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 포스터. 9년 만에 돌아왔고, 기대 이하를 보여줬다.

<제이슨 본> 포스터. 9년 만에 돌아왔고, 기대 이하를 보여줬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이슨 본이 돌아왔다. 2007년 <본 얼티메이텀> 이후 9년 만이다. 강산이 한 번은 거의 다 변했을 시간, 날렵함 대신 중후함으로 무장한 제이슨 본이 스크린을 휘젓는다.

먼저 지난 시리즈부터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1편 <본 아이덴티티>에서 본은 등에 총상을 입고 기억까지 잃은 채 대서양 한 가운데서 구조됐다. 자신을 찾을 단서라고는 몸 속에 감춰진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가 전부. 자신을 찾기 위해 스위스 은행으로 향한 그는 목숨을 위협하는 CIA 조직원들의 추격에 이유도 모른 채 도주를 시작한다. 도주 중에 만난 마리라는 여자와 안전한 곳을 찾아 내달리는 본의 분투가 120분 러닝타임 속에 인상적으로 담겼다.

1편의 감독을 맡은 더그 라이만은 전형적 상업영화의 구성 가운데 이전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맨손격투의 멋을 한껏 살렸다. 그는 기억을 잃은 특수조직원이라는 설정 역시 적절히 활용해가며 전 세계 영화팬들에 본 시리즈의 멋진 서막을 알렸다. 옛 것으로부터 새 것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의 좋은 예라 할 것이다.

2편 <본 슈프리머시>는 본 시리즈에 지금의 명성을 안겨준 수작이다. 이야기와 액션이 최고수준에서 만났으며 제이슨 본을 연기한 맷 데이먼의 집중력도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2편에서 본은 영화의 시작부터 자신의 전부를 잃는다. 1편에서 함께 도망친 마리가 추격자에게 살해당한 것. 마리의 복수를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자 역으로 상대를 추적해나가는 제이슨 본의 활약이 격렬하게 펼쳐진다.

2편부터 감독을 맡은 폴 그린그래스는 장기인 핸드헬드 촬영기법을 첩보장르에 적절히 반영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더불어 1편에서 이어진 맨손격투와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는 시나리오를 적절히 조화시켜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영화를 찍어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액션, 어디서도 들은 적 없는 사과,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까지. <본 슈프리머시>는 첩보액션의 전설을 썼다.

3편 <본 얼티메이텀>은 2편에서 자신을 뒤쫓는 CIA의 음모를 파헤친 본이 부패한 조직과 전면적인 대결을 벌이는 내용이다. '트레드스톤'에 이어 '블랙브라이어'라는 극비프로젝트로 살인병기를 육성해 온 CIA가 비밀을 감추기 위해 본의 뒤를 쫓는 것이다. 국경을 초월해 런던, 마드리드, 모로코에까지 촉수를 뻗친 CIA에 맞서기 위해 본은 적의 본진인 뉴욕으로 처들어간다.

영화 곳곳 등장하는 카체이싱 장면과 모로코 탕헤르에서의 에피소드는 3편에 퇴색되지 않는 명성을 가져다줬다. 적어도 액션 측면에선 2편을 능가했다는 평이 나올 만큼 훌륭한 장면도 많다. 러닝타임 내내 압도적인 액션과 치열한 두뇌싸움이 이어지며 3편까지 이어져온 일련의 이야기를 모든 것이 시작된 곳에서 끝장내는 후반부도 더없이 깔끔했다.

성공한 전형을 답습하는 폴 그린그래스

제이슨 본 본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은 뚜벅이 액션은 이번에도 반복된다. 2편에서 마리(프란카 포텐테 분)가 맡았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니키(줄리아 스타일스 분).

▲ 제이슨 본 본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은 뚜벅이 액션은 이번에도 반복된다. 2편에서 마리(프란카 포텐테 분)가 맡았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니키(줄리아 스타일스 분).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지난달 27일 개봉한 <제이슨 본>은 3편으로 완결지어진 줄 알았던 시리즈의 새로운 작품이다. 세계관은 이어지지만 이미 완성돼 버린 이야기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곳곳에 묻어난다. 지난 3편까지 이유도 모른 채 적에게 쫓기고 복수의 동기를 얻어 복수에 나서며 그 끝에서 어렵사리 진실을 밝혔는데 이제 4편에 이르러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감독의 선택은 이제까지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었다. 3편에서의 성공적 탈주에도 본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함께 도망친 니키와도 헤어진 상태. 그러던 어느날 본 앞에 나타난 니키가 CIA와 관련된 또다른 비밀 하나를 털어놓는다. 니키로부터 테러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극비 프로젝트와 연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듣는 본, 급기야 그에게 이 말을 전한 니키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본은 다시 CIA를 상대로 진실과 복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사실상 3편까지의 이야기와 동일한 구성이다. 사랑하는 마리의 죽음으로 CIA와 맞서기로 결심하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기억을 찾아가며 마침내 악의 축을 도려낸 과정이 모두 그렇다. CIA에선 능력있는 여성간부가 포위망을 좁혀온다는 것, 그 간부의 상사로 부패한 악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결국 본이 그 모두를 극복한다는 점까지도 동일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규모와 짜임새다. 규모로 말할 것 같으면 <제이슨 본>은 모든 면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역대 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난 시리즈에선 부패한 CIA 간부들이 악당으로 나왔는데 이번엔 무려 국장이다.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화려해져 알리시아 비칸데르, 토미 리 존스, 뱅상 카셀 등 세계적인 명성의 출연진이 곳곳에 포진했다.

다만 짜임새는 많이 헐거워졌다. 고민 없이 규모를 키우고 유명 배우를 기용한 선택이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전작들에선 부패한 간부가 조직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통해 민주주의 감시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최고조로 발현됐다면 이번 시리즈는 CIA 국장이 악역을 맡아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드라마로 치닫는다.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CIA 간부와 익명의 요원 역할을 맡아 큰 존재감을 발휘한 전작의 장점도 신작에선 소멸됐다. 토미 리 존스, 뱅상 카셀,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영화팬이라면 친숙하게 여길 만한 얼굴들로 이들이 CIA 국장과 요원을 맡아 제이슨 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건 여러모로 흔해빠진 액션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몸집은 커졌지만 매력은 반감됐다

제이슨 본 CIA 국장과 요원을 연기한 토미 리 존스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맷 데이먼을 제외하곤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던 전작들과 달리 <제이슨 본>은 세계적인 명성의 배우가 여럿 출연한다.

▲ 제이슨 본 CIA 국장과 요원을 연기한 토미 리 존스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맷 데이먼을 제외하곤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던 전작들과 달리 <제이슨 본>은 세계적인 명성의 배우가 여럿 출연한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전작들에서 한껏 매력을 발휘한 신선한 장면들도 껍데기만 차용됐다. 일상적인 생활용품을 활용해 쾌감이 작렬하는 맨손격투를 펼쳤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간지각능력으로 절로 입이 벌어지는 도주극을 벌였으며, 수많은 군중 가운데 숨어 추격자를 따돌리는 일명 '뚜벅이 액션'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본 시리즈가 신작에선 평범한 장면들로 일관했던 것이다. 전작들에서 명장면을 낳은 격투와 카체이싱, 스나이퍼 등의 소재가 모두 등장함에도 전작과 같은 감흥을 주지 못한 건 고민의 부재 때문이다.

고민의 부재는 스나이퍼가 소모되는 방식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1편에서 스나이퍼와 본의 대결은 시리즈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거리를 유지하려는 스나이퍼와 거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본이 총성 한 번 없이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은 '거리'로 관객들은 다가서려는 본과 멀어지려는 스나이퍼의 대결에 신선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3편에서 영화는 스나이퍼의 거리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스나이퍼는 저격과 근거리 액션, 카체이싱까지 모든 장면에서 활약하는데 1편과 비교해 훨씬 강해졌지만 한참 덜 특별하다. 영화는 스나이퍼가 경찰특공대의 차량을 탈취해 앞을 가로막는 차량을 모두 박살내며 질주하는 장면에서 과거 비슷한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마저도 참신함보단 규모에 가까운 것이다.

본 시리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쾌감 가득한 결말 역시 사라졌다. 모비의 명곡 'Extreme ways'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반전과 여운, 통쾌함이 느껴지는 결말을 기대한 관객이 적지 않았음에도 이번 영화는 이렇다 할 특별함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 이 역시 충분한 고민이 없었던 데서 비롯됐는데 헤더의 이야기를 본이 몰래 들었다는 사실이 반전처럼 느껴져야 함에도 그렇게 연출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헤더의 진심이 무언지 미묘하게 알 수 없도록 하는 연출 역시 아니었기에 이렇다 할 감정이 남지 않는 실망스런 결말이 되고 말았다.

여러모로 새로운 시리즈는 과거만큼 혁신적이지 못했다. 한때는 눈을 씻고 보았던 혁신적 수법들이 어느새 그러려니 느껴지는 건 감독이 그 혁신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의 성공이 규모가 아닌 혁신에서 비롯됐음을 돌아봐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이슨 본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폴 그린그래스 맷 데이먼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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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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