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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플백

군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나는 1969년 2월 20일 학훈단(ROTC) 7기생으로 임관한 이래 더플백을 메고 계속 그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해 3월 1일 광주보병학교에 입소해 16주 기초보수교육을 받은 뒤 6월 하순 보병 제26사단으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에 따라 다시 더플백을 메고 의정부 북부 양주군(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에 있는 사단사령부 보충대에 입소했다.

신임 소위 시절의 기자
 신임 소위 시절의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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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우리 동기생 80여 명은 일주일간 실무교육을 받았다. 당시 26사단장은 유학성 소장으로 월남에서 갓 돌아온 듯, 야전 정글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주월사령부에서 군수참모를 역임했다고 한다. 귀국 때 철모 위장포를 대량으로 가져온 듯, 사단 전 장병의 철모를 미제 위장포로 덮고 있다고 사단장 참모가 자랑스럽게 전했다.

그 무렵 대부분 파월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귀국 때 뭔가를 가지고 왔다. PX에서 산 일제 전자제품이나 소니 녹음기, 캐논 카메라 등은 기본이었고, 어떤 영관급 장교는 워커를 가져온 이도 있었다. 나중에는 탄피, 고철까지도 귀국 배에 잔뜩 싣고 왔다.

누군가는 그게 한국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됐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아귀같은 작태를 지켜본 미군들은 아마도 "너네들 자주국방은 한참 힘들 것이다"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자주국방에는 병력이나 무기 못지 않게 높은 도덕심과 고결한 자존심, 자부심과 같은 게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당시 보병 제26사단의 주요 임무는 교육과 수도 외곽방위였다. 사단 예하부대 주둔지 및 관할지역은 한강 하류 파주군 교하면 산남리에서부터 양주군 동두천, 북한산 일대 및 비봉까지로 그 범위가 엄청 넓었다. 그때는 김신조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 차 남침했던 1·21사태 직후라 서울 북부와 휴전선 사이의 이른바 '김신조 루트'에 대한 경계근무가 매우 철저할 때였다.

나는 그때 사단 보충대 교육기간 중 처음으로 휴전선 철책까지 둘러봤는데, 말로만 전해 듣던 철책선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드는 등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한 핏줄의 단군 자손들이 철책을 사이두고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에 가슴이 몹시 아팠다. 철책 너머 병사들이 차라리 이민족이었다면,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얼마 전, 아버지는 전방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부대 쌀 팔아먹지 말라. 네 부하를 두들겨 패지 말라. 네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 전투 수당 몇 푼 더 받으려고 월남전에 지원하지 말라. 그리고 네가 총부리를 겨누는 병사들도 동족임을 잊지 말라." 

인사 명령

7월 2일, 사단 보충대에서 일주일 동안 실무교육을 마치자 73연대로 인사명령이 났다. 우리 동기생 20여 명은 그 명령에 따라 다시 더플백을 메고 사단 인사처에서 내준 트럭을 타고 송추계곡에 있는 연대본부로 갔다. 연대 직할대 야전막사에서 하룻밤 묵자 다시 인사명령이 내렸다. 73연대 제1대대로 명령이 났다. 그 사이 실력있고 요령 좋은 동기생들은 사단 직할대로, 연대 직할대로 휘파람을 불면서 빠져나갔다.

나는 사단이나 연대에 부탁할 만한 백(Background)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백이 있다고 해도 굳이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24개월의 현역생활, 뭐로 뭉개도 마칠 수 있다는 그런 오기로, 가는 데까지 가 보자는 게 그때의 내 솔직한 심경이었다. 돈과 백의 약발이 가장 잘 듣는다는 군대 사회에 언필칭 '국가의 간성'이라는 신임 소위까지 부패의 늪에 놀아난다면 우리나라의 장래가 얼마나 한심하랴.

1대대로 명령을 받은 동기생은 네 명이었다. 1대대 부대대장 이재덕 소령이 지프차를 몰고 우리를 인솔하러 왔다. 그는 50대 초반으로 계급 정년에 걸린 고참 소령이었다.

"난 신삥 소위들만 보면 귀엽단 말이야. 너희 시절에는 무서운 게 없지. 내 소위 시절엔 전시(6·25)라 총알이 '소위소위' 소리를 내면서 날아와 그때 소위들은 총알받이가 많이 됐지만."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뒷자리에 우리 일행을 태웠다.

"야! 너희들 꼬질대 조심해. 술집 매미(작부)들이나 다방 레지들이 너희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너희들에게는 싱싱한 맛이 있거든. 너희 땐 밤새 근무해도 꼬질대가 끄떡 없잖아. 하룻밤 재미 보다가 바가지 쓴 녀석이 많아. 아주 살림까지 차린 녀석도 봤어. 서로 눈이 맞아 섹스를 하더라도 두 가지는 꼭 지켜라. 첫째 장화를 꼭 신고, 둘째 화대는 반드시 지불해라. 그래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

그는 대대본부까지 가면서 우리들에게 주로 대여성, 성교육을 했다. 73연대를 출발한 지 얼마 안돼 곧 송추계곡 들머리에 있는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부대 막사 전체가 온통 위장망으로 덮여 최전방부대임을 실감케 했다. 부대 연병장을 비롯한 곳곳에는 '공격' '경계 철저' '먼저 보고 먼저 쏘자' '적화야욕분쇄' 등등의 구호가 돌과 입간판에 붉은 페인트 글씨로 쓰여 부대 안팎에 덕지덕지 깔려 있었고, PRI(사격술 예비훈련) 표적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리를 태운 지프차는 대대본부 막사 앞에 이르자, 철모를 쓴 인사 장교 정 중위가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우리 일행이 지프차에서 내리자 그는 우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다급하게 말했다.

"이미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대장님 신고 때 쉽게 통과한 장교는 거의 없습니다. 우선 이발소로 갑시다. "
"네에? 우리는 출발 전 사단에서 이미 이발을 하고 왔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 대대장님의 기준으로는."

우리는 그가 안내한 이발소로 갔다. 대대 보급 창고 한쪽 구석에 급조한 간이이발소였는데, 상병 계급장의 이발병이 히죽 웃으면서 우리를 맞았다. 그는 모든 걸 다 안다는 투의 웃음이었다. 그는 머리털이 손가락 사이로 나오면 안 된다고 이빨 빠진 바리캉으로 머리 뒤통수를 마구 밀었다. 우리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푸념을 했다.

"이건 육군 규정에도 없는 횡포다."
"처음부터 겁주는구먼."

초록색 견장

임관 후 4개월 만에 마침내 실무부대로 전입한 우리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전입 신고도 하기 전에 이미 주눅이 들어버렸다. 이발을 한 동기생 네 명은 대대장실 앞에 도열, 우리 중 군번이 가장 빠른 중앙대 출신의 김 소위가 선임자로 전입신고 연습을 했다. 김 소위도 잔뜩 얼었는지 무척 더듬거렸다. 두어 번 연습을 끝내자 인사 장교가 대대장을 다시 모시고 나왔다.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 안대수(가명) 대대장, 그는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그는 우리를 한번 쭉 출고는 동아대 출신의 최 소위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이 새끼! 귀밑에 아직도 비누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워커 발은 최 소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의 발길질에 최 소위가 한 걸음 물러났다가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며 큰소리로 대꾸했다.

"공격! 소위 최호정,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이 새끼들 형편없어. 인사장교! 다시 교육시켜!"

그런 뒤 대대장은 자기 방으로 휑 들어갔다. 최 소위는 냇가로 가서 다시 머리를 감고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며 두어 번 더 신고 연습을 했다. 한참 후 다시 나타난 대대장에게 우리는 전입신고를 했다. 간신히 신고식이 끝나자 인사장교가 대대장 앞에서 우리의 어깨 위에다 지휘자임을 상징하는 초록색 견장을 달아줬다. 그러자 대대장은 잔디와 돌로 만든 야전 훈시대 위에서 일장 훈시를 했다.

"너희들은 오늘 이 시간부로 우리 대대 소총소대장이다. 우리 대대는 서울 외곽 방위를 맡은 최우수 정예부대로서,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지역은 한시도 경계 임무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오백만 서울 시민이 우리 군을 믿고 단잠을 이룬다. 알겠나!"
"네!!!!"

"특히 ROTC 출신 너희 놈들은 어물어물 적당히 복무연한이나 채우려는 놈들이 많아. 그런 놈은 대대장 이 안대수가 용서치 않는다. 알겠나!"
"네엣!!!!"

그는 그 순간 권총을 빼낸 뒤 하늘을 향해 흔들었다.

"깨어있는 한 항상 철모를 써라. 만약 작업모 쓰고 건들거리는 놈은 내 눈에 걸리면 그냥 안 둔다. 살짝 살짝 무단 외출 외박하는 놈도 그냥 안 둔다. 알았나!"
"네!!!!"

"난 6․25 때 전투 중에 도망친 내 부하를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했다. 월남서도 베트콩을 화염방사기로 직접 숯덩이로 만들었다. 네놈들은 대한민국의 남의 집 귀한 아들 40여 명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 훈련 때 땀 한 방울은 전투시 피 한 방울이다. 소대원들을 엄하게 교육시켜라. 강한 소대장 밑에 강한 소대원이 있다. 소대장 근무 마칠 때까지는 모두 영내 거주다. 너희 휴가는 제대할 때까지 생각지도 말아라. 우리 대대에서는 소대장 휴가란 말은 없다."

마침내 소총소대장이 되다

그는 계속 게거품을 물면서 장황한 훈시를 속사포처럼 마구 쏟았다. 우리는 그때마다 잔뜩 겁먹은 채 크게 복창했다. 그가 대대장실로 사라진 후 우리들은 '후유' 하는 안도의 숨을 내몰았다. 우리들은 서로 쳐다보며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새끼! 독종인데."
"깡패 같은 놈한테 잘못 걸려들었군."
"지금이 군국주의 시대인가, X팔."
"고생문이 훤하다."

우리 네 사람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곧 부대대장 이 소령이 씩 웃으면서 나타났다. 그는 다시 지프차에 타라고 했다. 그는 아예 운전병을 내리게 한 뒤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를 각 중대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1대대는 중대별로 파견근무로 떨어져 있었다. 대대에서 가장 가까운 1중대에서 김 소위가 내렸고, 도봉산 들머리 2중대에서는 최 소위, 장흥 계곡 4중대에서는 외대출신 이 소위가 내렸다. 그러자 넷 중에서 나만 남았다.

"박 소위, 3중대는 대대에서 가장 멀지만 대신 서울은 가장 가깝다."

부대대장은 장흥에서 구파발 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네 3중대장 강철(가명) 대위, 그 친구 꽤 깐깐한 친구지. 얼마 전 사단 최우수 중대장으로 표창까지 받았고. 월남전에서는 무공훈장까지 받았던 독종이다."

그 순간 부대대장이 핸들을 잘못 꺾는 바람에 지프차가 길에서 벗어나 개울에 처박혔다. 나는 차에서 내려 앞에서 밀고, 부대대장은 시동을 걸어 후진해 간신히 개울에서 빠져 나을 수 있었다. 그새 내 옷과 얼굴에는 바퀴에서 튄 진흙이 잔뜩 묻었다.

"신관 사또 부임 길이 엉망이 돼 버렸군."

소대 선임하사 박영삼 중사
 소대 선임하사 박영삼 중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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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대장은 진흙탕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는 한 마디 뱉고 씩 웃었다. 나는 개울로 가서 옷과 얼굴의 진흙을 닦았다.

비포장도로이기에 지프차 뒤로 흙먼지가 꼬리를 이었다. 거기서 30여 분 달린 끝에 비로소 나의 첫 근무지 진관사 들머리에 있는 중대본부에 도착했다.

위병소 초병의 "공격! 근무 중 이상 무!"라는 고함을 들으며 중대 연병장에 내렸다. 그러자 중대장이 그 소리를 들은 양 지프차로 달려와 부대대장을 영접했다. 나는 곧장 중대 행정반에서 중대장한테 전입신고를 했다.

"공격! 소위 박도는 1969년 7월 3일부로 제1대대에서 3중대로 전입 명을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공격!"
"공격! 예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소. 박 소위는 2소대를 맡아주시오."

중대장 강철 대위는 레인저 마크가 달린 월남 정글 전투복에 선글라스를 낀 채 손을 거만하게 내밀었다. 중대장으로부터 부대 현황을 듣고 있는데 소대 선임하사 박 중사가 연병장에 소대원을 집합시켜뒀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중대장이 말했다.

"어서 가서 소대원과 상견례를 하시오."

박 중사는 나와 비슷한 나이로 눈이 몹시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소대장은 부임할 때 첫 인상과 인사말이 중요하다고 선배들로부터 여러 차례 교육을 받은 바 있었다. 그래서 사단 보충대 교육 중 부임 인사말을 백지에다 적어 몇 번이나 연습을 했다.

소대원들은 중대연병장에 전원 집결하고 있었다. 나는 연병장 야전 훈시대에 올라 내무반장 안 하사의 집합 보고를 받은 뒤 소대원들을 죽 훑었다. 순간 왈칵 울고 싶었다. 야간 근무 준비를 위해 오침을 하다가 막 잠에서 깬, 도시 초점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한 반가움보다 또 하나의 귀찮은 상급자가 왔다는 그런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해어진 작업복에 너덜한 통일화…. 나는 순간 울컥했다.

손을 안 썼죠

'그래, 난 너희들 위에서 군림하는, 너희들을 괴롭히는 소대장이 아니라, 너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소대장이 되리라.'

인사말도 대충 그렇게 했다. 그렇게 인사말을 마친 후, 소대원 한 사람 한 사람씩 살피면서 악수를 했다. 잔뜩 겁먹은 얼굴들, 그래, 일단 군대에서는 상급자라면 무조건 거부반응부터 생길 테지. 그런 너희들의 선입관을 내가 불식시켜주겠다. 내가 부임 인사를 마치고 내무반을 한번 둘러보고 막사를 나오는데 한 소대원이 내 뒤를 따랐다.

김학수(왼쪽) 고교동창과 소대내무반 앞에서
 김학수(왼쪽) 고교동창과 소대내무반 앞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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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님!"

나는 뒤돌아서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가냘픈 작대기 하나, 이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공격! 저 김학수입니다. "
"김학수?"

그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이 전방 외진 말단 부대에서, 그것도 같은 소총소대에서 그를 만나다니.

"전입한 지 얼마 됐나?"
"보름 됐습니다. "
"말 낮춰."
"아닙니다. 군복을 입고 있는 한…."

그는 건국대 국문학과 3학년 재학 중에 입대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어쩌다 여기로? 카투사나 육본으로 빠지질 않고."
"손을 안 썼죠. 근데 소대장님은요?"
"…."

[관련기사] 동창회 명부에서 옛 전우의 소식을 듣다


태그:#어느 해방둥이 기자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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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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