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 사건을 경험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경험적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식, 감정, 태도 등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어떨까. '한 사람을 만나는 건 한 세계(우주)와의 만남'이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다가섰다가 자기와 다른 세계에 대한 거부와 혐오에 부딪히기도 하고 이를 참지 못해 한 세계와의 결별을 고하기도 하는 사랑과 연애의 경험은 밀가루 반죽처럼 잡아당기는 대로 죽죽 늘어나기도 하고 작고 둥글게 뭉치기도 하는 등 우리의 세계를 무한대로 넓히기도, 한없이 좁아지게도 한다. 모든 관계에는 만남과 헤어짐이 있지만 사랑만큼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강렬하게, 가장 극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이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 - 지리멸렬한 삶에 한줄기 햇살 같은 사랑 

 '뇌의 특정 기억을 지운 채로 다시 만난 남녀'라는 설정.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뇌의 특정 기억을 지운 채로 다시 만난 남녀'라는 설정.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 포커스 피처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5년 개봉(한국), 2015년 재개봉)은 개봉한 지 10년 만에 재개봉이 될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뇌의 특정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의 참신함과 서로의 기억을 지우고도 다시 만나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의 모습에서 진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기억을 지운다고 감정까지 사라질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된 영화는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것을 알고 낙심한 조엘(짐 캐리)이,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런데 조엘이 기억을 지워가는 일련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클레멘타인과 함께한 순간의 기억을 모두 재생시킨다. 심한 말로 클레멘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그녀를 외롭게 했던 순간들,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던 첫 만남의 순간까지도.

조엘은 그 기억들을 다시 체험하며 비로소 클레멘타인과 함께했던 한때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순간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는 '외부 장치'와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그러한 그의 깨달음과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은 점차 사라져가고, 첫 만남의 순간에 다다른 조엘. 함께한 추억이 사라져가는 것을 걱정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Enjoy(즐기자)!"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함께한 순간만이라도 제대로 음미하려는 그의 모습. 우리는 그가 이전의 모습과 어딘가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문제적이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려는 설레는 순간, 서로의 기억을 지우는 데 도움을 주었던 '라쿠나 사'로 인해 그들은 테이프에 담긴 자신의 목소리로 지난 기억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시작의 순간 이미 끝을 봐버린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서로에게 담담히 이별을 고하는 것뿐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망설이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O.K(괜찮아)!"

사랑의 설렘이 지루한 권태로 바뀔지라도, 관계의 시작이 어느덧 끝에 다다를지라도,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조엘은 앞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랑에 솔직하고 적극적이었던 클레멘타인과 달리 소극적이고 변화를 꺼리며 지루한 삶을 반복해 온 조엘. 이 순간을 긍정하고 몰입하게 된 그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기대된다. 더불어 그들의 사랑의 마침표도 전과 다르게 찍히지 않을까.

영화 <500일의 썸머> -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까?

 영화 <500일의 썸머> 역시 최근 재개봉됐다.

영화 <500일의 썸머> 역시 최근 재개봉됐다. ⓒ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마크 웹 감독의 영화 <500일의 썸머>(2010년 개봉(한국), 2016년 재개봉) 역시 최근 재개봉된 영화로 많은 사람의 공감과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 작품이다. 남녀의 관계를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누구라도 자기 이야기처럼 공감하게 하는 스토리의 보편성을 획득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과 연애에 얽힌 복잡한 남녀의 심리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톰(조셉 고든 레빗)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에 관객들은 톰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반면, 썸머(주이 디샤넬)를 'bitch(나쁜 X)'로 인식할 우려가 있긴 하지만. 아마 이 이야기는 썸머의 입장을 적게나마 대변하는 이야기도 될 것 같다.

처음부터 내레이션을 통해 톰과 썸머의 이야기에 객관적 거리를 부여한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만난 이야기'라고 표방한다. 이것 자체가 운명적 사랑을 믿는, 그래서 썸머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는 톰의 감정에 관객이 온전히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톰의 주변 친구들도, 심지어 그의 여동생마저도 썸머는 '그냥 여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톰과 반대로 썸머는 운명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의 지속성에 의문을 갖고, 관계를 규정하는 걸 꺼린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불가해한 일이지만 그들이 과연 사랑했던 걸까 하는 관객의 의문을 자아내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사랑이 끝난 이후에 밝혀진다.

썸머와 헤어진 후 사랑과 운명을 믿지 않게 된 톰, 운명적인 만남 이후 결혼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된 썸머. 이 둘은 톰이 가장 좋아하는 건물의 풍경을 볼 수 있던 벤치에서 조우한다. 썸머가 운명이라고 여겼기에 썸머에게 수동적으로 이끌렸던 톰은 관계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으려 했던 썸머가 자신과 헤어진 뒤 결혼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썸머는 이렇게 말한다. "It just wasn't me that you were right about(네 말이 옳았어. 내가 틀렸고)." 함께할 때 알지 못했던 사실을 썸머는 이별한 뒤에 깨닫게 된 것이다. 톰의 말이 옳았다고, 운명적 사랑은 존재한다고 말이다. 단지 그 상대가 톰이 아니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썸머를 알게 된 지 500일째, 톰은 면접장에서 우연히 어텀이라는 한 여성을 만난 순간 알게 된다. 운명이나 필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영화는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우연을 필연으로, 운명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톰 자신의 의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운명처럼 썸머와 함께했던 500일이 1일로 바뀌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톰이 썸머와의 관계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썸머가 영화 <졸업>을 보고 왜 눈물 흘리는지 알았다면, 이별하기 전 썸머와 자신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톰이 알아차렸다면 두 사람은 이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끝난 관계에서 이러한 가능성과 의문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사랑의 경험이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가치관을 뒤바꿔 놓았다는 사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만의 견고한 벽을 허물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그들 앞에 놓인 인생을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사랑은 오롯이 둘 만의 경험

바디우는 "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後)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즉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들리는 이 말에 담겨있는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 외에는 모두 배경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두 사람만이 주인공인 세계에 속하게 된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오롯이 두 사람만의 세계에 속해 있는, 둘 만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의 기억을 훔쳐 조엘을 흉내 내던 패트릭(일라이저 우드)이 클레멘타인의 마음을 얻지 못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둘만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듯 톰과 썸머 역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상대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들의 현재는 사랑 이전의 모습과 다르고, 새로 시작하는 사랑 역시 그들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다. 바디우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짜는 것이니 말이다.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나. 그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 두 편의 영화가 아직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진주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ongah7)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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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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