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임춘애 육상선수

'88 서울올림픽에 앞서 '86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열렸다. '86 아시안 게임은 '88 서울올림픽 예행연습과도 같은 매우 중요한 대회로서 대축제 속에 개막됐다. 이 대회에서 임춘애라는 육상선수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는 한국 육상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여자 육상 800미터, 1500미터, 3000미터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육상 3관왕'의 쾌거를 이뤘다.

그러자 임춘애 선수는 '86 아시안게임에서 마침내 '신데렐라'로 화제의 초점이 됐다. 그는 애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선발전 이후에 치러진 전국체전의 3000미터 종목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자 그를 국가대표로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뒤늦게 국가대표에 합류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 당시 임 선수의 3000미터 기록은 중국선수에게 10초 이상 뒤진지라 코치진은 금메달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당시 중국 선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데 견줘 임춘애는 그 경기에서 잠재력이 폭발해 예상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임 선수는 800미터 경기에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1위를 기록한 인도 선수가 파울로 실격당하자 2위였던 그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임 선수는 1500미터에서도 기염을 토해 마침내 금메달을 따내면서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업을 이룩했다.

그가 많은 사람에게 준 교훈은 실력을 갖추고 묵묵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점이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가장 감동을 준 대목은 800미터 경주에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후, 1위 선수의 파울로 금메달을 획득한 장면이었다.

골프장 경비소대

그 시절 소대본부 인원이다(앞줄 왼쪽부터 향도 안 하사, 신임 기재계 김학수 일병 전령 오 이병 뒷줄 왼쪽부터 기재계 김덕중 병장, 기자, 소대선임하사 박영삼 중사. 1969. 10.)
 그 시절 소대본부 인원이다(앞줄 왼쪽부터 향도 안 하사, 신임 기재계 김학수 일병 전령 오 이병 뒷줄 왼쪽부터 기재계 김덕중 병장, 기자, 소대선임하사 박영삼 중사. 1969. 10.)
ⓒ 박도

관련사진보기

1969년 6월 하순, 내가 보병 제26사단 보충대에서 실무교육을 받을 때였다. 사단의 한 참모는 부대현황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단에는 한양컨트리골프장 경비소대도 있다고 하여, 동기생들이 그곳 파견근무를 매우 동경한 적이 있었다.

부대이동을 하자 그 골프장 경비소대가 바로 우리 중대 관할이었다. 그런데 1소대가 지난번 진관사 들머리 부대에서도 비봉 파견 근무를 한 데 이어, 이번에도 골프장경비소대로 파견을 나갔다.

내가 중대장에게 이를 불공정한 처사라고 따지자, 그는 대대장의 지시라고 슬그머니 화살을 피해갔다.

하지만 우리 소대 내무반장을 비롯한 소대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소대장과 중대장은 같은 간보 출신의 선후배 사이인데다가, 평소 1소대장의 잦은 상납 결과라고 쑥덕거리며 나의 다부지지 못한 처신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원당 부대로 이동한 뒤에도 우리 2소대는 계속 중대본부에 남아 경계근무와 교육을 오지게 받고 있었다.

마침내 파견 소대장이 되다

그런 가운데 대대 공용화기 집체교육이 끝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중대장은 1, 2소대 파견교체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에 우리 소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소대는 즉각 관물과 사물들을 지참하고 중대에서 4km가량 떨어진 한양컨트리골프장 옆 경비소대로 이동했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자 1소대는 풀이 죽은 채 소대선임하사인 송 중사 인솔로 중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1소대장 한 소위가 보이지 않았다. 내무반장 안 하사가 1소대 송 중사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왔다. 한 소위는 전날 후방부대로 전출명령이 나서 이미 그쪽으로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소대 교체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그 진상인즉, 1소대장 한 소위가 대민사고를 저질렀다. 경비소대 언저리에 사는 아가씨를 강압적으로 자기 BOQ에 데려다 성폭행을 했는데, 그 아가씨 동생까지도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 부모가 헌병대에 진정을 넣어 한 소위는 연행 수감된 뒤 피해자와 합의를 보자 석방 즉시 후방으로 곧장 전출시킨 모양이었다. 

그 이전에도 한 소위는 알코올 중독자로 매끼마다 막걸리 한 사발을 든 뒤에야 밥숟갈을 든다는 얘기가 돌았다. 게다가 그는 걸핏하면 소대원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강철 중대장은 그를 끝내 자기 후배라고 끼고 돌면서 수시로 특혜 파견에 따르는 상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진상을 알고 나니까 씁쓸했지만 그래도 묵묵히 기다린 보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 하사는 입을 함박처럼 벌이며 한 마디했다.

"오래 살다보면 시에미 구정물통에 빠져 죽는 것도 본다고 하더니, 참말로 그 말이 맞네예." 
"야, 너무 좋아하지 말아.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게 인생이니까."
"알았심더. 입을 암만 다물라 케도 벌어지는 걸 우얍니껴." 

쌀밥 급식

파견 소대장은 부대운영에 권한은 많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막중하기 마련이다. 나는 부대이동 후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키고 단단히 교육시켰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경계근무는 철저히 서고, 교육도 정한 시간에 철저히 할 것이다. 근무나 교육 외 자유시간은 철저히 보장하겠다. 특히 위생관념에 철저히 하고, 군복은 자주 빨아 입을 것이며, 겉옷은 풀을 먹인 다음 다림질해서 폼나게 입는다."

이후 소대원들은 그 지시를 잘 따라 주었다. 소대 연병장에 배구 코트를 만들어 거의 매일 여가 시간에는 분대별로 배구대회를 열었다. 배구장 네트는 새끼줄로 엮었고 그 네트를 다는 기둥은 서까래를 구해다 세웠다.

어느 하루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는 골프장 캐디가 소대연병장에다 쪽지를 던지고 갔다. 그 쪽지에는 부대가 바뀌고 난 뒤 군인들이 말쑥해졌다는 사연과 함께 자기들을 향한 군인들의 유치한 야유도 훨씬 줄어들었다고 썼다. 나는 그 쪽지를 소대원에게 낭독한 뒤 골프장 캐디를 향한 유치한 야유는 더욱 자제케 했다. 그 말에 소대원들은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여기 가시나들은 금테 둘렀나. 머스마들이 가시나 보고 좋다하는 히야까시(희롱) 정도는 어데나 다 있는 게 아이가?"
"장 하사님! 여기 캐디들은 높은 사람만 상대해서 우리같은 깡통계급장들은 쳐다보지도 않은께 괜히 헛물 켜지 마시오."

당시 한양컨트리골프장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들이 자주 들나들었다. 그래서 골프장 외곽에 경비소대까지 생겼던 것이다.

부대이동 후 기재계는 소대원들이 배불리 먹어도 1종(쌀)이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매끼마다 쌀 배합 비율을 높이고, 보리쌀은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혼식을 하지 말고, 쌀만으로 밥을 짓게 했다. 당시 기재계는 송탄 쑥고개 출신의 김덕중 병장이 맡고 있었다. 소대 기재계는 군 편제상 공식적인 직명은 없지만 일종의 소대 서무병으로 소대 행정, 보급, 근무자 명단 작성 등 모든 행정을 최일선에서 집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그의 부하가 되고 싶다

그 무렵 김 병장은 제대말년이었다. 소대 선임하사 박 중사는 그 후임으로 나의 고교 동기동창인 김학수 일병을 기재계로 추천했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가 말했다.

말단 소총소대에서 만난 고교동창 김학수 이병(왼쪽)과 함께 막사 앞에서(1969. 10.)
 말단 소총소대에서 만난 고교동창 김학수 이병(왼쪽)과 함께 막사 앞에서(1969. 10.)
ⓒ 박도

관련사진보기

"소대 내 학벌도 제일 높을뿐 아니라, 인간성이 좋습니다." "내무반장과도 상의했소?"
"그럼요. 사실은 향도 안 하사가 먼저 나에게 추천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학수 일병을 불렀다. 나는 그에게 우리 두 사람 처신을 전 소대원이 늘 주시할 테니 각별히 서로 조심하자고, 그게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저도 그 점이 부담스럽지만, 염려 마십시오. 여기서 우리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소대장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매사 조심하겠습니다."

그는 나와 헤어질 때까지 군 복무 중 단 한 번도 나에게 말을 낮추거나 특혜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사적인 청탁을 하거나 소대원의 비위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나 때문에 보급품 지급에도, 잠복근무에도 솔선수범했다. 나는 그의 공정성과 투명성으로 소대원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몇 해 전 동창회 명부에서 그의 이름 옆에 작고 표시를 보는 순간 울컥했다. 곧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깊이 고개숙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같은 소대에서 근무하면서도 공사를 분명히 가렸던 참 괜찮은 친구였다. 저승에 가면 꼭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친구로, 이번에는 내가 그의 부하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만큼 공사를 잘 가릴지 모르겠다.

[관련기사] 동창회 명부에서 옛 전우의 소식을 듣다

연대장 불시 방문

어느 하루 연병장에서 배구시합을 하고 있는데, 연대장 지프차가 소대연병장에 갑자기 멈춰 섰다. 연대장(김도명 대령)의 예고없는 불시 방문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동안 연습해 둔 소대현황을 브리핑했다. 그 브리핑이 끝나자 연대장은 불쑥 소대 내무반으로 가더니 총가에 세워둔 M1소총을 무작위로 한 자루 짚더니 총구를 살폈다.

"병기 수입(手入, 손질)이 잘 됐군. 내무반 환경도 깨끗하고. 소대장!"
"네. 연대장님."
"요즘 막걸리 한 말 얼마 가나?"
"…."

연대장은 지갑을 꺼내더니 1만 원을 내게 건넸다.

"소대원들 회식비에 보태 써라."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연대장 지프차가 떠나자 소대원들은 모두 나를 향해 거수 경례를 했다. 대대장, 연대장이 각 파견소대에 불시 점검을 나가는 경우 소대장들이 깨지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식비까지 주고 갔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 사람의 인연은 얽히고 설킨 듯 나는 그 연대장 아들을 1976년 이대부중 부임 첫 해에 가르쳤다.)

김도명 연대장 아들 김윤동 군 이대부중 졸업식날 교사 현관 앞에서(왼쪽부터 기자, 연대장 부인, 김윤동 군, 이대부중 송경호 선생, 담임 이주원 선생 1977. 2.)
 김도명 연대장 아들 김윤동 군 이대부중 졸업식날 교사 현관 앞에서(왼쪽부터 기자, 연대장 부인, 김윤동 군, 이대부중 송경호 선생, 담임 이주원 선생 1977. 2.)
ⓒ 박도

관련사진보기


아름다움과 행복은 짧다고 했다. 그해 가을이 깊어지자 사단 최전방 부대와 부대교체 소문이 돌더니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그 이동명령에 우리 소대원은 모두 납덩이처럼 표정이 굳었다. 그 침묵을 깨고 누군가 말했다.

"까라면 까야지 우리 같은 깡통계급장들은 뭐 별 수 있나유."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