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예술로서 영화의 기본 목표는 무엇보다 투자한 금액에 걸맞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영화일수록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춰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고 노력하겠죠. 이 때 고려되는 것이 바로 집단 무의식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회 집단이나 민족, 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무의식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 경험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만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늘 성장의 테마나, 죽음의 공포, 사랑, 가족간의 문제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는 것도 집단 무의식에 호소하기 위해서죠. 국내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영화 흥행작들을 살펴 보면 대부분 우리 민족의 역사나, 한국 사회 내에서 공분을 일으킨 문제를 주로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에 담긴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를 예민하게 포착한 다음, 그것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내어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대중 예술로서 영화가 사회에 기여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터널>의 포스터.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호소하는 기획은 좋았지만, 상업 영화에 기대할 만한 쾌감은 부족한 영화였다.

영화 <터널>의 포스터.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호소하는 기획은 좋았지만, 상업 영화에 기대할 만한 쾌감은 부족한 영화였다. ⓒ 쇼박스(주)


개봉 14일차 537만명 관객 동원... 그러나

올 여름 시즌 흥행 전선의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 영화 <터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터널 붕괴 사고 때문에 갇힌 한 남자의 생환기를 통해 세월호 사건으로 생긴 우리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를 자극합니다. 국가가 재난에 대응하는 어설픈 방식, 부실 공사, 언론의 문제, 자기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언급하면서 말이죠.

이런 전략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개봉 14일차인 8월 23일 현재 537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가오는 주말과 그 다음 주말까지 4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할 것이 유력합니다. 그에 따라 최종 관객 예상치는 800만까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객 동원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항상 그 작품이 재밌다거나 완성도가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죠.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영화 <터널>의 한 장면. 처참히 무너져 내린 터널의 모습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잦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다.

영화 <터널>의 한 장면. 처참히 무너져 내린 터널의 모습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잦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다. ⓒ (주)쇼박스


먼저, 사건 전개 과정의 큰 축이 되는 구조 작업의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영화 속의 구조 작업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와 과정은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는 실수들로 점철됩니다. 실제 붕괴 사고에서 구조 보강도 없이 멋대로 사고 현장에 들어가거나, 시공 과정의 변경 사항에 대한 검토 없이 설계도만 갖고 굴착에 나서는 일 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비전문가도 쉽게 알 수 있는 상식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 실제로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우리나라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진짜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그런 낮은 수준의 것이 아니죠. 중앙의 관료와 현장 전문가의 인식 차이, 비난에 직면한 국가 권력이 국면 전환을 위해 쓰는 꼼수, 이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일감을 몰아주는 행태, 사고를 개별 기업의 홍보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행위 등등 남의 불행은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만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실적인 부조리를 이 영화는 잘 활용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저 풍자적인 묘사나 대사를 통해 수박 겉 핥듯 다루는 정도에 그칠 뿐이죠.

또한, 이 영화는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을 만한 갈등 구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한 부분이 꽤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무너진 터널 속에서 정수(하정우)가 어떻게 자신의 참혹한 운명과 싸우며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인데, 그와는 별 상관 없는 터널 외부의 상황이 뜬금없이 끼어들며 극의 리듬과 템포를 떨어뜨릴 때가 많거든요. 외부 상황의 변화가 터널 내부의 생존 투쟁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극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것도, 증폭시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터널 밖의 에피소드가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조 작업이 지연되는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대립되는 가치나 인물 구도가 없기 때문에, 터널 밖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대개 상황 설명을 해 주는 기능적 장면에 불과할 뿐 그다지 재미가 없는 편입니다.

매몰된 정수의 상황을 보여 주는 방식도 좀 아쉽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처절하게 보여 주는 대신 블랙 코미디 터치로 곳곳에서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는데, 이것이 몰입을 방해합니다. 물론 우리 삶에는 언제나 희극과 비극의 요소가 공존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좀 더 현실적인 묘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한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하기 위한 노력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존 투쟁에 좀 더 집중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터널> 때문에 세월호 사건 쟁점 흐려져... 기우일까

 영화 <터널>의 한 장면. 주인공 정수 역을 맡은 하정우는 고립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열연한다. 정수의 아내 세현 역의 배두나와 구조대장 대경 역의 오달수의 연기도 좋다.

영화 <터널>의 한 장면. 주인공 정수 역을 맡은 하정우는 고립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열연한다. 정수의 아내 세현 역의 배두나와 구조대장 대경 역의 오달수의 연기도 좋다. ⓒ 권오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월호 사건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좀 우려스럽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상처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사고 당시 현장에 많은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 인력과 기술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이 사건 발생 후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명명백백히 해소되지 않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 터널 사고는 그저 구시대적 관행 때문에 일어난 매몰 사고일 뿐입니다. 구조 과정이 지연되는 것도 부주의하고 미숙한 대응 때문이고, 사고 당사자 가족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에도 미안해 해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논리는 이 정권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 낸 프레임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세월호 사고는 과적과 무리한 출항, 승무원의 비양심적 행동 등으로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며, 구조 과정에서의 혼선은 매뉴얼과 콘트롤 타워 부재 때문이며,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사회가 겪는 트라우마에 대한 책임은 구조에만 매달린 유가족에게 있다는 식인 거죠. 이 영화 때문에 세월호 사건의 쟁점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올 여름 시장을 겨냥해 4대 배급사가 내세운 영화들은 모두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뒀습니다. 예년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고, 영화마다 타깃이 되는 관객층이 겹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흔을 다루거나, <부산행>과 <터널>의 경우처럼 사회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등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건드리는 기획력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빼고 나면, 위의 4편 중에서 영화적 재미가 뛰어났던 영화는 없었다고 봅니다. 한국 영화계가 매년 천만 영화는 만들어 내지만, 드라마나 대중가요처럼 다른 나라에서 한류를 불러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국내 관객만 겨냥한 기획 영화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터널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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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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