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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14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정신을 잃은 모습.  이날 경찰은 그를 구조하는 시민들에게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14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정신을 잃은 모습. 이날 경찰은 그를 구조하는 시민들에게도 한동안 물대포를 조준발사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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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가했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8개월째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씨의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다. 백씨의 딸 도라지씨에 의하면 백씨는 지난 17일무렵부터 신장 기능이 약화되고 폐에 물이 차는 등 상태가 대단히 위중해졌다고 한다. 백씨는 민중총궐기 대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쓰러졌고, 경찰은 쓰러진 그를 향해 계속해서 물대포를 조준 사격해 과잉 진압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경찰은 물론이고 누구도 이에 대한 사과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건의 진상규명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살인미수,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강신명 경찰청장 등 경찰관계자들에 대한 수사가 전무한 탓이다. 검찰 조사는 이제껏 고발인 조사만 있었을 뿐 전혀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국가 폭력에 무참히 쓰러진 칠순 노인의 생명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경찰이 물대포를 진압용이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살수차 운용지침'을 무시하고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집중 조준 사격했다는 점에서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경찰은 물대포의 발사 각도를 15도 이상 유지해야 하고, 20m 이내의 근거리 시위대에게는 직접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안전 규정을 위반했다. 당시 백씨는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도 물대포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밖에도 경찰이 '살수차 운용지침'을 어긴 것은 한 둘이 아니다. 경찰은 가슴 이하 부위를 겨냥해야 한다는 지침을 어기는가 하면, 부상자 발생 시 구호조치를 해야 한다는 규정도 지키지 않았다. 심지어 경찰은 백씨를 구하러 온 시민에게도 물대포를 난사하는 공격본능을 나타내기도 했다. 건장한 성인마저 나가떨어지게 만들만큼 위력적이었던 물살의 세기 역시 규정 위반이었다. 결국 경찰이 관련 규정을 어겨가며 과잉 시위 진압에 나섰고 이 때문에 백씨의 목숨이 위중해졌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경찰은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가 없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황교안 총리는 백씨가 쓰러진 이틀 뒤 경찰병원을 방문해 시위 진압 도중 부상을 당한 경찰관과 의경 등을 위로했지만 국가공권력에 희생당한 백씨는 안중에도 없었다. 야만적인 국가 폭력으로 시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진상규명은 커녕 사과조차 없는 정부와 경찰. 이 모습은 극강의 권위주의가 판을 치던 70~80년대의 재림이다.

"백남기는 정식 임명 되면 말씀드리겠다"고?

이철성 경찰청장 내정자가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경찰위원회 임명동의안 심의에 출석한 뒤 취재진을 향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16.7.29
 이철성 경찰청장 내정자가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경찰위원회 임명동의안 심의에 출석한 뒤 취재진을 향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16.7.29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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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퇴임하는 강신명 경찰청장에 이어 경찰조직을 이끌 수장으로 이철성 경찰청 차장이 내정됐다. 지난 29일 경찰위원회 임명동의를 통과한 뒤에 열렸던 기자회견에서 백씨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유감 표명을 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청문회를 마치고 정식 임명이 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순경부터 시작해서 경찰청장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다운 영민한 처신이다.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지극히 정치적이거나. 그래서 비릿하고 씁쓸하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다시 말하겠다는 저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국가 폭력으로 쓰러진 시민에 대해 책임도 사과도 하지 않는 국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국가의 민낯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다'는 에두른 표현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일이 왜 나중으로 미뤄져야 하는 걸까. 임명이 되지 않으면 사과와 유감 표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사과와 유감 표명, 그리고 경찰청장 임명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잘못에 대한 사과나 유감, 입장 표명은 피일차일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백씨처럼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과를 할 요량이라면) 나중이 아니라 지금,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해야만 한다.

인사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내정자에 대한 의혹들이 하나 둘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 내정자가 정선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가 하면, 과거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시위 당시의 지휘 책임자였던 그의 과잉 폭력 진압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의 과정을 떠올려 볼 때 더 많은 의혹이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내정자의 공권력에 대한 인식과 태도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 백씨에 대한 입장 유보와 과잉 폭력 시위 진압 경험 등으로 미루어 그의 행보를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고, 시민의 안전이 공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모양이다. 벌써부터 싹수가 노랗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국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 경찰 시위대 살인진압, # 백남기씨 위중, # 이철성 경찰청장 내정자, #살수차 운용지침, #강신명 경찰청장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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