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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집은 해방 후 미군속들에게 불하됐다. 그후 1948년 이완용의 집 가운데 가장 중심인 옥인동 19번지의 바깥채에 거주한 사람은 당시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미군정 통역관을 하고 있었던 김수임이었다.

군정청 헌병대사령관 존 E. 베어드 대령이 동거인 김수임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한편 김수임은 이화여전의 단짝 친구인 모윤숙이 조직한 미군장교를 상대로 한 사교클럽이었던 '낙랑클럽'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으며, 그의 활발한 성격으로 '종달새'라 불렸다.

'조선의 마타하리', 김수임

 ‘To My Sweet-heart Feb. 24, ‘39’라는 수기로 보아 1939년 누군가에게 주었던 김수임의 사진이다.
 ‘To My Sweet-heart Feb. 24, ‘39’라는 수기로 보아 1939년 누군가에게 주었던 김수임의 사진이다.
ⓒ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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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김수임은 개성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11살 나이에 민며느리로 팔려나가야 하는 가난 속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4년 뒤 야반도주했고, 이때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며 결국 1932년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세브란스 치과과장 비서 겸 통역으로 일했으며, 모윤숙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줄줄 외는 기독교 신자" "아주 명랑하고 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였다. 이랬던 그녀가 미군정 헌병대 사령관의 동거인이 되고 모윤숙의 낙랑클럽에 참가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50년 4월 21일, 불과 전쟁 발발 두 달을 남겨놓은 시기에 김창룡에 의해 체포돼 오제도 검사에 의해 간첩혐의로 기소됐다. 그가 체포된 시기는 김삼룡·이주하가 체포된 직후였고, 김수임 체포 뒤에는 바로 북로당에서 파견한 성시백도 함께 체포됐다. 이때 그녀에게 적용된 혐의는 베어드 대령을 통해 취득한 정보를 남로당에 넘겨줬고, 또 1942년 알게 된 이강국을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월북하게 했다는 것 등 총 13가지 혐의다. 이강국은 북에서 초대 외무상을 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그녀는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정에 넘겨졌고, 3일 연속 재판이 열렸으며, 마지막 날인 6월 16일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불과 두 달 만에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단짝 모윤숙은 김창룡이 김수임을 체포하도록 돕는다. 천하의 특무대장 김창룡도, 최고의 공안검사 오제도도 미군헌병대사령관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모윤숙의 자서전에는 "언니, 오늘 언니 생일인데 미역국이나 같이 먹어요" 하면서 김수임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모윤숙의 이력으로 봐서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모윤숙·노천명은 3일 연속해서 재판을 방청하러 나왔다. 하지만 김수임의 사형선고로 이들과의 인연이 끝났다. 그리고 사형선고 9일 뒤 전쟁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3일 뒤 급히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김수임의 체포와 관련된 인물들. 좌로부터 북한 초대외무상 이강국, 낙랑클럽 회장 모윤숙, 방첩대장 김창룡, 공안검사 오제도
 김수임의 체포와 관련된 인물들. 좌로부터 북한 초대외무상 이강국, 낙랑클럽 회장 모윤숙, 방첩대장 김창룡, 공안검사 오제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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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8일자 경향신문은 김수임에게 사형이 언도되었음을 알리면서 그녀와 베어드 사이에 14개월 아이가 있다고 보도했다.
 1950년 6월 18일자 경향신문은 김수임에게 사형이 언도되었음을 알리면서 그녀와 베어드 사이에 14개월 아이가 있다고 보도했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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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운 점, 김수임이 들것에 실려와 재판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고문과 강압수사 흔적 그리고 그에게 적용된 국방경비법 자체가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하지만 전쟁이란 폭풍 속에 이미 당사자는 세상에 없었고, 전쟁 후에도 전후 복구 등으로 그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졌다. 오히려 전후 남북의 이념 대립은 더욱 명확해지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는 속았다>(1964), <김수임의 일생>(1974), <나, 김수임>(1997) 등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됐다.

김수임의 삶을 이용한 영화 및 연극 포스터
 김수임의 삶을 이용한 영화 및 연극 포스터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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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간 아들에 의해 밝혀진 진실

김수임을 이용한 반공이데올로기 선전은 그후로 냉전체제의 붕괴로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진실은 가려질 뿐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김수임과 존. E. 베어드 대령 사이에 출생한 아들 김원일이 2008년 자신의 생모 김수임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는 1949년 11월 출생하였고 사건 당시 옥인동 집에 버려지다시피 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그가 태어난 청량리위생병원 수간호사였던 안귀분의 양자로 입양됐고, 1970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에서 자기 엄마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한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자기 아버지 베어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80년 아버지를 찾아 갔지만 당시 90세인 베어드는 "나는 사생아 자식이 없다,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면서 부인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1950년 조사받을 때도 자기는 사생아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김수임 재판 개시 9일 전에 출국해 버렸다.

이렇게 자기 엄마에 대한 관심은 그에 대한 자료를 탐색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게 했다. 그가 찾아낸 미 육군성 기밀문서인 일명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어 김수임이 북에 넘겨줄 비밀도 없었으며, 이강국을 월북시키는 데 미군 지프를 이용했다는 등의 내용도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8년 AP통신은 '미 육군 정보국 1956년 비밀자료에 의하면 이강국이 CIA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단)에 고용되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이강국은 휴전 무렵 이승엽·임화 등과 함께 미군 스파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로당 스파이로 처형된 김수임에 대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봐야 할 것이다.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은 "어머니는 역사라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역사에 익사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외로이 처형당한 어머니를 위로했다.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낙랑클럽

김수임이 활동했던 '낙랑클럽'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주로 이화여전 출신들 100~150명으로 구성됐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으로 총재는 김활란이었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영어를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 사교 단체'였다(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2012, 기파랑). 뉴라이트 저자인 최종고의 눈에는 남들에게 '매춘'으로 보일 만한 행위도 문학적·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수임의 후배 전숙희가 "수임 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2002, 정우사)에서는 낙랑클럽은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라고 했다. 즉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신분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책 속에서 모윤숙과 김수임의 모습은 고급 직업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 하필이면 그 이름도 '낙랑'이다.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니던가. 이웃나라 호동왕자와 사랑에 빠져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친 '낙랑공주'가 연상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낙랑클럽은 당시 유산계급을 배경으로 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펼친 로비 활동의 일환이었다.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회현동 모윤숙의 집에서 모였지만 미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 정치인이 주선해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아서 그곳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리더인 모윤숙이 이화여전 후배들을 사로잡았으며,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종달새'의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해방정국 속에서 남한 단독선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낙랑클럽 회장 모윤숙(좌)과 당시 유엔조선위원장 단장 메논
 해방정국 속에서 남한 단독선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낙랑클럽 회장 모윤숙(좌)과 당시 유엔조선위원장 단장 메논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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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낙랑클럽 단장이었던 모윤숙은 당시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유엔 조선위원장 단장 메논의 판단을 바꾸게 한 장본인이다.

이에 대해 모윤숙은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메논 자신도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라고 고백했다.

결국 모윤숙과 메논의 치정 관계가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널리 퍼졌다.


태그:#김수임, #이완용가옥, #이완용집, #서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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