되는 약통과 폭탄인 방화통이 장착된 화살은 목표물에 당도하면 자동으로 폭파되었다. 우리나라의 신기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제작 설계도가 남아 있는 무기이다.

질려포통(黎藜砲筒)은 현대어로 대략 시한폭탄을 뜻한다. 둥근 나무통 속에 화약과 뾰족뾰족한 능철을 넣어 만들었는데, 폭발하면 능철이 날아가 적을 살상했다.

현대의 시한폭탄에 해당되는 질려포통(사진은 서울 전쟁기념관 전시품)
 현대의 시한폭탄에 해당되는 질려포통(사진은 서울 전쟁기념관 전시품)
ⓒ 서울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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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에게 자신의 재산을 털어 화차 300량을 제작, 그중 40대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행주산성 싸움에 제공함으로써 행주대첩을 가능하게 한 변이중(1546~1611)에 대해 잠시 알아본다. 황주변씨인 변이중은 전라남도 장성에서 아버지 변택(邊澤)과 어머니 함풍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율곡 이이(李珥)에게 배웠으며, 1573년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소모어사(召募御史)로서 군수품을 조달했고, 수원에 주둔하면서 기호(畿湖, 경기와 호남)의 적을 대비하였다. 변이중은 1603년 함안군수를 끝으로 관직을 사임, 장성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행주산성 바로 아래를 흐르는 한강, 행주산성 전투 중 아군의 화살이 떨어져 고전 중일 때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 2만여 개를 싣고 이곳에 나타났다.
 행주산성 바로 아래를 흐르는 한강, 행주산성 전투 중 아군의 화살이 떨어져 고전 중일 때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 2만여 개를 싣고 이곳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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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대첩문 안으로 들어선다. 가장 먼저 답사하게 되는 곳은 권율 장군 동상이다. 조금 올라가면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오른쪽 숲속에 있고, 그 뒤편에 행주대첩기념관이 있다.

대첩기념관에서 돌아나와 오르막을 걸으면 천천히 한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한 가지로 '강,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지리적 조건'을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잘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곳에 닿으니 단숨에 헤아려진다. 대첩문까지 오는 길이 줄곧 평지였던 관계로 이곳이 요새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오른쪽 절벽 아래로 한강이 아득하다.

계속 길을 따라 오르면 1602년에 제작된 대첩비를 보게 된다. 물론 경기도 유형문화재 74호인 대첩비는 비각 안에 들어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이 대첩비 뒤에는 1970년 건립된 15.2미터 높이의 거대한 대첩비가 또 있다.

본래부터 돌성이 아니라 흙성이었던 행주산성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은 석성(石城)이 아니라 토성(土城)이었다. 토성은 1970년산 대첩비 뒤편에서 시작되어 이곳 덕양산의 동쪽과 서쪽 7∼8부 능선 1km에 쌓여 있었다. 그중 415m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오늘 나는 그 토성 위를 걸으며 1592년 2월의 함성과 비명소리를 들어보려 한다. 내 귀, 아니 내 마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뙤약볕을 걸으며 나는 줄곧 그것이 궁금하다.

행주산성의 교육관인 충의정이다. 토성은 이 충의정 뒤에 있다.
 행주산성의 교육관인 충의정이다. 토성은 이 충의정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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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권율, #행주산성, #변이중, #화차,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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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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