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시인 백석이 쓴 '국수'에는 이런 시구가 나온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 중에서

속이 출출할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그릇의 국수는 친구처럼 반갑다. 호르륵 허기진 뱃속으로 들어가는 부드러운 국수 가락은 한없이 수수하기만 하다. 강물에 노를 젓듯 젓가락으로 휘익 저으면 희스무레한 면발이 축 늘어진 채로 건져진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자랑도 하지 않겠다는 듯.

37년 동안 끓인 할머니의 국수

메콩강에서 쌀국수를 팔고 있는 띠엡 할머니 출렁이는 배 위에서 할머니가 방금 만 국수 한 그릇을 건네고 있다.

▲ 메콩강에서 쌀국수를 팔고 있는 띠엡 할머니 출렁이는 배 위에서 할머니가 방금 만 국수 한 그릇을 건네고 있다. ⓒ EBS


메콩 강에서 37년 동안 끓여온 찐 더 띠엡 할머니(68)의 국수에도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다. 새벽 2시부터 불을 피워 육수를 내고, 국수 위에 얹을 고명을 준비해, 동이 트기 전 국수 장사를 나간다. 세상은 아직 깜깜한 이불 속 같지만, 할머니의 작은 배는 메콩 강 물길 위를 달린다.

할머니가 국수를 파는 곳은 베트남에서 제일 큰 까이랑 수상 시장.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농산물이 도매로 거래되는 곳이다. 할머니의 국수는 꽤 유명하다. 미국과 싱가포르의 셰프들도 국수 맛을 보려고 일부러 할머니를 찾아왔다. 베트남 방송국의 한 요리프로그램에서 할머니의 국수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국물"로 소개된 바 있다. 할머니의 국수를 맛보기 위해 수상 시장을 찾는 손님들까지 생겨나면서, 까이랑 수상 시장의 명물이 되었다.

할머니의 작은 배에는 쌀국수를 만들 재료가 그득 실려 있다.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한 국수 고명 바구니와 고기 말이 꼬치를 담은 양푼, 일회용 용기 등등.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능숙한 손놀림으로 따뜻한 국수를 뚝딱 말아낸다. 할머니의 배는 손님을 찾아 분주히 메콩 강을 누빈다. 여객선을 타고 온 관광객을 찾아 넉살 좋게 국수 맛 좀 보라고 말을 건넨다. 몽땅 빠진 앞니를 훤히 드러낸 채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국수를 담아낸다.

한 그릇의 국수 속에 담아내는 것은 육수와 채소만이 아니다. 할머니의 국수 속에는 세상의 모진 바람 속을 지나온 기억도 담겨 있다. 할머니는 국수를 팔아 8남매를 키웠다. 쌀 짐을 져 나르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8남매의 입성을 당해낼 수 없었다.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 없지만, 타고난 손맛으로 국수를 만들어냈다. 험한 물살을 가르며 국수 한 그릇을 팔기까지, 할머니의 허리와 무릎은 잠시도 편히 쉴 새가 없었다.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하지만, 할머니는 장사를 그만둘 수가 없다. 할머니에게는 맏이로서 봉양해 할 노모가 살아 계시다. 지난해 10월 할머니네 집에 불이 났다. 화재의 원인은 전기 합선이었다. 불 난 줄도 모른 채 자다가 이웃집 아줌마가 알려줘 죽다 살아난 셈이었다. 식구들은 다 빠져나왔는데, 노모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 한 아저씨가 뛰어들어가 노모를 업고 나왔다. 까맣게 타 버린 잿더미 앞에서 할머니는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할머니는 말한다.

"슬플 때만 슬프고 금방 다 잊어버려요. 계속 슬플 수는 없잖아요."

슬픔에 지지 않기 위해

띠엡 할머니가 가진 배 두 척 지붕이 있는 배는 할머니네 집, 그릇이 쌓여 있는 배는 할머니의 간이식당이다.

▲ 띠엡 할머니가 가진 배 두 척 지붕이 있는 배는 할머니네 집, 그릇이 쌓여 있는 배는 할머니의 간이식당이다. ⓒ EBS


먼저 배를 한 척 구했다. 나무로 벽을 만들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둘렀다.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서 옷과 밥을 주었다. 노모는 여섯째 동생네 집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아버지 같은 맏이였다. 할머니가 1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일곱 동생을 돌봤다. 그래서인지 노모에게 할머니는 각별한 자식이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할머니는 틈만 나면 노모를 뵈러 간다. 노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몸이 불편한 노모를 씻겨준다.

올해로 아흔두 살인 노모는 지방관공서로부터 장수증서까지 받았다. 사실 만큼 사셨다지만, 세상에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면 할머니는 덜컥 겁부터 난다. 다정하게 엄마라고 부르면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노모가 곁에 있어 다행스럽다. 할머니는 형편이 빠듯한 동생네 집에 간간이 생활비를 건넨다. 맏이로서 책임지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대신하고 싶다.

물론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응웬 반 증 할아버지(68)의 도움이 컸다. 십 년 전 할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한쪽 시력을 잃었다. 그때 손가락도 잘려나갔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일감은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국수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새벽마다 불을 피워 국수 육수를 안치고, 국수 재료를 배에 실어 나른다. 낡은 배를 점검하는 일도 할아버지의 몫이다.

할머니에게도 특별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 다섯째 딸이다. 이혼하고 아이와 함께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다. 딸은 수박감별사다. 잘 익은 수박과 덜 익은 수박을 구별하는 일이다. 수박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익은 정도를 알아낼 수 있다. 잘 익은 수박에서는 '통통', 덜 익은 수박에서는 '퍽퍽' 소리가 난다. 시간당 수입은 짭짤하지만, 불규칙적인 일이라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콩고 강에서 코코넛 장사를 하는 넷째 자식이나, 음료수를 파는 일곱째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 할머니는 딸과 함께 국수 장사를 하고 싶다. 이문은 박하지만, 꾸준한 벌이는 되기 때문이다. 강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 특유의 긍정과 인내를 딸이 배웠으면 싶다. 그러나 딸은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려면 집도 마련해야 하고, 교육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노모 띠엡 할머니가 노모와 마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노모 띠엡 할머니가 노모와 마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 EBS


할머니의 손맛은 집에서도 빛난다. 할머니가 불 앞에 서면, 아들과 며느리는 주방 보조로 나선다. 할머니는 "우리 집 며느리들은 호강한다"고 농담하듯 말한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둘러앉아 할머니가 손수 만든 음식을 먹는다. 그 맛이 일류 레스토랑 부럽지 않다. 가족들 사이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 아닌가.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들기까지, 거쳐야 할 수많은 과정이 놓여 있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양념한 다음, 잘 익혀낸다. 이 중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해도 맛의 균형은 흐트러진다. 맛은 정직하다. 그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공을 들인 할머니만의 더딘 시간들. 할머니가 만든 국수의 비법이지 않을까.

다른 비법이 있다면, 할머니 집에는 냉장고가 없다. 아침나절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는 매일 시장에 간다. 다음 날 필요한 고기와 채소를 조금씩 산다. 할머니네 집에는 편리한 주방 시설도 없다. 작은 나룻배를 집으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일회용 '부루스타'(휴대용 가스 버너)로 국수 고명과 고기 꼬치를 조리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바지런히 준비한다.

값싼 국수지만 대충대충 하고 싶지는 않다. 어둠을 밝힌 전등불 아래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발을 맞추다 보면, 세상의 윤곽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국수를 먹는 사람에게는 허기짐을, 국수 파는 할머니에게는 궁핍함을 면해줄 따뜻한 국수 한 그릇. 그 속에 할머니가 지켜낸 정직한 맛이 깃들어 있다. 어제와 같이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쌀국수는 메콩 강의 새벽 어스름을 가르며, 세상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메콩강 국수 할머니> EBS 다큐 영화 <길 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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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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