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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성 지도. 흰 선이 성벽, 푸른 선이 현재의 군 부대 경내, 주황색 선이 등산로를 표시한다.
 문학산성 지도. 흰 선이 성벽, 푸른 선이 현재의 군 부대 경내, 주황색 선이 등산로를 표시한다.
ⓒ 인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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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성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1호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문학산성의 주소를 인천광역시 남구 소성로282번길 56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개는 매우 특별하다. 문화재청이 보통 문화유산의 주소를 소개하는 방식과 아주 다르다.

문학산성 둘레길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들은 자신의 주소를 문학동 산27-1로 소개한다. 실제로도 문학산성은 이 주소에 있다. 하지만 이 주소를 들고는 문학산성을 찾지 못한다. 문학동 산27-1은 문학산 전체의 주소인 까닭이다.

산성은 자체 번지로는 못 찾아... 등산로 입구 지번 알아야

문화재청의 소성로282번길 56은 문학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입구 중 한 곳이다. 즉, 문학산성이 산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주소는 산성의 주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이 문학산 비탈 중 한 지점인 이 주소를 문학산성의 위치라고 소개하는 것은 등산로 입구인 이런 지번을 알아야 문학산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산성 성곽
 문학산성 성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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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로282번길 56보다 문학산성으로 가는 더 좋은 출발 장소는 문학길70번길 70 지점이다. 제2경인고속도로 위에 가로질러 얹혀있는 다리를 건너면 닿는 곳이다. 여러 채의 집이 있고, 그 앞에는 작은 주차장도 있다. 다만 버스는 그곳까지 갈 수 없다.

등산로 입구에 '비상시 벨을 누르세요. 남구청 CCTV관제센터 880-8742. 긴급 상황시 비상 버튼을 누르면 CCTV 상황실과 통화됩니다'라는 알루미늄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러나 칡넝쿨에 반쯤 묻혀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문학길70번길 70 주소판이 보이는 집 안으로 들어선다.

<문학산의 유래>가 적힌 문학길70번길 70의 낡은 현수막
 <문학산의 유래>가 적힌 문학길70번길 70의 낡은 현수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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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탕에 흰 글씨가 인쇄된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건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이 현수막은 '문학산의 유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런 현수막이 이곳에 있는 것은 여기가 문학산 등산로의 들머리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현수막을 읽어본다.

'문학산은 남구 문학동, 관교동, 선학동, 연수동, 학익동, 청학동에 접한 명산이며, 산 정상에는 석성(石城)이 있는데 옛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 왕자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고 미추홀(지금의 인천)국을 세우고 도읍을 정한 2천년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문화권인 인천의 발상지입니다. 또한 이곳은 산기슭에 서원이 있었고, 이곳에서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고……'

문학산은 인천 2000년 역사를 간직한 곳

그 아래는 현수막이 찢어지고 빛이 바래있어 글자를 읽어낼 수가 없다. '안관당'과 '문학당(文鶴堂)'이라는 글자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안관당(安官堂)은 왜란 당시 문학산성에서 적에 맞서 지역을 지켜내지만 전투 중 병사한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안관당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문학산성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무찌른 인천부사를 기려 백성들이 세운 사당 안관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사진은 문학산성 등산로에 게시되어 있는 안관당 터 추정 광경이다.
 문학산성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무찌른 인천부사를 기려 백성들이 세운 사당 안관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사진은 문학산성 등산로에 게시되어 있는 안관당 터 추정 광경이다.
ⓒ 인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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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왕자에 관심이 쏠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는 북부여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태가 죽은 뒤 소서노는 졸본으로 옮겨와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재혼했다. 그런데 주몽의 본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왔다.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고 말한다. 이윽고 비류와 온조는 한강 일원에 당도한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한다. 신하들이 '이곳 하남(河南, 한강의 남쪽)은 북으로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 비옥한 들판이 있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있는 천혜의 준 도읍지입니다.' 하고 말렸지만 비류는 듣지 않는다.

비류는 미추홀(인천)로, 온조는 한강 이남 위례성으로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온조는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온조의 십제는 나날이 번창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터를 잡았다. 그러나 미추홀은 토지에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안하게 살 수가 없었다. 결국 비류 일행은 위례로 돌아왔고, 비류는 후회에 빠져 살다가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온조를 따르게 되었다고 해서 십제는 백제(百濟)로 바뀌었다.

문화재청 누리집도 문학산성에 '미추홀 고성(古城)'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을 소개한다. 문학산성은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싸 성벽을 구축한 테뫼식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총 577m, 현존하는 부분은 339m,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부분은 220m이다.

문학산 등산로 입구에서 보는 민속신앙의 흔적
 문학산 등산로 입구에서 보는 민속신앙의 흔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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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길70번길 70에서 시작된 등산로에는 줄곧 '안심 등산로' 리본이 나무에 달려 있다. 리본에는 '경찰이 함께 합니다, 즐겁고 안전한 산행, 남부경찰서 문학지구대'라는 글이 쓰여 있다. 리본마다 다른 번호를 매겨둔 것은 혹 위험 상황이 발행했을 때 위치를 정확하게 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리본 번호를 세다보면 어느덧 삼거리가 나타난다. 소성로282번길 56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맞닿게 되는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보인다. 하지만 이미 왼쪽의 나무 계단에 현혹되어 있는 탓에 발걸음은 저절로 좌회전을 해버린다. 둥글둥글한 나무토막들로 의자를 만든 쉼터가 있고, 그 끝에 '고마리 길'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서 있다.

고마리 가득 자라난 문학산 북쪽 등산로

안내판은 '고마리는 물가에 덩굴져 자라며 8∼9월에 꽃피는 한해살이풀이다. 흰색 또는 분홍색의 꽃이 여러 개 모여서 핀다. 오염된 물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풀이라고 해서 고마리라 한다.'라고 소개한다. 과연 오솔길 좌우가 온통 고마리 천지이다. 물가에 덩굴져 자란다는 풀이 왜 이렇게 산길에 많을까?

아마도 이쪽 등산로가 산의 북쪽에 있기 때문일 듯하다. 북쪽 비탈은 그늘로 덮여 있는 시간이 많으므로 습기가 짙을 것이고, 따라서 남쪽 비탈에 견줘 고마리 서식에 적당한 조건이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로 문학산의 남쪽 산비탈은 고마리가 아니라 칡넝쿨로 가득 차 있어, 여름철에 답사해서는 성벽 유적을 실감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산성 흔적으로 올라가는 길
 산성 흔적으로 올라가는 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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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종원의 <한국식물생태도감>은 고마리의 이름이 '물을 깨끗하게 해주는 고마운 이(풀)'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김종원은, 수질 정화라는 기능적 결과를 인식한 끝에 고마리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식으로 식물에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수질정화라는 개념은 한 사람이 적어도 수년 동안 똑같은 일을 관찰함으로써, 즉 고마리에 대한 연구 활동을 통해서만 그 기능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마리는 논밭에 물을 대거나 빼는 좁은 도랑 '고'와, 심마니, 똘마니 등에 쓰이는 '만이(생명체)'의 합성어인 듯하다. 고마리를 물기가 많은 곳에 잘 자라는 풀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인천부사 김민선, 문학산성에서 왜적 격퇴

아무튼 고마리가 무성한 오솔길을 15분 가량 걸으면 문학산의 능선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문학산성 둘레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능선 너머 남쪽 산비탈을 거의 수평으로 걸으면서 산성 흔적을 위로 쳐다보는 길이 바로 문학산성 둘레길이다.

문학산은 정상 둘레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걸어다닐 수 있는 지형이 못 된다. 그래서 산성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인천시는 계곡을 짓는 다리를 곳곳에 가설하여 담사자들이 산성 흔적을 잘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물론 이 다리들은 시민들의 등산로로 활용되기도 한다.
 문학산은 정상 둘레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걸어다닐 수 있는 지형이 못 된다. 그래서 산성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인천시는 계곡을 짓는 다리를 곳곳에 가설하여 담사자들이 산성 흔적을 잘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물론 이 다리들은 시민들의 등산로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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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은 남쪽 비탈이 험악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에 둘레길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따라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며 걸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인천광역시 기념물 1호인 문학산성 성벽 흔적이 언제 어느 곳에서 불쑥 나타날지 알 수 없으므로 잘 살펴가면서 걸어야 한다.

물론 곳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도 잘 읽어보아야 한다. 그중에는 문학산(文鶴山)의 유래를 설명해준 안내판도 있다. 인천서원이 1708년(숙종 14) 학산(鶴山)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되자 서원 이름에서 '학'을 따고, 공자를 섬기는 사당 문묘(文廟)에서 '문'을 가져와 '문학'으로 결합시켰다는 해설이다.

문학산성의 성벽
 문학산성의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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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문학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 김민선이 왜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해낸 전쟁 유적지이다. 김민선은 전투 와중에 병사한다. 그 후 지휘권을 이어받은 김찬선(金纘善)이 끝까지 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멀리 부여에서 내려온 비류 왕자의 애환이 깃든 곳, 임진왜란을 맞아 김민선을 비롯한 인천 사람들의 피땀이 서린 곳, 바로 그 문학산성에 지금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문학산은 진정 인천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인천의 진산(鎭山)인 것이다.

하지만 문학산성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저 멀리 부여에서 남하해온 비류 왕자의 자취가 서린 문학산, 김민선과 김찬선을 비롯한 인천의 선조들이 목숨 바쳐 왜적과 싸웠던 문학산성, 이곳은 결코 인천 사람들만 알고 대부분 국민들은 몰라도 무방한 그저그런 역사유적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문학산을 오른다.


태그:#문학산, #김민선, #비류, #임진왜란, #김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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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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