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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로 191의 '이치 대첩지 무궁화동산' 입구. 사진 왼쪽에 충장사(권율 사당)의 외삼문 '이치대첩문'이 보인다.
 대둔산로 191의 '이치 대첩지 무궁화동산' 입구. 사진 왼쪽에 충장사(권율 사당)의 외삼문 '이치대첩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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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에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倭中稱朝鮮三大戰 而梨峙爲最)'라는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들이, 한산도 대첩, 행주산성 대첩, 1차 진주성 대첩 등 익히 알려진 조선군의 대규모 승전보다도 충남 금산의 이치 대첩을 더 뼈아프게 평가했다는 뜻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에는 '이치 전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벌어진 웅치 전투와 더불어 왜적의 기세를 꺾어 전라도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유재란(1597) 때까지 7년 동안 군량 보급과 병력보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서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임진왜란 3대 대첩지는 어디, 어디, 어디?

그런데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이치 대첩을 임진왜란 3대 승전으로 기록하고 있는 <선조수정실록> 및 문화재청 누리집과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교과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산도 대첩 이후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중략) 무너졌던 관군도 재정비를 한 후 여러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다.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보급의 어려움과 의병들의 활동은 일본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강화 교섭을 시도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치 대첩 대신 1차 진주성 승전을 3대 대첩으로 인정하고 있다. 7차 교육과정 시기보다 30여 년 전의 고등학생 때 기억을 되살려 보니, 한산도 대첩, 행주산성 대첩, 진주성 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배운 듯하다.

<선조수정실록>과 문화재청 누리집의 평가는 처음 알게 되는 지식이다. 그렇다면 이치 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이거나 혹은 4대 대첩이다. 대둔산(878.9m)은 올라봤으면서 그 바로 아래에 있는,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역사적 승전지는 지금껏 답사하지 않았구나 생각해 남몰래 낯을 붉힌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으로 넘어가는 이치 싸움터로 달려간다. 

오대산(643.8m) 정상을 등지고 세워져 있는 충장사(권율 장군 사당) 건물 바로앞에서 바라본 내삼문과 그 왼쪽의 권율장군이치대첩비각의 지붕. 내삼문 바로앞도 산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이치 정상으로 올라가는 옛길이 아주 좁고, 좌우가 가파른 절벽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권율, 황진 장군 등 당시 조선군 1천5백여 명은 이 계곡 소로로 들어선 1만여 일본군 대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격멸했다.
 오대산(643.8m) 정상을 등지고 세워져 있는 충장사(권율 장군 사당) 건물 바로앞에서 바라본 내삼문과 그 왼쪽의 권율장군이치대첩비각의 지붕. 내삼문 바로앞도 산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이치 정상으로 올라가는 옛길이 아주 좁고, 좌우가 가파른 절벽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권율, 황진 장군 등 당시 조선군 1천5백여 명은 이 계곡 소로로 들어선 1만여 일본군 대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격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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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梨峙)는 배(梨)나무가 있는 고개(峙)라는 뜻이다. 이치는 우리말로 배티, 배재, 배티재라 불린다.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해발 350m의 이치는 본래 좌우가 70도나 되는 가파른 준령에 에워쌓인 좁고 험한 고개였다. 17번 국도를 타고 차량 이동을 하게 되기 전까지 이 고갯길에는 산돌배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치에는 산돌배나무들만이 아니라 한때 수많은 일본군들도 우글거렸다. 특히 1592년 7월 8일 아침 7시께, 약 1만 명을 헤아리는 일본군들이 이치로 몰려왔다.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가와 다카카케)의 군대였다. 계속 북상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 점령을 도모한 침략군이었다.

적들은 본래 남해를 지나 한성까지 뱃길을 장악하고, 육로로는 남원을 치고 전주성을 접수함으로써 곡창 지대를 차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과 곽재우 등 의병들의 분전에 막혀 그 꿈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쓴맛을 본 적들은 할 수 없이 충청도를 지나 금산에 집결했다가 전주성으로 가는 대안을 채택했다.

이치를 넘어 전라도 곡창을 노리는 일본군

충장사(권율 사당) 안의 권율 장군 초상(일부)
 충장사(권율 사당) 안의 권율 장군 초상(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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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은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두 고개를 막아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하기로 했다.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은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 비장 박형길 등 1000여 장졸을 웅치로 보내 적의 진로를 끊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권율 자신은 동복(전남 화순)현감 황진, 비장 위대기, 비장 공시억, 기병장 권승경 등 1500여 장졸과 함께 이치에 진을 쳤다.

일본군은 6000여 명이 웅치로, 1만여 명이 이치로 진격해왔다(웅치 전투에 대해서는 <웅치 전적비 '노란 리본', 역사가 이어지는 감동> 참조).

적들은 금산까지 오는 동안 연전연승을 한데다 조선군과는 군대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으므로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권율은 적군의 위세가 대단하고 숫자도 많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대비에 철저를 기했다.

권율은 이치 고개의 험준한 굴곡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군대 조직부터 지형에 맞춰 재편했다. 그 후 군사들에게 각자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단위별로 훈련을 시켰고, 곳곳에 목책(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과 녹채(鹿砦, 대나무를 세워 사슴뿔처럼 만든 울타리)를 세워 방어에 도움이 되는 시설들도 구축했다.

조총의 공격으로부터 아군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장(女墻, 성이나 바위 위에 낮게 보태어 올린 담)도 쌓았다. 나무 사이와 통로 요소 등에 거마(拒馬, 둥근 통나무에 창을 박아놓아 적군 기병의 진격을 막는 방해물)와 철질려(鐵蒺藜, 서너 개의 발을 가진 쇠못)를 깔았고, 함정도 팠다.

이치 대첩이 가능했던 두 이유 중 하나, 철저한 수비 준비

권율은 높은 곳에 주작, 청룡, 백호, 현무 등 오색 빛깔의 기치를 세워 적들의 간담을 떨어뜨리는 계기로 삼았다. 곳곳에 연기를 피워올려 적들이 아군의 병력 수를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도 썼다. 북, 징, 날라리 등 악기들을 요란하게 울려 아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다는 사실을 적들에게 공공연히 알렸다.

그래도 적은 수적 우세를 과신했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 안으로 들어왔다. 적들은 각양각색의 갑옷과 투구를 갖춘 채 곧장 산 중턱으로 진입했다. 심지어 적들은 타고 있는 말들조차도 백마, 흑마 등 요란한 빛깔에다 안장까지 모두 다른 색으로 장식하여 군대의 겉모습을 휘황찬란하게 꾸몄다.

적들이 아니라 아군이 오히려 주눅이 든 낌새였다. 권율은 장졸들을 향해 "오늘 이 싸움은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으며, 죽음만 있을 뿐 삶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선봉은 황진 장군이 맡았다. 전투는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골짜기 가득찬 창검 부딪히는 소리, 외마디 비명소리, 말 울음소리는 10리 아래 상가리 금곡에서도 생생하게 알아 들을 수 있을 만큼 핏자국이 선연했다.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 현판 아래 중문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사진으로도 확인된다. 이 종이에는 '방문객님, 문을 꼭 닫아주세요. 새와 쥐가 들어옵니다'가 쓰여 있다.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 현판 아래 중문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사진으로도 확인된다. 이 종이에는 '방문객님, 문을 꼭 닫아주세요. 새와 쥐가 들어옵니다'가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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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은 이미 조선과 일본 모두에 알려진 용장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무관으로 바다를 건너갔던 황진은 일본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눈부신 무예를 뽐낸 바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새 두 마리를 잇달아 맞춰 떨어뜨렸다. 그는 스스로 동인이었지만 서인인 정사 황윤길에 동의해 전쟁 발발 대비를 주장했다.

황진은 칼 두 자루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1591년 3월 1일 귀국 후 그는 '이 칼로 왜놈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황진이었으니 당연히 이치 전투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큰 나무를 조총 방패로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날린 화살은 어김없이 적장을 말 아래로 떨어뜨렸고, 때로는 주인 잃은 전마(戰馬)가 잔뜩 치장을 한 채 우리 진영 안으로 쫓아들어 와 아군의 사기를 높여주기도 했다.

비장 위대기도 복병들을 지휘하여 적의 옆구리와 배후를 쳤다. 비장 공시억은 군사들을 두 줄로 배치해 교대로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리고 돌을 던짐으로써 적들을 철저하게 교란했다. 대장 권율은 금빛과 검은 색깔이 어우러진 갑옷과 투구로 위엄을 갖춘 채 앞장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게다가 권율은 잠시 싸움이 주춤할 때면 그 동안 눈여겨 보아둔 비겁한 군사들을 추려내어 직접 처형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군율은 삼엄했고,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와중에 조총 탄환이 날아와 황진의 머리에 맞았다. 황진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위대기가 칼을 뽑아들고 달려나가 왜적 조총수의 목을 잘랐다. 하지만 황진이 쓰러지는 것을 본 일본군들은 기세가 되살아났다. 순간적으로 아군은 밀렸고, 적들이 진지 안까지 들어왔다.

이치 대첩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 장수들의 솔선수범

대장 권율이 이 광경을 보고는 크게 고함을 지르며 장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권율의 장검은 단칼에 적장의 머리를 뀄다.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든 또 다른 적장도 이내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다시 아군의 사기가 충천해졌다.

이윽고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들은 묵산리 서북쪽 영정곡(태고사 삼거리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병장 권승경의 복병에게 또다시 최후의 일격을 당해야 했다. 그 후 적들은 금산성 안에 숨어버렸다. 적들은 다시 전라도로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고경명 의병군, 조헌 의병군과 두 차례 대전을 치른 후 9월 17일 스스로 금산을 버리고 물러갔다.

권율 장군 대첩비각 안에 있는 두 개의 비와, 사진 왼쪽 뒤로 사당이 보이는 풍경
 권율 장군 대첩비각 안에 있는 두 개의 비와, 사진 왼쪽 뒤로 사당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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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승리로 인정받고 있다. 이치대첩기념제추진위원회가 펴낸 <이치대첩 423주년 기념제>는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육전(陸戰) 3대 대첩 중 최초의 승전으로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의 전세를 뒤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배재 전투의 승첩과 함께 임실, 진안, 금산 일원에서 관·의병이 총력전을 펼친 결과 호남 지방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조선의 병참 기지를 확보하여 국력 회복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라고 평가한다.

두 군데 있는 이치 전적지

그런데 이치 전적지가 두 군데 조성돼 있어 답사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 곳은 '금산 이치대첩지(충남 기념물 154호)'라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17번 국도변으로, 충장사(권율 장군 사당)와 권율장군이치대첩비가 있는 곳이다. 충장사의 주소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91로, 진산면에서 완주군으로 넘어가는 이치 고개의 거의 첫머리 지점에 있다.

다른 한 곳은 이치 정상이다. '이치 전적지(전북 기념물 26호)'라는 큰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이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3번지로, 황진장군 이현대첩비, 임진왜란 무명 사백 의병비, 이치전적지 비 등도 볼 수 있다(산북리 산15-3번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8 대둔산숲속웰빙휴게소 마당과 경계선을 이룬다. 빗돌들은 모두 이 경계선 바로 밖 전라북도 쪽에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산북리 산12-15번지 주소로는 이곳을 찾을 수 없다).

권율 장군 사당과 대첩비로 들어가는 외삼문이다. '이치대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권율 장군 사당과 대첩비로 들어가는 외삼문이다. '이치대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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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이치대첩지'에서 '이치전적지'까지는 줄곧 오르막이지만 거리는 1.5km 정도밖에 안 된다. 따라서 통영대전고속도로에서 찾아온 나그네는 저절로 권율 장군 사당과 대첩비부터 둘러보게 된다. 충장사 바로 아래 17번 국도변에 세워져 있는 '이치대첩지 무궁화동산' 팻말 옆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치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2만여 병력의 일본군이 호남으로 나아가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 하였다.

이때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 장군이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싸워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전주성과 호남 평야를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첫 육전 승리를 장식한 이치대첩 또는 이치싸움이라 하며, 여기에 힘입어 이후 권율은 행주대첩과 웅치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권율장군이치대첩비가 모셔진 비각은 충장사 외삼문 바로 안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본래 비는 1940년 일제 경찰이 부수어버렸고 지금 보는 것은 1964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본래 비는 '원수 권공 이치 대첩비'(문화재자료 25호)로 지금 상단 부분만 남아 있다.
 권율장군이치대첩비가 모셔진 비각은 충장사 외삼문 바로 안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본래 비는 1940년 일제 경찰이 부수어버렸고 지금 보는 것은 1964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본래 비는 '원수 권공 이치 대첩비'(문화재자료 25호)로 지금 상단 부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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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무궁화가 식재돼 있는 오르막 사잇길로 들어서면 금세 이치대첩문이 보인다.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로 들어가는 외삼문인데, 이곳이 대단한 전적지인 만큼 현판도 그에 걸맞게 붙였다. 사당이므로 외삼문은 가운데 문까지 활짝 열려 있지는 않고, 오른쪽 작은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권율장군이치대첩비(문화재자료 25호) 비각이 바로 눈앞에 서 있다. 안내문부터 읽고 난 뒤 비각 안을 들여다 본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전라도에 침입하려던 일본군을 이치(梨峙, 배티 또는 배재)에서 물리친 사실을 새긴 비석으로, 이 전투를 이치대첩(梨峙大捷)이라고 한다. 원래 '원수권공이치대첩비(元帥權公梨峙大捷碑)'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지은 비문을 새겨 금곡사(金谷祠)와 함께 1902년 금곡에 건립되었다.

이치대첩 당시 싸울 때 나던 쇠소리가 이치에서 약 10km 떨어진 금성면 상가리 금곡(金谷)까지 들렸다고 한다.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금곡에 건립되었던 비와 사우(祠宇, 사당)가 파괴되었다. 현재의 비석은 1964년에 진산면 묵산리에서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중턱에 다시 세운 것이다."

충장사는 해발 643.8m 오대산을 등진 채, 정면으로는 본래 금곡사가 세워졌던 상가리를 바라보며 서 있다. 예상했던 만큼 웅장하지는 않지만 앞뒤 산세가 맑고 시원한데다, 이치 고개 정상 너머로 드러나보이는 대둔산의 위용도 두드러져, 나그네의 기분을 한껏 시원하게 해준다. 게다가 이곳은 일본 침략군을 압도한 3-4대 대첩지가 아닌가. 왜적들을 격퇴시킨 기쁨에 겨워 가슴이 터지도록 만세를 불렀을 당시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조용히 사당의 문을 열어 본다.

충장사 내삼문의 오른쪽 열린 문으로 사당 현판이 보이는 모습. 현판 아래 사당의 가운데 문살에 흰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이 종이에는 '방문객님 문을 꼭 닫아주세요 새와 쥐가 들어옵니다'라는 컴퓨터 글씨가 쓰여 있었다.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이 풍신수길을 두고 "얼굴이 쥐를 닮은 형상이라 전쟁을 일으킬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하고 선조에게 보고한 사실을 생각나게 하는 종이였다.
 충장사 내삼문의 오른쪽 열린 문으로 사당 현판이 보이는 모습. 현판 아래 사당의 가운데 문살에 흰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이 종이에는 '방문객님 문을 꼭 닫아주세요 새와 쥐가 들어옵니다'라는 컴퓨터 글씨가 쓰여 있었다.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이 풍신수길을 두고 "얼굴이 쥐를 닮은 형상이라 전쟁을 일으킬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하고 선조에게 보고한 사실을 생각나게 하는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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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웅치, 이치 관련 기사
전라절제사 권율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다. 여기서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했다. 왜적은 다시 이치(梨峙)를 침범했는데 동복현감 황진이 무찔렀다.

본래 적은 금산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로 침입하려 했다. 나주판관 이복남이 황박, 정담 등과 요해처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했다. 감사 이광이 군사를 보내어 도왔다. 왜적의 선봉 수 천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은 이복남이 제일 앞에, 황박이 중간에, 그리고 정담이 웅치 정상부에 포진하여 삼중으로 적과 맞섰다). 이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이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 적은 병력을 총동원했다. 적들이 산골짜기에 가득했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이복남 등이 적의 한 무리와 맞서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고, (2진을 구성하고 있던)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이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다. 정담이 붉은 깃발 아래 백마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였다.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이복남의) 나주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만 남아 포위를 당했다.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하기를 권했지만 정담은 '적병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내 몸을 위해 도망가서 적의 기세를 올려줄 수는 없다.' 하고는 꼿꼿하게 서서 동요없이 활을 쏘아 계속 적을 맞추었다. 하지만 적병이 사방을 포위하고 군사들이 모두 흩어지면서 정담 혼자 힘이 떨어져 순절하였다. 이때 종사관 이봉도 전사하였다. (중략)

왜장이 또 대군을 출동시켜 이치를 침범했다.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장 위대기, 공시억 등과 함께 재에 주둔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절벽을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총탄을 피하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종일 교전을 하여 적을 대파했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풀과 나무에서도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전투 중 황진이 탄환에 맞아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 권율이 장졸들을 잘 독려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倭中稱朝鮮三大戰 而梨峙爲最). 이복남과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은 웅치 전투지에서 (조선군의) 죽은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무덤 몇 개를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신들을 조문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눈치챘겠지만, 실록의 이 기사는 7월 1일자의 것이다. 그런데 이치 전투는 7월 8일에 벌어졌다. <연려실기술>에도 7월 8일로 나온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실록에 전투 상황이 기록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기사가 <선조'수정'실록>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1643년에 시작되어 1657년 집필이 완료되었다. 일지가 아니라 역사책인 것이다. 그래도 실제 전투일보다 며칠 앞선 날짜에 전투 전개 상세 내용이 수록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덧붙이는 글 | 본문에 밝혀 두었습니디만, 이치전적지는 충청남도 기념물과 전라북도 기념물 두 곳이 있습니다. 두 곳은 거리가 1.5km로 아주 인접해 있지만,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것은 권율 장군 중심, 전북 완주군 운주면의 것은 황진 장군 중심으로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 함께 다루면 기사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관계로 이 글에서는 충장사와 권율장군대첩비만 다루고, 황진장군 기사는 후속편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태그:#권율, #황진, #이치전투, #충장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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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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