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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거위벌레
 도토리거위벌레
ⓒ 농업유전자원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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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거위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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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m의 작은 몸에 거위처럼 긴 주둥이, 도토리거위벌레

광양 백운산에는 음흉한 정원사가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가지를 툭 잘라낸다. 나무를 다듬기 위해서? 아니다. 그 정원사의 목적은 오로지 '내 자식'을 위해서다. 1cm의 작은 몸에 거위처럼 긴 주둥이를 가진 '도토리거위벌레'가 바로 그 주인이다.

백운산을 거닐다보면 우리는 종종 허공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지에 머리를 얻어맞곤 한다. 어떤 놈인가 하고 고개를 올려다 보면 하늘은 울창한 참나무 잎들만 무성하다. 그리고 또 저쪽, 나뭇잎을 낙하산 삼아 가지 하나가 더 떨어진다.

어느새 길바닥은 몸을 내던진 도토리 가지로 수북하다. 도토리의 자살인가? 떨어진 도토리 가지를 주우며 생각한다. 그러나 매끈히 잘려나간 가지 끝을 보면, 꼭 누군가 가위로 도려낸 것만 같다. 사람의 소행인가? 하지만 이 땡볕 더위에 나무 위에 올라가 도토리를 떨어뜨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토리묵을 너무 사랑하는 미식가라면 모를까.

범인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도토리거위벌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잇몸이 시큰했다. 가는 주둥이로 질긴 나뭇가지를 잘라내는데 몇 번을 베어 물었을까, 벌레의 턱관절이 괜스레 걱정된 것.

그것도 가지 하나가 아니라 20-30개의 가지를 벌레 한 마리가 다 자르고 다닌다니, 아마도 지금 그는 임무를 마치고 나무 위에 벌러덩 누워 얼얼해진 주둥이를 잡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무를 자르는 것은 순전히 자식의 탄탄한 미래를 위해서다. 도토리거위벌레는 딱 이맘 때 쯤, 도토리 열매에 구멍을 내고 산란관을 꽂아 알을 낳는다. 설익은 도토리의 단단한 껍질을 뚫기 위해서 반나절을 꼬박 주둥이를 쳐 박고 돌고 또 돈다. 그렇게 뚫은 도토리가 과육이 영 시원찮으면 과감히 포기하고 더 맛있는 도토리를 찾기도 한다.

자식에게 최선의 밥상을 차려준 다음에는 안전히 땅으로 안착시키는 과정을 밟는다. 곧 다가올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동면을 해야 하는데, 나무에 매달린 채로는 어린 애벌레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의 안전한 생을 위해 엄마 도토리벌레가 대신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도토리벌레는 알을 낳은 뒤, 열매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의 가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나뭇잎을 몇 장 매달고 떨어뜨려야 충격이 완화가 돼 애벌레가 다치는 일이 없기 때문. 그렇게 입으로 톱질하는 데 또 한나절을 보낸다.

그렇게 도토리거위벌레는 산란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식의 생을 위해 일하고 또 일하다, 마침내 자식을 부드러운 흙모래 위로 안전히 보내고서야 여생을 마무리한다.

지구 온난화로 거위벌레 유충 증가, 야생동물의 식량 위협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가지
▲ 도토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가지
ⓒ 박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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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벌레의 이기적인 모성을 응원하듯 지구 온난화가 그들의 '인구 늘리기 정책'을 열심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겨울철 온도가 예년에 비해 상승하면서 거위벌레의 동면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것.

때문에 해마다 거위벌레 유충들의 탄생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벌레들이 성충이 돼 또 도토리를 자르고 자르다 보니, 이제는 다람쥐나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가을철 식량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구 절벽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시샘하듯, 해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박멸에 나섰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증가에 가장 피해를 입는 동물은 다람쥐다. 동면을 위해 부부가 합심해 땅 속에 굴을 파고 해마다 도토리 수백 알을 모으는데, 거위벌레 유충이 갉아먹고 남은 텅 빈 껍데기 도토리뿐이니 창고 채우기가 퍽 힘든 것.

백운산 도토리 가지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다람쥐의 닭똥 같은 눈물도 한 방울 떨어지니, 다람쥐는 올 겨울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다.

산림청에서는 7-8년 전부터 거위벌레 발생에 따라 도토리 결실률이 해마다 떨어지는 것에 대응해 방제 대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온난화가 가중되는 한 거위벌레의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은 계속 될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람쥐가 하룻밤 식량이라도 더 비축할 수 있도록,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오지 않는 것 뿐.

실상, 제 자식 많이 낳고 배불리 먹이겠다는 도토리거위벌레를 어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저 본능이고, 생태계의 일환일 뿐. 거기에 인간이 만든 온난화가 불균형을 초래하며 부채질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굴 탓할 수 있으랴?

절단된 도토리 가지
▲ 도토리 절단된 도토리 가지
ⓒ 박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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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양 백운산,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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