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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보다 더 빛나는 '고시 패스'

몇 해 전 경상도 지역의 명문가들을 답사하면서, 어느 저명한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형편임에도 막힘없는 언변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서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났다.

그의 집 거실 벽에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옳음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보다 명문가의 종손임을 더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가문에 대한 이야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고 지금도 꾸준히 고위공직자와 대학 교수 등을 배출하고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내로라는 가문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음덕'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적인 직위와 실명을 하나하나 거론하기도 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은 뒷방 구석으로 밀려나고 근래 가문이 배출한 '능력자'들의 면면이 주요 화제가 돼버렸다. 현재의 위세가 과거의 기억을 압도해버린 셈이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단어는 단연 '고시 패스'였다.

합격한 기수까지 또렷하게 기억해낼 만큼, 그에게 '고시 패스'는 '가문의 영광'과 동의어였다. 옛 영화에 기대어 허세만 부리는 여느 곳과는 근본부터 다른, 권위와 실력을 두루 갖춘 가문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어색했던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 국민을 개돼지로 표현해 전 국민의 분노를 산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때문이다. 그는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로 행정고시를 패스한 후, 교육부 내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만약 그가 몇 해 전 만난 독립운동가 가문의 후손이었다면, '능력자'들 중 한 명으로 자랑스럽게 소개됐을 게 틀림없다. 곧, '실력을 갖춘' 가문의 증거로 그 역시 거론됐을 거라는 이야기다.

고시 출신이 힘을 발휘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행복한가

지금 나향욱 전 기획관을 두고 실력을 갖췄다고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다수 국민들은 그가 '실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공직자로서 그것을 올곧게 사용할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긴다.

'인성'이 결여된 '실력'은 그저 '흉기'일 뿐이며, 그런 자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의 고위공직자에 오르는 순간 국가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됨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바다.

그런데, 여기서 '실력'이 '인성'과 대별되는 개념인지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전임 대통령 선거 때의 가슴 아픈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온 사회가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나누는 가운데,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어도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자위하며 도덕적이지 못한 대통령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켰다. 그를 선택한 결과는, 현 대통령이 악화시킨 면이 적지 않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헬조선'의 모습 그대로다.

'가문의 영광'으로 우러르는 고시를 통해 이 땅의 최고 실력자를 뽑는다는 전제는 과연 타당한가. 법원과 검찰의 경우 고시가 '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니 두 말할 필요도 없고, 국회와 정부에도 고시 출신이 수두룩한 지금, '최고 실력자'인 그들이 힘을 발휘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행복한가.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고시의 존재 이유에 대해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99% 개돼지들'에게 고시는 진정 어떤 의미인지 심사숙고해봐야 할 때다.

이렇듯 우리는 '인성'이 곧 '실력'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젠 '고시 패스'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입신양명한 이들의 '행적'이 어떠한가를 따져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얼마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느냐 보다 공복으로서 국민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실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직급은 어디까지나 숫자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고시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강한 건 무슨 까닭일까.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거지만, 하나는 또 하나의 '로또'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하다'는 맹목적인 인식 탓이다.

수많은 폐해가 양산되면서 로스쿨 등 고시를 보완하고 대체할 다양한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지만, 그때마다 반대의 목소리가 완강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곧, 그 둘은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일 수밖에 없다.

공정하려면 직업에 대한 자질과 품성이 고려돼야

고시는 인생역전의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로 여겨져 왔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 자식'이 출세하려면 고시밖에 없다는 건 국민들 머릿속에 만고불변의 진리로 굳어졌다.

지금껏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량진 등지에서 수험서적들에 파묻혀 기약 없는 전쟁을 벌이는 건, 흡사 '로또'를 긁고 혹시나 하며 일주일을 기다리는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헛된 바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수 년 동안 '고시낭인'으로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합격해 판검사와 고위공직자가 됐다고 하자. 과연 그는 맨 먼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로또로 대박이 난 사람들 거개가 느닷없는 돈벼락에 취해 갈피를 못 잡듯, 하루아침에 내로라는 벼슬길에 오른 그들이 '초심'을 기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는 언명은 주체할 수 없는 권력의 달콤함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고시가 '로또'로 여겨지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생사 여부와 미래세대를 길러내는 교육 정책 등이 '노량진에서의 경험'만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거칠게 말해서, 다양한 학문과 경험을 쌓은 이들이 전문적인 분야에 진출해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는 데에 기존의 고시 제도는 장애물이 되어왔다. 법조항에 대한 정교한 기억이라면 몰라도, 국민의 공복이라는 투철한 직업윤리는 수험서적 속 지식만으로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공정하다'는 편견도 섣부르긴 마찬가지다. '알파고'와 '포켓몬 고' 등 최첨단 과학기술이 속속 등장하는 시대에 고작 단 한 번의 암기 시험으로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더욱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년까지 보장되는 '철밥통' 자리이니, 조금이라도 공정성에 의심이 가면 존폐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제도다. 대안으로 마련된 로스쿨이 국민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정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다. 이를 고시에 적용하면, 특별한 자격 제한 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고, 계량화된 점수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법고시의 경우, '개천에서 용 났던' 과거의 집단 기억에다, 웬만한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입학조차 힘들다는 로스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한 탓에, 어이없게도 공정하다는 것이 고시의 가장 큰 장점처럼 받아들여지게 됐다.

적어도 공정하다고 평가받으려면 선발하려는 직업이 요구하는 자질과 품성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옳다. 다시 말해서, 공정한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임용고시라면 법관과 공무원, 교사로서의 자질과 품성, 곧 진짜 실력이 해당 시험을 통해 충분히 담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법고시 성적으로 올바른 법관을 판별할 수 없고, 임용고시에서 1등을 했다고 아이들로부터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고시는 지식의 질과 가치관을 판단하기엔 부적합하다

애초 고시는 지식의 '양'과 '정확성'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선발 제도다. 정작 요구되는 지식의 '질'과 '가치관'을 판단하는 도구로는 애초 부적합하다는 이야기다. 그러하기에 절대 다수가 고시 출신들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법조계와 관계, 교육계가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고시가 공정하다는 생각은 그저 계량화된 점수가 주는 집단적인 착각에 불과하다. 백 보 양보해서, 어떻든 응시 기회는 열려 있으니 공평하다고 여길지는 몰라도, 결코 올바르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학교 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 고시가 안고 있는 갖가지 부작용이 수능과 같은 입시제도가 지닌 문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공감하고 싶었다. 고시가 올곧은 심성을 지닌 공직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는커녕 그들만의 강고한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장치로 자리 잡아가는 현실을 통해, 반면교사 삼아보자는 뜻이다.

학벌구조가 온존한 현실에서 수능 역시 '로또'고, 어떻든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 종합전형(이하 학종)에 견줘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

수능과 내신, 심지어 학종조차도 아이들의 진짜 실력을 판별하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대학입시에서 오로지 계량화된 점수로만 선발하려는 수능 및 내신과는 달리, 학종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교과별 성적을 '참고'하는데다 더욱이 부유층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공정성을 의심 받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적성과 흥미, 재능 등을 반영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양상만 놓고 보면, 고시와 로스쿨 사이의 갈등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 어떤 분야든 답은 현장에 있는 법이다. 대학입시 등 교육제도가 아이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에 그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요즘 아이들을 두고 두 가지의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곤 한다.

하나는 '단군 이래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라는 찬사고,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려들지 않는 무기력한 아이들'이라는 꾸지람이다. 물론, 두 그룹이 한 교실에서 공존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아이들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농무' 같은 시를 쓰는 재능보다, 시험문제 푸는 재능이 훨씬 중요

언뜻 당연하다 싶은 이야기지만, 비록 공부는 못해도 출중한 재능 하나쯤은 가진 아이들이 주변엔 의외로 많다. 흔히 '덕후'라고 불리는 아이들로, 관심 있는 분야는 교과 교사를 능가할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기술을 뽐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서너 과목의 점수를 합해야 겨우 100점에 이를 정도로 공부엔 아예 관심이 없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당찬 아이도 있고, 다들 꺼려하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을 만큼 마음씨 좋은 아이도 있다.

일찍 하교한다는 이유로 학기 중 보다 시험기간을 더 좋아하고, 짬만 나면 엎드려 잠을 자지만, 운동장에선 돌연 '메시'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특정 분야에선 웬만한 전문가 뺨치는 유시시(UCC)를 제작해 주위를 놀라게 하는 아이도 흔하다.

또, 비록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쉬운 수학 문제에는 쩔쩔매지만 그 어렵다는 스도쿠 퍼즐은 귀신 같이 숫자를 찾아내고, 국어 성적은 바닥이지만 외부 경시대회에 습작해온 시를 출품해 수상한 아이도 있다.

이들 역시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재목들임에 틀림없지만, 그러한 그들의 자질과 품성을 대학입시에 그대로 반영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계량화시키기 어려운 탓이다. 얼마 전 '인성'을 점수로 환산해 등급화하려는 정부의 발표에 탁상행정이라며 엄청난 반발이 일기도 했다.

도덕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이라 단정할 수 없지만, 시험을 통해 도덕적 인간으로 평가받으려면 무조건 도덕 점수가 높아야 한다. 아무튼 그래야 '실력'으로 공인받을 수 있다.

시험을 조롱할 때마다 푸념처럼 꺼내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신경림 시인과 그의 작품 <농무>에 대한 이야기다.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수능과 모의고사에 단골처럼 출제되는 작품인데, 정작 시를 쓴 작가가 문제의 정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당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면서, 자신은 시를 쓰는 것보다 시험문제를 푸는 게 몇 배는 더 어려웠다고 토로했다는 시인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조하곤 한다. "<농무> 같은 작품을 쓰는 재능보다, 관련된 시험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실력이 우리에겐 훨씬 더 중요하고 절박하다"고. 진짜 재능과 계량화된 성적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아이들도 이미 눈치를 챈 것이다.

이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는 결코 <농무>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 나올 수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기도 하다. 이에 교사는 그들 앞에서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유구무언이다.

아무리 문학적 소양과 감성 풍부해도 국어점수 낮으면 국문과 못가

어렵기만 할 뿐, 논리적 사고를 키우지 못하는 수학이 수많은 아이들에게 버림받았듯이, 작품의 감상과 표현 능력을 길러주기는커녕 또 하나의 문제풀이 과목으로 전락한 국어 역시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비단 수학과 국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십 년 넘게 배웠어도 외국인 앞에선 말 한 마디 못하는 영어도 그렇고, 사회, 과학을 넘어 심지어 교양 교과라는 음악, 미술, 체육 교과에서조차 진짜 재능과 '실력' 사이에 불일치가 엿보인다. 말하자면, 계량화된 평가의 분명한 '한계'이자 '덫'이다.

이는 나아가 '덕후' 아이들의 자존감에 지속적으로 생채기를 내고 있다. 현실적으로 국어 점수가 낮으면 아무리 문학적 소양과 감성이 풍부해도 대학의 국문과에 진학하기가 어렵고, 논리적 사고 능력이 뛰어나도 일단 수학 성적이 변변치 않으면 대학 진학이 쉽지 않다.

그깟 점수 하나 때문에 의기소침해져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포기하는 아이들도 있고, 점수에 맞추다 보니 엉뚱한 전공을 선택한 후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여럿이다.

더욱 큰 문제는 오로지 점수를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게 '미화'된다는 점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가장 중요한 입시전형자료인 학생부는 점수에 따라 나머지 기록사항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

예컨대, 국어 성적이 좋으면 문학적 소양이 남다르게 묘사되고, 수학 점수가 높으면 논리적 사고 능력이 탁월하다고 기록된다. 대개는 국어를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잘하고, 심지어 음악, 미술, 체육 점수도 높다보니, 적어도 학생부에 기록된 그 아이는 이미 '초능력자'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식의 생각에서인지, 심지어 인성과 장래성 등 나머지 모든 특기사항도 점수가 높은 아이에게 몰아주는 게 다반사다.

더욱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명문대에 더 진학시켜야 하는 일선 고등학교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교사가 학생부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높은 점수는 재능과 적성, 흥미와 인성까지도 추동하는 '도깨비 방망이'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는 아이들도 시나 소설을 읽기보다 당장은 국어 문제풀이에 매진해야만 한다. 점수가 낮아서는 자신의 재능과 흥미를 대학에 증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재능과 적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령일진대, 대학입시라는 현실에 휘둘려 되레 그것을 억제하는 꼴이니 교사로서도 참담하기 그지없다. 재능과 점수의 불일치가 가져온 슬픈 현실이다.

억측이지만, 우리나라가 노벨상과 인연이 닿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실력을 반영하지 못하는 획일적인 정량평가와 그것을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뿌리 깊은 인식, 게다가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조차 주눅 들게 만드는 온존한 학벌구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최악들의 교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는 개선책이 늘 개악으로 귀결되고 마는 냉소까지 겹치면서 우리 교육은 어느덧 '국민적 트라우마'가 돼버렸다.

계량화된 성적으로는 아이들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

요컨대, 계량화된 성적으로는 아이들의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 일부 광역자치단체 교육청 단위에서 선다형 지필고사를 없애고 서술형 수행평가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획과는 달리 시행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우선 현장 교사들의 공감과 자발적 동의가 선행되어야 하고, 학급당 학생 수가 대폭 줄어야 한다. 학생 수의 자연 감소를 기다릴 게 아니라면, 당장 적잖은 교육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인생이 이 '한 방'으로 결정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수능도 어느덧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종의 확산이 재촉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수능으로 아이들의 실력을 더 이상 판별해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총천연색'의 21세기 아이들을 20세기에 어울릴 '흑백' 시험으로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아닌 게 아니라, 수능은 1994년에 시작됐지만, 지금 고등학생들은 대개 2000년 즈음에 태어난, 이른바 '밀레니엄 세대'다.

수능을 비롯한 대부분의 평가 방식인 선다형 시험을 지금껏 '객관식'이라고 불러온 건, 그런 방식이 공정하다는 오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들의 실력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또 학습 내용을 되짚어보는 계기로 작용하는지 등 정작 중요한 평가의 본질에는 지금껏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다.

선다형 시험의 비중을 줄이고 서술형 시험을 늘리는 등 과도기적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학에서 점수와 등급을 요구하는 한 서술형 시험도 계량화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다. 아이들 개개인의 꿈과 재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 시스템이 고민되어야 한다. 무릇 평가란 배움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하고, 멈추지 않고 배움을 이어가려는 성찰의 힘을 북돋울 수 있어야 한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분풀이하듯 교과서를 찢고, 고시 합격과 동시에 손때 묻은 수험서적을 내다버리는 평가 방식은 가치를 지향하는 교육의 본령을 심각하게 왜곡해왔다. 시험은 몰라도, 인생은 결코 '한 방'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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