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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 책표지.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 책표지.
ⓒ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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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한 계기로 여행의 맛을 알기 시작하면서 지난날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음이 후회되곤 했다. '이제라도 어디든, 함께 가보자'건만 그림의 떡처럼 쉽게 이룰 수 없는 그런 일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밥 한 끼 함께 먹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지라 '손자를 위해 떠난 70일간의 배낭여행'이란 부제의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푸른길 펴냄)는 제목만으로도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못 가본 곳이 많다. 아이들과 간 곳이랬자 손에 꼽을 정도다.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못 가본 유럽이다. 이런데 '여행의 맛을 알기나 할까?' 싶은 어린 손자와 함께라니 먹고 사는 일로 허덕이며 사는 내가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별별 추측들이 들었다. '세상 걱정할 일이 없이 잘 사는 한 노부부가 유럽 여행 가는 길에 손자를 데려간 것일 거야. 여행기들이 워낙 많이 나오니 좀 특별해 보이려고 (출판사가) 배낭여행 운운하며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간 손자를 내세운 것일지도 몰라. 아니지, 푸른길(출판사)이 책 좀 더 팔자고 그럴 리 없지!' 이처럼.

하지만 내 이런 추측들은 저자 프로필과 서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어떤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70대 할머니인 저자가 32개월 된 손자를 데리고 배낭 유럽여행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 6쪽짜리 서문 한 줄을 읽다가 내 어떤 날이 떠올라 울컥해졌다. 

나와 달리 손자는 꼭 갖겠다는 간절함을 지녔다. 마음에 든 물건을 갖겠다는 일념이다, 흥미와 필요에 따라 아이는 행동한다는 루소의 말이 떠오른다, 손자의 작은 행동에 큰 가르침의 원리가 들어있다. 인생을 살아본 부모는 이미 좋고 나쁨의 효과적인 것을 안다. 하지만 어린 자식은 흥미 쪽으로 흐른다. 이 두 관점이 충동할 때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 양육의 질이 달라진다. 내가 놓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쁘게 살면서 항상 효과를 생각하고 앞장서서 선택하고 결정하며 가르치려 했다. 이끌어주려 한 것이 결국 아이의 손발을 묶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놓고 스스로 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좋은 생활습관 운운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에서.

이 부분을 읽는데 낯익은 상황이 떠올랐다. 자식보다 더 많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인 자신의 판단이나 선택이 정답이라며 자식에게 따르길 강요하는, 그로 빚어지는 부모-자식간의 갈등, 그런 상황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어떤 날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둘째가 응급처치를 받아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을 겪은 후 '자식은 어떤 모습으로든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란 생각을 하면서도 어떨 땐 까맣게 잊곤 한다.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고 있음에 기겁하거나 후회하기를 종종 되풀이 하곤 한다.

손자를 위해 떠난 70일간의 유럽배낭여행 중 네덜란드 풍차마을 나막신 공장에서. 왼쪽에서 두번째가 저자 이점우 씨다.
 손자를 위해 떠난 70일간의 유럽배낭여행 중 네덜란드 풍차마을 나막신 공장에서. 왼쪽에서 두번째가 저자 이점우 씨다.
ⓒ 이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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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이 뭘 안다고", 대부분 부정적인 시선

저자가 교육계에 오래 몸담았기 때문일까. 여행기인 이 책에는 이처럼 부모 자식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들, 그에 관한 이야기들도 좀 있다. 주로 저자의 회한에서 비롯되는 글들이지만 위 인용한 글처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런지라 여행 정보를 얻거나 대리만족을 얻는 여행기를 읽는 맛과 또 다른 느낌과 감동을 쏠쏠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여행지에 대한 지식이 유독 많은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여하간 글을 통한 책에 대한 이해는 쉽다. 그런데 저자를 만나 이야기 나누며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얻고 느끼는 그런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저자만의 여행 꿀팁?, 그런 것들도 좀 얻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80일간 해외여행 중이란다. 아쉽지만 메일을 통해 물어본 몇 가지만을 전한다.

- 국내 여행도 쉽지 않을 32개월짜리 손자와의 7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기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70대 할머니와 32개월 손자의 여행'을 궁금해 할 것 같다.
"교사로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참 바쁘게 살았다. 40대 중반, 불현듯 시작된 상실감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때 내게 구세주는 여행이었다.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창 사랑을 받을 나이의 아이들은 일과 학업과 여행으로 늘 바쁜 엄마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재능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특히 둘째 아들의 상처는 컸다. 다행히 그리 오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엄마로서 회한이나 죄책감은 쉽게 털어지지 않았다.

딸도 나처럼 자기 일로 바쁘다. 나야 몰라서 그랬다지만, 딸은 나처럼 일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엄마였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딸은 자라면서 바쁜 나 대신 많은 일들을 해줬다. 이런 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내 자식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손자에게 해주면 딸에게 보답하는 것 아닌가. 때문에 계획한 여행이었다."

- 2014년 6월 19일부터 70일간. 사실 32개월 손자에게는 좀 무리한 여행 아니었을까?
"여행을 계획하고 일정을 짰을 때, "어린 것이 뭘 안다고…"라며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일 정도로 간주하는 등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염려와 달리 적응도 잘했고, 생각 이상으로 여행을 즐거워했다. 돌아와서도 "또 여행을 가자"고 하곤 한다. 지금도 며칠 전에 만난 손자와 영국과 아일랜드 여행 중에 있다.

32개월이란 월령은 지적 정서적 발달에 매우 중요한 시기로 민감성과 아동학에서 흡수성의 시기라고도 말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며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게 하는 것은 지적 정서적 발달에 많은 도움이 된다. 도전 정신과 진취적인 사고에도 적잖은 도움이 된다. 정말 잘 선택한 여행이란 생각을 거듭 하고 있다.

여행은 자기성찰에도 좋다. 훗날 성장한 손자가 훌쩍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내면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만약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망설인다면, 생각을 바꿔보길 권한다. 여행지에서의 아이의 행동과 변화 등에 중점을 두고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체면 차리는 어른, 손자 덕분에 더욱 인상 깊었던 여행

- 어린 손자와의 배낭여행,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많을 것 같다.
"손자를 위해 계획한 여행인데 결국은 내가 얻은 것이 더 많은 여행이 되었다. 교육자이다보니 머리로는 그 누구보다 아이들 편에 있다. 그런데 막상 내 아이들에게는 감정이 앞서다보니 쉽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딸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지난날 나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려보며, 회환과 보람, 후회와 행복했던 순간을 더듬었다.

덕분에 나를, 그리고 살아온 날을 정리하는 매우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떠난 여행인데 오히려 나를 위한 여행이 되었다. 출판사 측에서 책 제목을 정했는데, 제목을 접하는 순간 이런 내 맘과, 우리의 여행 목적과, 결과를 참 잘 표현한 제목이다 싶었다.

세인트 제임스 궁전(영국)에 도착하니 기마병 교대식 행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그 멋진 장면을 구경하거나 사진 찍는다고 정신없는데, 손자가 보병대를 흉내 내며 행렬을 따라가 순간 놀랐다. 그런데 결국 남편과 나도 아이를 따라 그 행렬 뒤를 따랐다. 손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어찌 해보았겠는가.

손자 덕분에 더욱 인상 깊은 여행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른들은 체면이라는 것 때문에 선뜻 따라하지 못하는 것도 아이들은 느낌 그대로 표현한다. 굳이 불편했던 것을 말하라면 손자의 관점을 우선해 일정을 조절하다보니 가고 싶은 곳 다 못 가보고 못 본 것인데…, 훌륭한 여행 파트너 손자 덕분에 얻은 것이 더 많은 여행이었다." 

오슬로(노르웨이) 시청 정원의 한 조각상을 "힘들어 보인다"며 어루만져주며 위로하고 있다.
 오슬로(노르웨이) 시청 정원의 한 조각상을 "힘들어 보인다"며 어루만져주며 위로하고 있다.
ⓒ 이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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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 이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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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몽트뢰. 레만호에서 본 알프스 산 봉우리.
 스위스 몽트뢰. 레만호에서 본 알프스 산 봉우리.
ⓒ 이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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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종합학습, 일정 짜기부터 자녀 동참시켜야

- 자녀들에게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선택한 여행. 왜 하필 여행일까?
"프로이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고와 행동 90%가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정의한다. 대부분의 교육사상가들도 3살까지의 경험을 강조했다. 내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현재, 36년간 초등교사로서의 경험, 학부모들의 상담 등을 참고로 보건데 영유아기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영유아기의 모든 경험은 땅에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자유의지(자발성)가 저절로 자랄 수 있어야한다. 영유아기 여행은 이런 것들을 얻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가족이나, 아이와 엄마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방법은 여행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책과 여행의 참맛'을 알게 이끌어 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이란 생각이다. 자녀들하고 여행할 때 부모가 이런 것은 꼭 가르치거나 이끌어 줬으면 좋겠다. 대체적으로 이런 여행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도 있을 것 같다.
"여행은 종합학습이다. 통찰력, 판단력, 선별력, 순발력 등이 발휘되어야 보람 있는 여행이 된다. 대개 부모들이 여행지 선정부터 일정까지 일방적으로 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일정 짜기부터 자녀를 동참시키고, 여행의 일원으로 역할 분담을 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가급 감동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또, 여행일기를 통해 여행을 정리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습관을 들이면 여행을 통해 훨씬 많은 것들을 얻을 것이다. 여행은 계획부터 다녀온 후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여행지에서 얻은 것들이나 봤던 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이야기하는 등으로 응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 앞에서 손자가 좋은 여행 파트너였다고 했는데, 다시 손자와 여행할 계획은?
"이 글을 쓰는 2016년 8월 12일 현재 80일간의 세계여행 중이다. 9일에 손자를 만났다. 어제 손자와 영국 남부 평온에 있는 스톤헨지를 봤다. 그리고 지금 배스에서 이 글을 쓴다. 손자와 함께 했던 지난 여행 중에 미흡했던 영국과 아일랜드 여행을 10일 계획으로 하고 있다. 손자는 파리에 하루 들러 지난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펠탑을 보고 왔다.

스톤헨지나 에펠탑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이다. 그러나 살아가며 어떤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다른 여행지에서 보는 것들도 그럴 것이다. 여행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때문에 이번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북부까지 또 다른 경험을 하려 한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세계 곳곳을 손자와 함께 하고 싶다. 여행이야말로 아이의 훗날을 위한 가장 멋지고 가치 있는 투자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70대 저자는 1960년대 후반에 교대를 졸업한 후 수십 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뒤늦게 아동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모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부모 교육을 강의하고 있다. <한 60대 초등학교 여교사의 삶과 가르침> 외에 교육 관련 몇 권의 책을 썼다.

덧붙이는 글 |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이점우 글과 사진) ㅣ푸른길 출판사 ㅣ2016-05-19 ㅣ 20,000원.



그 끝에는 내가 있었다 - 손자를 위해 떠난 7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

이점우 글.사진, 푸른길(2016)


태그:#배낭여행, #유럽여행, #알프스 정상, #여행기,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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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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