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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희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본관건물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화여대는 3일 오전 9시에 개최된 긴급 교무회의를 통해 재학생과 졸업생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 미래라이프대학을 설립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경희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본관건물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화여대는 3일 오전 9시에 개최된 긴급 교무회의를 통해 재학생과 졸업생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 미래라이프대학을 설립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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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일, 총장은 본관을 방문하여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추진'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법적 처벌, 징계 시도 등의 갖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본관을 지켰던 이화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 안에서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에게 1600명의 경찰병력 투입으로 화답한 학교 본부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사반세기 이전으로 돌려놓았다는 사회적 여론도 한몫했다. 학생들이 교육부와 학교 본부가 내린 결정을 전면 폐기하게 만든 것은 이례적인 일이므로, '이화인이 거둔 승리'에 학생사회를 비롯한 전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어느 언론에서는 이화가 승리를 거둔 배경이 "느린 민주주의"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의사 결정이 현장에 있는 구성원들의 끈질긴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효율성이 담보되지는 않지만, 더 많은 구성원의 의사를 수렴하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자발성이 고취하는 것. 이런 것이 '느린 민주주의가 가지는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농성에 참여한 이화인으로서 이러한 원인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연 "느린 민주주의"를 실현해냈는가?

세월호 리본·위안부 팔찌 착용 제한, 정치적 의사 표현은 기본 권리

한 이화여대 졸업생이 'RETURN' 도장이 찍힌 졸업장을 들고 서 있다.
 한 이화여대 졸업생이 'RETURN' 도장이 찍힌 졸업장을 들고 서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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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 퇴진을 위해 농성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세월호 리본이나 메갈리아 티셔츠, 무지개 배지, 심지어는 위안부 팔찌의 착용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현장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다음과 같은 물품들을 허용하는 것이 '외부 세력'의 개입을 방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학내 사안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 여론의 주된 논지였다. 이화인의 "순수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최소한의 정치적 표현과 실천마저 가로막는 것을 과연 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농성에 참여한 이들은 미래라이프 사업과 총장의 불통에 분노하는 이화인이기 이전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며, 자유롭게 각자의 의사 표현을 할 권리를 가지는 자연인이다.

우리는 이화인임과 동시에 청년·여성·성소수자·취업준비생·알바생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며, 필연적으로 각기 다른 사회현상에 주목하며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순수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대의를 명목으로 "정치성을 표백"한 이들에게만 농성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탄압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이 또한 민주적 표결 절차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은 것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된 뒤, 기계적인 표결절차를 거치는 것을 두고 민주주의적인 가치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까?

'운동권'이 발언하려 하자 "마이크 뺏어", 이게 민주적인가

농성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난 7월 30일, 경찰병력 투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 '운동권'으로 지목받은 한 학우가 발언하려고 하자, 20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권 나가!" "마이크 뺏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언 기회를 박탈했다. 이와 동시에 '운동권' 학생에게 발언 기회를 준 총학생회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으며, 학생들은 끝내 총학생회에 "운동권"의 개입을 차단하겠다는 선서를 받아냈다.

이후 발언 기회를 차단당한 학생을 비롯해 정치 단체에서 활동한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신상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되었고 이들의 농성장 출입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학교 밖에서 해당 학생들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나돌기도 했다. 미래 라이프 대학 사안에 대해 정치 단체에서 붙인 자보는 무참히 뜯겨나갔다.

정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그러한 '혐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학내 사안에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친 학우였다는 이유만으로 '운동권'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당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모두가 외부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고 순수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커뮤니티나 현장에서 이러한 차별과 배제에 우려를 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이의 제기는 교직원의 '물타기', 혹은 '꿘충'('운동권'과 '벌레'의 합성어)의 개입 시도라 취급되며 진지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성장에서의 퇴장을 거부한 '운동권' 학생이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출된 마당에 현장에서 혐오와 배제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 또한 '신상털기'와 같은 인권 유린까지 자행해가며 지켜야 할 '순수성'에 대해 여러 차례 반론을 제기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꿘충'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내 의견을 표출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선험적 공포를 활용해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종북', '빨갱이'로 낙인찍고 공론장에서 추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이화여대 농성에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꿘충' 혹은 '교직원'으로 적대시되었다. 우리 사회의 '종북', '빨갱이', '메갈' 등의 혐오적 낙인과 같은 표현이 '꿘충'으로 간단히 치환된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민주적 토양을 만들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민주적 가치의 실현이라면, 이렇게 반론을 펼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된 뒤 다수의 의견을 되묻는 식으로 표결을 진행하는 것을 '느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느린 민주주의'를 실현해내기 위해, 나의 이러한 반론도 공론장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대학 구조조정은 사회적 문제, 더 넓게 연대해야

지난 7월 30일 이화여대 본관 앞에 경찰이 배치된 가운데, 페인트가 뿌려진 김활란 초대 총장의 동상이 보인다.
 지난 7월 30일 이화여대 본관 앞에 경찰이 배치된 가운데, 페인트가 뿌려진 김활란 초대 총장의 동상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제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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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인들은 미래라이프 폐지 운동이 어떠한 정치적 논리와도 무관함을 강조했고, 이는 최경희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현재에도 본관 점거 농성의 핵심 슬로건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어떠한 정치 논리, 외부 세력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명분 하에 앞서 언급한 일들이 벌어졌고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주도한 기자회견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연 미래라이프 대학 폐지 운동을 '정치'와 분리된, '비정치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먼저 '정치'와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치를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행위라고 정의할 때, 운동은 집단 혹은 개인의 정치적 의지의 발현, 구체적인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래라이프 폐지 운동은 대학 구조개혁 평가·프라임 코어 사업으로 이어진 대학 구조조정 정책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다. 다수 학생들의 이해와 괴리된 교육부의 고등교육 정책 기조를 겨냥한, 다분히 '정치적'인 운동이다. 또한 이는 학생들만의 문제로 국한될 수 없다.

대학 구조조정은 지식 노동자인 교원을 비롯해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교직원들의 비정규직화 및 대규모 구조조정과 맞닿아 있다. 이와 더불어 대학 기업화는 사회적으로 지식을 확산·유통하는 역할을 맡는 대학에서 순수 학문의 입지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으므로, 전 사회적 지식체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미래라이프 대학 폐지 운동과 뒤이어 벌어지고 있는 총장 퇴진 운동은 이화인들의 문제로 한정될 수 없으며, 전 사회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때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이어진 이화인들의 투쟁은 학생 사회에 승리의 가능성을 각인시켜주었다. 학생들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총회 한번 성사시키는 것이 기적처럼 받아들여지는 오늘날, 이화인들은 자발적 의지로 본관에 모여 학교 측의 그 어떤 타협 시도에도 굴복하지 않고 결연한 자세로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 때문에 앞서 지적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화인들의 투쟁은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미래라이프 대학 폐지 이후 '총장 퇴진' 요구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지금, 더욱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촉구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지완 시민기자는 이화여대 학생이자 사회변혁노동자당 소속입니다.



태그:#이화여대, #미래라이프 대학, #정치, #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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