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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황진장군 이현대첩비,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비, 이치 전적지 안내판, 이치 전적지 표지석이 대둔산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광경
 왼쪽부터 황진장군 이현대첩비,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비, 이치 전적지 안내판, 이치 전적지 표지석이 대둔산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광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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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웅치와 이치의 전투 내용이 실려 있다. 기사는 '전라 절제사 권율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에서 물리쳤는데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를 침범하니(倭兵又犯梨峙) 동복현감 황진이 패배시켰다(同福縣監黃進敗之).' 하고 시작된다. 웅치와 이치 전투의 총 지휘자는 전라절제사 권율이고, 이치 전투의 최고 수훈자는 동복(전남 화순)현감 황진이라는 뜻이다.

이치로 밀려오는 왜적들을 황진이 물리쳤다

기사는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 군사를 거느리고 편장 위대기, 공시억 등과 함께 이치에 주둔해 크게 싸웠다. 적이 절벽을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총탄을 피하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종일 교전한 끝에 적을 대파했다.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풀과 나무에서도 피비린내가 났다.'라고 이어진다. 이치 전투가 얼마나 대단한 혈전이었던가와, 권율 통솔 하에 황진이 보여준 용맹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기사에는 '전투 중 황진이 탄환에 맞아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 권율이 장졸들을 잘 독려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라는 부분도 있다. 근본적으로는 권율의 출중한 지휘 능력을 칭찬하는 대목이고, 부수적으로는 본인의 부상 여부가 군사들의 사기를 결정할 만큼 황진은 장졸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맥락의 글이다.

경남 진주성 안 '김시민 장군 전공비(유형문화재 1호)'와 나란히 서 있는 '촉석정충단비(유형문화재 2호)'의 모습. 비각 옆 안내판에는 '1593년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중략)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군, 관민들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정충단(旌忠壇)의 비석'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경남 진주성 안 '김시민 장군 전공비(유형문화재 1호)'와 나란히 서 있는 '촉석정충단비(유형문화재 2호)'의 모습. 비각 옆 안내판에는 '1593년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중략)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군, 관민들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정충단(旌忠壇)의 비석'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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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민심과 군심을 좌우했다는 기록은 1593년(선조 26) 7월 16일 <선조실록>에도 나온다.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라는 제목의 이 기사 중 6월 28일 부분은 '적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왔다.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를 다해 힘껏 대항하였으므로 적은 매우 많이 죽었다. 그중 적추(賊酋,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자 여러 적군 병사들이 그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로 시작된다.

하지만 안타깝께도 황진의 전사 장면이 뒤를 잇는다. 성 안을 굽어보던 황진이 '오늘 싸움에서 적은 1천여 명 이상 죽었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 성벽 아래에 잠복해 있던 적이 위로 철환(鐵丸, 총알)을 쏘았다. 철환이 나무판에 비껴 맞고 튕겨나와 황진의 왼쪽 이마에 적중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성내 모든 사람들이 황진과 장윤(張潤)을 장수들의 으뜸으로 여기고 의지해 왔기 때문에 황진이 죽자 온 성안이 흉흉해지고 두려워했다(城中洶懼).' 이치 전투에서도 2차 진주성 싸움에서도 황진은 한결같이 장졸들과 일반 백성들의 진심어린 지지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황진이 다치거나 죽으면 사람들의 사기가 뚝 떨어졌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자를 계속 읽는다. 그런데 기사 뒷부분에 나오는 문장의 의미가 심장하다.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倭中稱朝鮮三大戰 而梨峙爲最).'라는 내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치 전적지' 표지석
 '이치 전적지'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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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기사가 기재된 날짜가 7월 1일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임진왜란 발발 첫날부터 이치전투 대첩일 사이에 조선이 일본군을 제압한 승전 사례들을 찾아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5월 7일 옥포 해전 및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 해전, 5월 18일 해유령 전투, 5월 22일 여강 전투, 5월 29일 사천 해전, 6월 2일 당포 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6월 6일 무계 전투, 6월 7일 율포 해전, 6월 15일 예천 전투, 6월 25일 운암 전투, 6월말 마진 전투, 그리고 이치 대첩이 그들이다.

왜적들의 평가는 이 전투들 중 이치대첩이 조선군 최고의 승전이라는 뜻일까? 한산도 대첩, 1차 진주성 대첩, 행주산성 대첩과 견줘서가 아니라, 첫 수군 승첩인 옥포 해전, 첫 육전 승첩인 해유령 전투, 일본군의 낙동강 수로 이용을 막아낸 무계 전투('임진왜란 의병의 첫 승전지, 어디인지 아십니까' 참조) 등보다 이치 전투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꾸는 데 더 크게 기여했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선조'수정'실록> 작성이 1643년(인조 21)에 시작되어 1657년(효종 8)에 완료되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정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50년 이상이나 지난 후에 쓰여졌다. 즉, 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기사의 내용은 일본군들이 그 날짜 이전의 전투 중 이치 승전을 최고의 대첩으로 평가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형석의 <임진전란사> 등은 이치 대첩 날짜가 7월 8일이라고 증언한다.)

문화재청 누리집에도 '(이치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앞에서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라는 문장을 두고 의미심장하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선조수정실록>과 문화재청 누리집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한산도 대첩, 행주산성 대첩, 1차 진주성 대첩이 아니라 이치 대첩, 한산도 대첩, 행주산성 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치대첩은 한산대첩, 1차 진주성대첩, 행주대첩만큼 의미있는 승전

실록에는 '이복남과 황진이 이 (웅치와 이치) 전투로 유명해졌다(李福男黃進由此著名).'라는 표현도 나온다. 실제로 나주판관에 지나지 않던 이복남은 웅치 전투 후 전라 방어사, 충청 조방장, 남원부사, 나주목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역임한 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황진도 '이치 전투에서 승리하니 체찰사 정철이 불러 익산군수 겸 충청 조방장을 시켰고(<연려실기술>의 증언)', 그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멀리 2차 진주성 싸움에까지 참전했다가 마침내 순절했다.

<연려실기술>은 황진을 두고 '황희의 5대손'으로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충청병사에까지 올랐다.'면서 '인격이 엄격하고 진중하여 기개와 절개를 숭상했다.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힘이 남보다 세고 빠른 동작이 나는 듯하였다.'라고 소개한다.

또 충청병사 때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당장 달려가려 하자 곽재우가  '진주는 고립된 성이라 지켜낼 수도 없지만, 충청도 절도사인 공께서 진주를 지키다가 죽는 것은 맡은 바 직분도 아니오.' 하고 말렸지만, 그가 '이미 가겠다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약속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식언하지는 못하오.' 하며 홍의장군과 서로 술을 권하며 이별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준다.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건립기' 비가 대둔산을 등진 채 황진장군이현대첩비를 바라보며 서 있다.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건립기' 비가 대둔산을 등진 채 황진장군이현대첩비를 바라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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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고개 정상에 오르니 '대둔산 숲속 웰빙 휴게소'라는 긴 이름을 가진 건물이 넓은 뜰을 뽐내며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 휴게소 마당 대부분의 주소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8이다.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건립기 빗돌, 이치 전적지 표지석,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비, 이치 전적지 안내판 등은 모두 이 마당의 끝자락에 실낱같이 걸쳐진 전라북도 땅에 세워져 있다. 비석들 곁에 서면 대둔산 878.9m 우람한 암석 정상부가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 마당의 많은 조형물들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이치 전적지' 표지석이다. 비문은 표지석 아래의 받침돌에 새겨져 있다. 비문은 '1993년 12월 전라북도 향토문화연구회장 이강오 찬(撰, 글을 지음) 완주군수 이동구 서(書, 글씨를 씀)'로 끝난다. 표지석이 전라북도 땅에 서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여기 이치는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수전의 한산섬, 육전의 이치, 행주를 지칭하는 3대첩의 하나인 전적지이다. 이때 왜군들의 분지(分地, 한반도를 나누어서 점령) 책임에 전라감사를 맡은 왜장 소조천융경은 금산성을 점거하고 호남의 수도인 진주성 침입을 도모하여 그의 부장 안국사혜경으로 하여금 웅치를 공략케 하였으나 안덕원에서 패퇴하고 자신은 정병 1천여를 거느리고 이치를 공격하였으나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이 치밀한 방어진 구축과 주장 황진, 비장 위대기(魏大器), 공시억(孔時億) 등이 이끄는 호남 의병 1천5백여 명의 장렬한 결투로써 적을 완전히 궤멸하는 대첩을 이루었다. 이 대첩으로 적에게 호남 침입을 단념케 하여 군량 조달의 곡창이 보전되고, 사기백배한 호남 의병이 행주, 수원 등 왜군을 강타하여 임란을 전승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표지석 왼쪽에 '이치 전적지' 안내판이 있다. 공식 안내판인 만큼 제목(이치 전적지), 문화재의 등급(전라북도 기념물 26호), 주소(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본문의 순서를 지켜 쓰여진 안내문이 나그네에게 제공된다.
 
'이곳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도 절제사 권율의 독전 하에 동북현감 황진 장군 등이 왜적을 격파한 전적지이다. 왜장 소조천융경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 전주를 침공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진 장군은 남원진에서 급히 철수해와 안덕원까지 침입한 적을 물리치고, 바로 이치로 달려가 휘하의 비장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한때 부상도 입었으나, 마침내 적을 대파하니 적의 시체가 수십 리에 즐비하였으며 아군의 피해는 적었다. 이에 왜적은 전주 침공의 야욕을 버렸으니 이 대첩을 임진왜란 3대첩(이치, 한산, 행주)의 첫째로 손꼽기도 한다.'

안내판의 내용은 문화재청 누리집에 실려 있는 '이치 전적지'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글을 읽어본다.

'이치는 완주와 금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관군 1,500명과 함께 적장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부대를 격퇴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장식한 전적지이다. 이치전투는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질 무렵까지 계속된 치열한 전투에서 우리보다 우세한 적을 대항하여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장수들의 성실한 진두 지휘와 향토병들의 불굴의 투지, 험한 지세를 이용한 철저한 대비, 차질없이 진행된 군수품 보급에 있었다. 이치전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벌어진 웅치전투와 더불어 왜적의 기세를 꺾어 전라도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유재란(1597) 때까지 7년 동안 군량 보급과 병력 보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 비, 황진장군이현대첩비건립기 비와 이치전적지 안내판 사이에 있다.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 비, 황진장군이현대첩비건립기 비와 이치전적지 안내판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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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왼쪽에 '임란 순국 무명 사백 의병비'가 세워져 있다. 황진 장군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병사들까지 잊지 않고 이렇게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산 충렬사, 울산 충의사, 금산 종용사, 합천 창의사, 의령 충익사 등 전국 주요 임진왜란 사당들이 한결같이 무명 의사들의 위패를 공손히 모시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조형물은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이다. 이 대첩비에 대해서는 그 옆에 세워져 있는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건립기' 빗돌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빗돌은 '이 (대첩)비는 황진 장군께서 순국하신 지 400주년이 되는 1993년 8월,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강오 회장과 전라일보 이치백 사장의 발의로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이현 전승지에 대첩비 건립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은 데서 건립의 첫삽을 떴다고 말한다.

그 이후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대첩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정부와 전라북도, 완주군의 지원과 함께 연차적으로 추진하면서 6년여 기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99년 5월 25일 대첩비 건립을 완성하여 준공'을 보았다. 부지 확장은 금산군의회 유승열 의원의 임야 희사로 가능했고, 전북향토문화연구회 8대 양만정 회장과 전북대학교 장명수 총장이 많은 활동을 했다. 건립기 빗돌은 사단법인 전라북도향토문화연구회 이치백 회장 명의로 세워졌다.

대첩비 옆 안내판에 옮겨놓은 비문은 꼭 읽어야

마지막으로,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옆에 세워져 있는 비문 안내판을 읽는다. 이치 전적지 표지석의 비문, 이치 전적지 안내판의 안내문,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 건립기의 기문을 두루 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첩비의 비문 읽기를 빠뜨릴 수는 없다. 물론 대첩비의 비문 자체를 읽을 수는 없으니 비 옆에 안내판을 세워둔 배려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 대첩비 안내판에 적혀 있는 비문 전문을 이 글에 옮겨 적는다. 현장에 가보지 못한 분들과, 황진 장군을 비롯 이치 전투에 참가했던 모든 선열들을 위해, 옮겨적는 데 소요되는 '내 인생의 네 시간'을 꽃으로 바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안전한 것들뿐이다.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의 비문 전문

아래는 이치 정상에 세워져 있는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의 비문 전문이다. 물론 비 자체에 새겨져 있는 원문을 사진으로 찍어와 옮긴 것이 아니라, 비 옆 안내판에 적혀 있는 것을 재현한 것이다. 문단 구분과 띄어쓰기가 없는 것은 대첩비에 새겨진 원문 자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 이현은 지금 약 400년 전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바로 그해 8월 30일(음력 7월 9일경) 동북현감 황진 휘하의 아군이 당시 바야흐로 전주를 침공하고자 상주 금산을 거쳐 대거 남하하던 왜군을 맞아 일대 격전을 벌인 곳이요, 격전 끝에 가위(可謂) 역사적인 대첩을 올려 호남을 궤멸의 직전에서 구하고, 호남을 구함으로써 후일의 조국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주장의 뛰어난 전략과 변화무쌍한 선전, 그리고 동복인 공시억, 장흥인 위대기, 전주인 황박, 남원인 소제 등 장군 막하 제 의사들의 용전이 크게 주효하여 그와 같은 대승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의 총기획관은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 장군이었다. 데저 저 천하무도의 침략광 풍신수길의 명하에 호왈 수륙 이십 만의 왜군이 이백 년 태평 속에 전쟁을 모르고 전비가 전무한 우리의 강토를 급습, 부산포에 나타난 것은 이 해 4월 13일, 다음 양일 간에 부산, 동래를 연이어 함락시킨 후 북상을 계속하여 상주, 충주의 방어선을 일거에 무너뜨린 저들은 5월 3일에는 이미 수도에 입성하였으며, 3일 전 이른 새벽에 황망히 북행 길에 오른 국왕 일행을 뒤쫓아 6월 15일에는 멀리 평양에까지 북상하여 의주의 피란 조정을 극도의 불안 속에 몰아넣었다. 조야가 최후의 보루로 믿었던 함경도도 7월 초에는 무너졌으며, 이제 조정이 당장 택할 수 있는 길은 명에의 원군 요청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호남 충의지사의 봉기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과연 호남은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물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명도 우리의 요청을 수락, 지원군을 파견하여 평양을 탈환하는 등 한때 전세를 만회하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호남에서는 전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우국충의지사들이 혹은 순수한 독서사인의 자격으로 혹은 전직 관리 또는 현직 수령으로서 각지에서 분기, 창의의 기치 아래 많은 관군 및 의병을 결집하여 왜적과의 싸움을 전개하였으며, 이현에서의 승전은 바로 그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위와 같은 위난의 상황 하에서 올린 장거였던 것이다. 그것도 비록 해상에서는 그간 옥포, 당포, 율포 등지에서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승전이 계속되었으나 육전에서는 전쟁 발발 이래 근 3개월 동안을 거의 패전의 연속으로 몰리던 차에 올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 이현은 그 전략상의 위치로 보아 여기에서 무너질 경우 호남은 일거에 적군의 말굽 아래 짓밟히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경우 당시의 전세로 보아 조국의 재흥은 어쩌면 거의 무망하였을 그러한 요충지였으며, 그러기에 영남을 휩쓴 왜군의 일지가 처음에 웅치 공격을 시도하였고, 여기에서 위 황공을 포함한 우리측 제 의사들의 항전에 부딪쳐 실패하자 바로 이어서 이번에는 보다 많은 군세를 투입하여 이곳을 공격하였던 것이 아닌가. 당시 전란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나 후세의 사가들이 한결같이 다 이현의 승전을 역사적인 대첩이라 평하고, 그 승전의 주장 황진을 뛰어난 무장으로 추대하였던 이유도 다 이러한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황공은 이듬해 6월의 저 유명한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의 명장으로서의 이름을 남기지만, 그의 명장으로서의 진가는 이미 이현전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싸움이 끝난 후 공이 동복 임지로 가기 위하여 전주를 거쳐 갈 때 시민 남녀노소가 제각기 음식을 손에 들고 앞을 다투어 연도에 나와 이 분이 아니었던들 이 지방 생령들은 온통 몰살당하였을 것이라 하며 감격의 눈물로 영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거니와, 이현전 1년 후인 계사년 말에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이정암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충청병사 황진은 용무가 초군하고 여력이 과인하였는 바 웅치전에서는 왜적의 전봉을 꺾었고, 이현의 격전에서는 이모제중의 공을 올렸습니다. 금산의 적이 전주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 모두가 이 사람의 힘이었습니다.' 라고 한 사실이라든가, 남원인 조경남, 보성인 안방준과 같은, 직접 전쟁을 겪고, 또 전선에서 싸우기도 한 이 지방 학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엄격한 사필로 유명한 우산 안방준은 1618년에 편찬을 마친 그의 <호남의록>에서 말하고 있다. '난이 일어나자 동복현감 황진은 즉시 열읍 관병과 더불어 각처 요지에 분거, 영남으로부터 호남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차단하였으며, 하루는 적 수천여 기가 웅치에 밀어닥치는지라 선등돌출, 저들의 전봉 수십을 사살하여 이를 물리쳤고, 곧이어 적군이 이번에는 이현에 대거침입, 총환이 빗발같고 천지가 진동하매 제장이 퇴축하는데 유독 공은 위대기, 공시억 등 약간 인과 더불어 종일 역전, 적환을 다리에 맞아 유혈이 임리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분격, 난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적들을 대패, 복시수리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로 인하여 호남이 득전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때 왜적의 대장도 공에게 사살되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저들이 지금토록 공을 명장으로서 기억하며, 난복불이 한다고도 말하고 있거니와, 숙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선조보감>에서도 그와 같은 이 전투에서의 공의 무공을 권율 장군의 그것과 함께 극찬하고 있다. 황공은 후일 증의정부좌찬성과 시호 무민을 받는다. 본간이 장수이며, 저 유명한 황희 정승의 5세손으로, 1550년 명종 5년에 오늘날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장신미수에 형모가 기위하고 여력이 절인하며 특히 궁마에 뛰어났던 그는 선조 9년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국경 지역에 파견되어 약 6년 동안 많은 군공을 세웠고, 선조 23년에는 통신상사 황윤길의 군관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다. '차적이 불구에 필도해 하리니 오장용차 하리라' 하며 보검 2구를 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현전 후 계사 3월에 충청병사가 된 공은 조명을 받은 바도 아니요, 자기의 영역도 아니었으되 혹은 경기도 수원, 안성, 죽산 등지에, 혹은 상주의 적암, 의령의 가력 등지에까지 나아가 적을 물리쳤고, 특히 6월 하순 30만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임박하자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 등 호남 출신 제장과 더불어 성내에 들어가 주장의 일인으로서 전후 9일 간의 혈전을 진두지휘하다 적환에 쓰러진다. 용략이 제장의 으뜸이었으며, 그래서 공이 살아 있는 한 성중이 의중하였고, 공이 쓰러지자 성도 무너졌으니 공의 죽음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성은 지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당지인들의 공통된 통한 어린 외침이었음을 역사는 전한다. 전라감사 이정암이 위의 계사 연말 보고에서 공의 진주성에서의 최후를 설명한 후, '오호라! 황진이 죽지 않았던들 진양도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외다. 공의 그 우뚝 솟은 충의애국의 절은 이를 고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외다.' 라고 끝맺은 것도, 또는 효종 3년 황공의 행장을 지은 당시의 우의정 조익이 그 글에서 '진주성 함락 당시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모두 다 황공약재언들 성필불지함의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전한 후, '그러나 비록 공은 죽고 성도 무너졌으되 적의 기세 또한 여기에서 크게 꺾이어 결국 그들도 호남 진경의 야욕을 버리게 되었으니 폐차호남 재득보전의 공은 모두 공에게 있도다.'라고 결론한 것도 다 그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공의 그 호남을 지키고 조국 재흥을 가져오게 한 공을 논함에 있어 이현전의 공적을 빠뜨릴 수가 없다. <호남절의록>만 보더라도 앞에서 거명되지 않은 최호, 양응원, 박흥남, 박기수, 노홍, 권래, 이보, 김덕명, 노인 등의 이름이 보인다. 불행히도 진주에는 사우가 모셔지고 정충단비가 세워진 지 이미 수백 년이로되 그 수백 년 동안 이곳 이현에는 표목 하나 없었으며, 비록 그간 구비의 칭송이 있었다고는 하나 세태 풍조의 급변으로 이제 그 구비마저 사라지고 있으니 뒤늦게나마 이 대첩비를 이곳에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끝으로 다년간 이 일을 추진해온 추진회 여러분의 노고가 컸음을 첨기한다. 단기 4332(서기 1999)년 5월 전국사편찬위원회위원 전북대학교명예교수 원광대학교 교수 송준호 근찬(글을 지음) 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문학박사 송하경 근서(글씨를 씀)




태그:#황진, #이치전적지, #권율, #임진왜란,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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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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