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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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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머 새소리만 가득한, 인적 없는 춘천의 도로길 ⓒ 이수지
산 너머 새 소리만 가득한 인적 드문 춘천 오탄리 도로길.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머뭇대고 있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느닷없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분홍색 재킷을 입은 할머니가 오탄리 버스정류장에 봄 철쭉처럼 앉아있다.

이리 오라는 할머니의 손짓에 길을 건넜다. 저 가게 문 몇 시에 여는지 아세요? 잦은 숨을 고르며 내가 물었다.

"으응. 아 가방 벗어. 좀 쉬어."

할머니가 나무라듯 정류장 간이의자를 두드렸다. 그래, 시간도 많은데 뭐. 우리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 나, 더스틴. 우리 셋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마냥 사이좋게 오탄 2리 버스정류장 지붕 아래 나란히 앉았다.

춘천, 대추나무골 ⓒ 이수지
"저기 안 열어. 이런 동네 가게는 다 문 닫았어. 요새 사람들은 다 차 타고 시내 대형마트 가서 장 보지 이런 데선 물건 안 사니까. 그 옆 가게 장사하던 늙은이도 이제 안 하고 말더라고."

이런 동네 가게에는 노인들이나 가끔 들른다는 명월리 할머니의 말, 거기에 오탄리 할머니의 지론을 합하니 답이 나온다. 우리가 어제고 그제고 그토록 배를 곯은 이유는 다, 대형마트 때문이다. 물건도 별로 없고 가격도 더 비싼 동네 작은 상점 대신 시내 대형마트로 차를 몰고 가서,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산 후 집 안에 풍족하게 쌓아놓으면 되니까. 시내 대형마트까지 차를 타고 갈 수도 없을뿐더러, 물건을 저장해 놓을 곳이라고는 이미 꽉 찬 30L들이 배낭의 주머니 한 칸 정도인 우리 같은 유목민들은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먹고 살기'를 주 축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리 좋자고 수익도 안 나는 작은 가게들이 억지로 문을 열어주기를 바랄 순 없는 노릇이니. 그래도 아쉽다. 마을 가게가 있으면 길을 걷다 허기도 해결할 수 있지만, 거기에 더해 앞마을 명월리 할머니 같은 분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관련 기사: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남편과 나는 환호했다)

도시의 마트, 편의점에서라면 물건을 사는 나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말 한마디 없이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긁으면 그만인 기계적인 거래가 이루어지지만. 명월리 상회 같은 곳이라면 물건을 사는 나와 더스틴 그리고 할머니 사이에 단순히 상점 주인과 손님 사이의 거래를 넘어선 어떤 호기심, 관계 같은 게 생기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거니까.

우리는 충분히 서행하고 있다. ⓒ 이수지
"버스 타고 어디 가시려고요?"
"응. 누가 말린 고추 좀 갖다 달래서. 춘천 시내 가는 길이야."

할머니는 옆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새빨간 고추 봉다리를 흐뭇한 듯 톡톡 두드렸다. 빨간 고추를 담았던 할머니의 눈이 우리 얼굴을 깊이 들여다봤다.

"그래. 그렇게 걸어서 댕기는 거야?"
"네."
"어디부터 왔는데?"
"백마고지에서 왔고요."
"어후야. 그래서 서울까지 가?"
"아니 부산까지 가려고요."
"어휴. 재미로?"
"재미? 음... 재민가? 음... 아뇨 재미는 아니고..."
"재미지겠네? 히히히! 근데 둘이 그렇게 다니는 거야?" 

할머니는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더니 더스틴에게 손을 흔들었다. 빨간 고추로 덧칠한 듯한 더스틴의 양 볼이 씨익.

"재미없어요 할머니. 방금도 요 마을 앞에서 둘이 한참 싸우다 왔어요. 막 소리 지르면서 싸웠는데요?"
"으잉? 싸아워어? 왜 싸워! 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잘해줘야지 왜 싸워!"

할머니가 다시 고개를 쑥 빼고는 더스틴에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씨익 올라간 더스틴의 양 볼이 얼어버렸다. 쌤통이다 요 자식아.

철원을 벗어나 춘천에 닿았다. ⓒ 이수지
"외국 아저씨네. 애인이야?"
"아뇨, 남편."
"그래? 으으응... 나도 있잖아, 옛날에 외국인이랑 결혼할 뻔했어."
"아 그래요?"

할머니도 외국인이랑 결혼할 뻔했대. 진짜? 더스틴이 반가운 듯 짙은 눈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할머니 안에도 있겠다. 타인을 이해하는 짙은 나이테.

"왜 그랬냐믄. 내가 고아야. 12살 때 고아가 됐어. 전쟁 때 폭격이 터져서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언니 세 명 있는 거 다 흩어졌어. 그때 살던 데가 인천이었는데. 가족 다 흩어지고 난 친척 집으로 갔지. 그 집에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주 힘들게 살았어. 옛날 얘기하면 눈물나..."

"... 부모도 없고 가난하니까, 스물한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간 거야. 그 당시는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였지. 내가 어렸을 때 얼굴은 되게 예뻤다? (웃음) 근데 예쁘면 뭘 해. 하다못해 이불 하나라도 있어야 누가 데려가지. 부모도 없으니 누가 주선도 안 해주고. 그러니까 주위에서 자꾸 나보고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래. 미군이랑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 많다면서. 근데 지금은 몰라도 그땐 그렇잖아. 아이 난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무섭더라고."

목걸이, 귀걸이, 반지로 여기저기를 치장한 멋쟁이 할머니. 여행 참 재미지겠다며 까르르 웃는 소녀 같고 명랑한 할머니지만, 그 속에는 명월리 할머니의 그것 못지않은 서사가 담겨있다. 할머니는 눈물을 비추었다 웃기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먼 친척의 주선으로 남편을 만났다. 허나 결혼 후에도 삶은 평탄치 않았다. 남편은 결혼 일주일 만에 군에 입대했다. 남편 없는 3년 동안 첫딸을 등에 업고 공사판 일꾼들 밥 지어주고 빨래해주며 돈을 벌었다. 잠시 틈이 나면 산에 가서 나물을 캐다 팔았다. 그렇게 키운 오 남매는 지금 남들 못지않게 잘 산다.

오탄리, 오탄교회 ⓒ 이수지
참 다르다. 그치? 명월리 할머니나 오탄리 할머니가 살았던,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선택지 없이 주어진 길로만 묵묵히 살아내야 했던 삶, 그리고 우리의 삶 말이야. 선택지가 너무 많아 갈팡질팡하고, 무엇을 선택해도 잘못한 것 같고, 기껏 선택해서 가다 보면 또 새로운 길이 보이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부터를 모르겠는 우리 말이야.

"곧 추석 되면 우리 손주 손녀 다 울 집으로 온다? 히히."

할머니가 해처럼 환하게 웃었다. 손주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마치 갓 탄생한 샛별처럼 은은하고 영롱했다. 할머니의 미소. 그 미소 안에 모든 게 담겨있는 듯했다.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홀로 밥벌이하고 어렵게 자식 키운 쉽지 않았던 삶이지만 훗날 오늘, 이렇게 예쁘게 지어 보이는 환한 미소.

"집은 어디야?"

할머니가 물었다.

"저희 집이요? 그게... 원래 서울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없어? 집이 없어? 그럼 미국에 집이 있어?"
"아뇨 미국엔 잘 가지도 않아요."
"그럼 미국에도 한국에도 집이 없어? 진짜로 집이 없어?"
"네."
"아이 그럼 어쪄! 그럼 여기 와 살아. 우리 옆집 할머니가 아들 집으로 들어가서 집이 비었어. 세 준대. 저기 파란색 지붕 보이지? 거기야. 마당에 차도 들어가고 앞에 경치도 좋아. 내가 엄마처럼 잘해줄게 와 살어. 응?"

춘천 오탄리 분홍할매 옆집에서 사는 삶. 그런 삶도 가능하다. ⓒ 이수지
선택지 하나가 추가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오탄 2리, 분홍 할매 옆집에 사는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해 보기 위해 잠시 집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집 없이 살란 법은 없지 않은가. 여행이 끝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법도 없고.

할머니의 제안,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한 상상에, 가슴 속에 남아있던 작은 매듭 하나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랬지. 현재 우리에겐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져 있는 거였어. 서울로 돌아가도, 돌아가지 않아도 돼. 집에서 살아도, 살지 않아도 돼고. 도시에서 혹은 시골에서 살아도 혹은 한국을 떠나도 돼. 앞으로도 선택지는 계속 늘어날 거야. 앞으로의 여행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이, 우리의 관점을 조금씩 확장해줄 테니까.

"그럼 저희 도보여행 다 하고 진짜 연락해요?"
"응! 진짜로 와! 진짜로 와야 혀!"

할머니를 정류장에 남겨둔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덩치 큰 농어촌 버스 한 대가 엉덩이를 덜컹대며 우리 앞을 지나쳤다. 버스 차창에 분홍빛이 어렸다. 아, 할매다. 분홍 할매가 버스 창문에 붙어, 우리를 향해 손을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활짝 핀 철쭉처럼 후회 없이, 아주 예쁘게 웃으면서.
태그:#도보여행, #국토종단, #강원도, #춘천, #시골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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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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