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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벌어진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남역 이후 한국 사회를 진단합니다. [편집자말]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모습.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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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우리가 처음 강남역에 갔던 것은 5월 19일 저녁이었다. 그 때에는 이미 강남역 10번 출구의 한쪽 면이 추모 글귀가 적힌 포스트잇으로 빼곡했고 그 아래 셀 수도 없이 많은 국화가 놓여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화를 마친 뒤에도, 한 자 한 자 적어내린 포스트잇을 붙인 뒤에도, 포스트잇이 붙은 면을 마주본 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제자리에서, 또 근처를 서성이면서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은 할 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다들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하거나, 말없이 포스트잇을 읽거나, 한참을 읽어 내리다 차오르는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10번 출구 주위로 우연히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10번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장에서 운 좋게 마이크와 앰프를 빌릴 수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입니다. 지난 17일 바로 이 근처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습니다. 범인은 앞서 여섯 명의 남성을 지나쳐보낸 뒤 처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간 여성을 골라 살해하고 범행 동기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진술했습니다. 피해자 여성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된 것입니다…."

뒤이어 여성혐오로 희생되신 분을 추모하고, 이런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이 사건이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우리 삶으로 겪어낸 여성혐오를 증언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잠깐의 적막 후 쏟아진 '증언'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에 이어진 추모 행렬.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에 이어진 추모 행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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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회자를 가운데 두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혹시 발언하실 분이 계시느냐 물었다. 설마 손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사진이 찍혀서 인터넷에 올라가 강간에 가까운 언어폭력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더라도 수많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두어 명의 남성이 손을 들었고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겪은 폭력과 차별, 배제, 멸시에 대해 문제제기할 공간을 갖지 못했으니 이 자리에선 되도록이면 여성분들의 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잠깐의 적막 이후 몇 분이 더 지나 망설이던 한 여성이 손을 들었고, 이후로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지어 나눠졌다.

어버이날 가정폭력으로 아버지를 신고한 이야기,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 가정 내 성폭력으로 도망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 발언자가 울음으로 말문이 막히면 손수건이 건네졌다. 누구도 위로의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같이 울어줄 수는 있었다. 서로의 입을 통해 들었던 기가 막힌 사건들은 사실은 아주 생경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통해 충분히 연상할 수 있는 일들이 태반이었고 그래서 더 서글펐다.

우리는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비슷한 고통을 나눴다. 두 시간에 걸친 추모제가 끝나고 먹먹한 가슴으로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내내 함께 자리를 지키던 분들이 다가와 한 번씩 손을 잡고 고맙다고 말했다. 잠깐 안아 봐도 되냐고 물었던 분이 기억에 남는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같은 시간 다시 찾아간 강남역의 분위기는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엄숙했던 공간의 분위기가 격양되어 있었다. 피켓을 들거나 목에 건 몇몇 남성들을 둘러싸고 대치중인 무리가 곳곳에 보였다. 남성들이 들고 있는 피켓의 대부분은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 시대에 여성혐오가 웬 말이냐'는 것이었고, 개중에는 '여성혐오도 나쁘고 남성혐오도 나쁘다, 사이좋게 지내자'는 속 편한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여성혐오가 없거나, 있지만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그들은 자유발언대가 시작하자 돌변했다. 사회를 보는 내 앞을 막아선 채 간접적인 방법으로 진행을 방해하려는 남성이 있었는가 하면 대놓고 진행을 멈추라고 우악스레 달려들던 남성은 물론, 촬영을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어대는 남성은 셀 수도 없었다.

처음 보는 여성들끼리의 연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확인

지난 5월 21일 오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지난 5월 21일 오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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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에 가득차서 다가온 그들 앞에 마주 선 느낌은 그랬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계집애들이 모여서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느니,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가 어떻다느니 남자가 듣기에 기분 나쁜 소리만 해대니 을러대려고 왔구나.

'방해되니 비켜 달라', '사진 찍지 말아 달라'는 요구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뭐라고 짖든 간에 듣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은 그냥 하던 행위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들과 피켓 든 남성들이 동일인이었냐고 하면 그런 이도 있었고 아닌 이도 있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피켓을 들 다른 남성들, 여성혐오가 '없다' 또는 '나쁘다'고 주장한 그들 중 누구도 이 분명히 실재하는 여성혐오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공격에 맞서 목소리를 낸 것은 그곳에 모였던 여성들이었다.

찍지 말라는 말도 무시한 채 참가자들의 사진을 찍어대는 남성의 카메라 렌즈를 아예 등을 돌려 막아버리고, 고통을 나누는 공간에 난입하는 남성에게 당장 나가라고 화를 내고, 그래도 나가지 않고 뻗대는 수십 명이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이 겪어온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 심지어 '아랫것들에 의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여성혐오가 없다'느니 '남성혐오'라느니,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 시대'라느니 말도 안 되는 말을 주워섬기며 입을 틀어막으려는 무수한 시도에 맞선 것은 다름 아닌 여성들의 연대였다. 그 며칠 강남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런 것들이었다. 처음 보는 여성들끼리의 연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확인.

강남역에서는 실제로 수많은 여성 추모 참가자들의 사진이 도둑촬영을 당했다. 사진들은 디시, 일베, 오유, 김치녀 페이스북 페이지 등에 올라가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 사람들은 '여성혐오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댓글을 달았다.

"다리 봐라."
"줘도 안 먹는다."
"저런 거 하게 생겼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댓글들이 쉽게 쓰였다.

여성이기 때문에 욕하기는 더 쉬웠다. 'XX년, 보X를 어떻게 해버리겠다.' 끔찍한 말이지만 낯선 말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일전에 팟캐스트 방송에서 '개보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도 아직 멀쩡히 방송에 나오는 한 개그맨을 알고 있으니.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나 메갈리아 티셔츠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의 강남역 10번 출구 앞 현장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여자들이 모여서 남자 욕 하는 게 불만'인 사람들이 강남역으로 피켓을 들고 나온 몇몇에 그치는 게 아니란 점이 좀 달랐다. 그런 얘기를 수만, 십수만  명이 하고 있었다.

인터넷만 켰다 하면 메갈리아가 화두였다. 커뮤니티, SNS를 막론하고 그야말로 메갈리아 사상검증의 막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성우를 지지한다는 말을 하면 '메갈' 딱지가 붙었다. 그들은 메갈이란 '여성인권을 위시하여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집단'이라, 메갈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들어줄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메갈리아가 실재하는 집단인지 아닌지, 페미니즘이 도대체 무엇인지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싶으면 일단 메갈이랑 선을 긋고, 또 내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온건하게 주장해보라는 식의 얘기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지어 위해를 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창작자들이 시건방져졌으니 공권력의 검열이나 당해보라는 '예스컷 운동'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성우를 지지한 수많은 창작자들의 이름이 일명 살생부에 올랐고 그중 웹툰 작가들의 별점은 반 토막이 났다. 성우를 지지하는 입장의 성명을 발표한 한 진보정당의 부문위원회 성명은 철회되었고, 해당 글을 올린 당원들은 당기위원회에 제소됐다. 이쯤 되니 성우의 목소리가 게임에서 삭제된 것은 말해봐야 사족일 것 같다. 이것이 메갈리아 논란 이후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여성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SNS를 중심으로 '#내가메갈이다'라는 해시태그가 퍼져나갔다. 너나할 것 없이 메갈리안을 자임하며 '메갈리아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비웃어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메갈리아 사상검증에 열을 올렸던 이들이 뜻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멀쩡한 여자는 한 명도 없는 거야? 라고. 그래, 사실 나는 그들에게 '멀쩡한 여자'는 한명도 없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그들이 원하는 멀쩡함이 가부장제의 입맛에 맞는 인격이 말소된,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게 공허한 남녀평등을 외치는 존재라면, 그들은 2016년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고.

여성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5월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행진 지난 5월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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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가진 쪽은 변하지 않는다. 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분이 상하지 않는 수준에서 페미니즘을 허락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성평등은 좋은 것이니까. 허용되는 영역을 벗어날 때 그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메갈리아'라고 못 박으면 그만인 것이다.

변한 것은 지금까지 짓눌리고 억압받은 쪽이었다. '김치녀', '된장녀', '보슬아치' 같은 단어에 대해 언제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 했던 쪽. 그러기 위해 나 아닌 다른 여성들과 선을 긋는 방식을 택해야 했던, 그런 여성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가 문제라고 한다면 너도 메갈, 나도 메갈, 위아더 메갈이라며 '#내가메갈리아다' 해시태그를 들고 나왔다. 듣는 가부장 입맛에 맞게 페미니즘 할 테니 예쁘게 봐달라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도 뭣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약자의 언어는 설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것을 안다.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앞에서 굳이 예쁜 말로 설득하려고 해봤자 피곤해지기만 한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게, 그리고 단단하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 그것만으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그들에게 지금은 2016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이 말은 사실이다. 여성들은 내부의 끈끈한 결속과 연대를 통해 이미 페미니즘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사건 이후 100일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관리자입니다.



태그:#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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