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의 한숨, 여름방학이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을 이해하기에 아이는 아직 오랜 삶을 살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 일 년도 버거울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며 아이는 행복해 했다. 그 계획의 반의반도 실행하지 못했는데, 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 폭염은 누그러질 줄 모르고, 매미는 여전히 미친 듯이 울어대지만, 아이의 한숨 뒤로 여름 방학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물론, 방학이 곱게 물러난 것은 아니다. 방학이 끝날 때면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바로 밀린 방학 숙제하기가 남아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일찌감치 숙제 다 해놓고, 맘 편히 놀자고 약속하고 다짐하건만, 그런 과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질 리 없다. 한편으로, 방학 숙제라는 건 막판에 몰아서 하는 게 제 맛이기도 하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밀린 숙제를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일기 쓰기나 방송보기 같은 구태의연한 숙제 외에 눈에 띄는 과제가 있었다. 15개 중에서 2개를 선택하는 일종의 미션 수행인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꽤 신선하고 재미있다. 3일 동안 가족들의 양말을 직접 빨아보고, 가족을 위해 봉사할 때의 기분을 적어오라거나, 일주일간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살아본 후의 소감을 적어오라는 식이다.

그 중에서 큰 아이가 첫 번째로 고른 메뉴는 봉숭아물 들이기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사내 아이만 둘이다. 그 많은 미션 중에 엄마가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항목에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럼에도 어릴 적 기억도 되살리고, 아이들에게 자연의 재료를 느끼게 해줌과 동시에, 오랜만에 나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적극 찬성했다.

나 어릴 적, 여름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 쯤, 엄마는 서둘러 주인집 앞마당에 있는 봉숭아에서 꽃잎과 이파리를 땄다. 대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사는 집이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평소 화장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엄마가 유독 봉숭아물에는 집착을 보였던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엄마의 엄마가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던 아무 걱정 없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해볼 뿐이다.

계집아이라 놀리던 친구들, 이상하게 봉숭아물 손톱이 싫지 않았다

엄마가 봉숭아물을 들일 준비를 마치면 남동생과 나는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계집아이처럼 손톱에 물을 들였다고 놀리는 친구들이 가끔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주홍빛 봉숭아물이 든 손톱이 싫지 않았다. 더구나 머리가 조금 크면서 알게 된 봉숭아물의 전설은 강력한 주문이 되어 20대 후반까지 내 의식의 주변을 맴돌았다.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

민간에서 전해오는 설화는 크게 신빙성이 없는 것임을 인지한 뒤로도 한참 동안 이 주문만은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손톱 하나로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별로 밑지는 게 없는 장사 아니던가? 첫사랑이라 굳게 믿었던 여인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간 후에야 미신에 의지한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봉숭아물의 아련한 추억은 이쯤에서 접어 두고, 본격적인 봉숭아 물 들이기에 대해 적어보자. 경비 아저씨께 허락을 맡고, 엄마가 그랬듯이 아파트 입구 화단에 핀 봉숭아의 꽃잎과 이파리를 몇 개 땄다. 요즘도 봉숭아 물 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따 간다고 한다. 꽃잎보다는 이파리가 많아야 봉숭아물이 선명하게 든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절구통에 꽃잎과 이파리를 잘게 잘라 넣고 아이들에게 빻도록 시켰다. 서로하겠다고 난리인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1분씩 기회를 주었다. 절구의 각도와 힘 조절만 잘 훈련시키면 향후 마늘 빻는 일에도 투입시킬 수 있겠다는 계산하에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이때, 백반을 조금 첨가시켜야 하는데, 백반이 없다면 소금도 가능하다. 백반이나 소금 모두 매염재로 작용해서 봉숭아꽃과 잎의 주홍빛 염료를 추출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 단계는 잘 빻아진 봉숭아 꽃과 잎을 고정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손가락 부위만 잘라두고, 주방용 랩과 실을 준비한다. 손톱 위를 충분히 덮을 정도의 빻은 봉숭아를 올려놓고 랩으로 손가락 전체를 감싼 다음, 미리 잘라둔 손가락 비닐 장갑을 끼우고 실로 고정시키면 된다. 글로 적으면 이렇게 간단한 것을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한 시간 쯤 낑낑거렸다.

폭염 덕분에 한방에서 자게 된 요즘, 아이들은 내일 아침에 손가락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며 한참을 종알대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와 아이들의 손가락과 아내의 엄지 발가락에 곱디고운 주홍색 봉숭아물이 들었다. 물론 손톱에만 물든 것이 아니라 손가락 끝부분이 벌겋게 물들어 얼핏 봐서는 김치국물이 묻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제 나는 새끼손가락 손톱을 바라보며 첫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느냐고? 큰일 날 소리다. 마지막 사랑인 아내와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기서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만한 막장도 없을 것이다.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건, 다름 아닌 기다림 바로 그 자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림이 필요 없는 아니 원치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문명은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원하는 즉시 연락할 수 있고, 검색할 수 있고, 주문할 수 있다. 이루어 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을 묵묵히 기다리는 걸 사람들은 바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 동안의 설렘과 기대, 심장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소중한 감정들을 잊고 살진 않았는가, 자문해 본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매달린 주홍의 조각에 살짝 기대어 본다. 첫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굳이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시대착오적 행위인 기다림을 다시 내안에서 불러 일으켜 본다.

* 아래는 사진으로 본 봉숭아물 들이기 순서

화단에서 따온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가위로 잘게 자른다.
▲ 봉숭아 물 들이기 1단계 화단에서 따온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가위로 잘게 자른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정구통에 봉숭아 조각들을 담고 열심히 빻는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가급적 아이들을 시킨다.
▲ 붕숭아 물 들이기 2단계 정구통에 봉숭아 조각들을 담고 열심히 빻는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가급적 아이들을 시킨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잘 빻아진 봉숭아를 손톱 위에 올리고 주방용 랩과 실을 이용하여 잘 고정시킨다.
▲ 봉숭아 물 들이기 3단계 잘 빻아진 봉숭아를 손톱 위에 올리고 주방용 랩과 실을 이용하여 잘 고정시킨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손톱 위에 빻은 봉숭아를 올리고 랩으로 싸매는 과정
▲ 봉숭아 물 들이기 3단계-2 손톱 위에 빻은 봉숭아를 올리고 랩으로 싸매는 과정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하루밤 자고 나면 예쁜 주홍빛 봉숭아물이 손톱과 발톱에 들어 있다.
▲ 봉숭아 물이 든 최종 모습 하루밤 자고 나면 예쁜 주홍빛 봉숭아물이 손톱과 발톱에 들어 있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태그:#봉숭아물, #첫사랑, #방학 숙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