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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규

혁련지는 검으로 그물을 끊어내고 있으나 그럴수록 그물을 그녀의 몸을 점점 죄고 있었다.

"덫이에요!"

혁련지가 소리쳤다.

"나는 올가미야."

관조운도 소리쳤다. 혁련지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그물을 자세히 살폈다.

"차분하게 올을 자르면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형은 어때요?"

혁련지가 위를 쳐다보며 관조운을 향해 물었다.

"나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관조운이 대답했다. 네 발 달린 짐승을 잡는 올가미라서 그런지 두 팔이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시간이 주어지면 벗어날 법도 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짐승 가죽옷을 비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중년 남자다. 누가 봐도 사냥꾼 같았다. 그는 화살을 메긴 활을 팽팽히 당기며 관조운과 혁련지를 번갈아 겨냥했다. 여차하면 쏠 태세다.

"너희들은 누구냐?"
"보다시피 산중에서 길을 헤매는 과객입니다."

관조운이 대답했다.

"거짓말 마라, 여기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따로 목적이 있지 않고는 이 깊은 산중까지 올 턱이 없다."

사냥꾼이 노기에 밴 목소리로 추궁하듯 말했다.

"일단 이 줄을 풀고 얘기합시다."

관조운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자 "움직이지 마!" 사냥꾼이 짧게 소리쳤다. 동시에 관조운의 귀 옆으로 피융! 하는 소리가 스쳤다. 사냥꾼이 화살을 날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움직이면 그땐 목줄을 꿰뚫을 거다."

사냥꾼이 어느새 화살을 메긴 채 말했다.

"너희들 정체가 뭐냐?"
"…."

관조운과 혁련지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사냥꾼의 행태로 보아하니 금의위나 은화사 쪽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짐승을 잡으려고 쳐놓은 덫과 올가미에 사람이 갇혔는데 구해줄 생각은 않고 추궁과 위협을 하는 걸 보니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녹림채 일당? 관조운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생각이 스쳤으나, 녹림채 무리라면 대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에서 활동하며 무엇보다 혼자 다니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기는 관조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쫓기는 사람들이에요."

구덩이 안에서 혁련지가 말했다.

"누구한테 쫓기느냐?"
"… 실은 관(官)으로부터 쫓기는 신세예요."
"무슨 죄를 지었기에 관부가 너희를 쫓는다는 것이냐?"

사냥꾼의 어조가 담담해졌다.

"일단 우리를 여기서 꺼내 주시면 모든 걸 털어 놓을게요."

혁련지의 나긋한 어투 때문인지 사냥꾼이 잠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일단 낭자의 검을 내게로 던지시오."

사냥꾼의 어조가 경어로 바뀌었다. 혁련지가 심운검을 구덩이 밖으로 던졌다. 사냥꾼이 검을 집더니 검집에서 칼을 꺼냈다. 그는 검을 햇살에 잠깐 비추어보더니 허공을 향해 두어 번 휘둘렀다.

"허튼 짓 할 생각은 말어."

사냥꾼이 낮은 목소리로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더니 잡목 사이로 들어가 밧줄을 잡아당기자 혁련지를 덮어쓴 그물이 당겨올라 갔다. 이어 그물이 벗겨지자 혁련지가 땅에 내딛었다. 사냥꾼은 검을 손에 쥐고 경계를 풀지 않으며 관조운을 향해 말했다.

"자넨 그대로 있어!"

사냥꾼은 상황이 돌변하더라도 여자인 혁련지는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혁련지는 일부러 상냥한 표정과 태도를 지으며 자신들이 지금 금의위에게 쫓기고 있어 깊은 산중으로 도망쳐 온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죄를 지어 금의위에 쫓기고 있냐고 사냥꾼이 물었다. 혁련지는 자신은 상인인데, 탐학한 관리의 무리한 요구를 참다못해 강호인의 손을 빌어 약간 손좀 봤다고 했다. 그러자 관리가 금의위에 고발을 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혁련지는 내막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나 자신들이 강호인이자 상인이니 만큼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얽혀들지 않게 할 것이라고 사냥꾼을 안심시켰다.

"당신들이 금의위에 쫓긴 다는 증거가 있소?"
"당장 증거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머지않아 관병이 이 산을 뒤지고 있는 걸 당신이 목도할 것입니다. 그중에는 금의위 복장을 한 지휘관이 있다는 걸 소녀의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

사냥꾼은 침묵을 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좋소, 당신들을 믿겠소."

사냥꾼은 벌떡 일어서 관조운을 매달고 있는 줄을 풀어줬다. 관조운은 이각을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몸을 세우자 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엽사께서는 왜 관(官)을 꺼리시는 건가요?"
"사연이 있소, 더 이상 캐묻지 말기 바라오."

사냥꾼은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짧게 대답만 했다. 그러더니 소림으로 가기 위해선 낙양으로 가야 하고 낙양까지 가려면 운부산에서 작령현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작령현까지는 하루 반 길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멀리 가진 못한 것 같았다.

"오늘은 날이 저물어가니 내일 내려가도록 하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면 밤새 제자리에서 맴돌 수도 있소. 내가 사냥을 위해 지어놓은 움막이 있으니 거기서 일단 쉬도록 하시오."

사냥꾼이 말을 마치자 앞장서 갔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그의 뒤를 따랐다. 사반시진 정도 가자 전나무가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사냥꾼이 한 곳을 가리키자 큰 나무 곁에 나뭇가지로 위장한 움막이 보였다. 어른 가슴 높이에 잡목으로 얼기설기 지붕과 벽을 엮어 겨우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날은 벌써 어둑해졌다. 사냥꾼이 움막 한 귀퉁이의 보따리를 풀더니 손바닥만한 덩어리를 일행에게 주었다.

"시장할 것이니 이걸로 배를 채우시오. 말린 노루고기요. 하지만 불은 피워선 안 되오."

관조운은 이 심산유곡에 누가 온다고 불을 피우지 말란 것인지 의아했다. 맹수들의 공격을 대비하려면 오히려 불을 피워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댁들은 여기서 머물도록 하오. 내가 쉬는 곳은 따로 있으니."

사냥꾼은 말을 마치더니 몇 그루 건너 우람한 나무에게로 갔다. 곧이어 능숙한 솜씨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마치 평지를 오르내리듯 자연스럽고 재빨랐다. 자세히 보니 가지와 가지 사이에 나무가지를 엇갈려 만든 자리가 보였다. 그는 나무 위에서도 생활하는 것 같았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피곤 절어 누추한 자리도 마다않고 벌렁 누웠다.

"사매는 저 사냥꾼을 어떻게 믿고 우리가 금의위에게 쫓긴다고 말한 거야? 대개 사람들은 관에 쫓긴다면 뒷일이 무서워 일단 피하고 볼 텐데."

관조운이 슬며시 물어보았다.

"사실 저도 모험을 한 거예요. 이렇게 깊은 산중에서 외따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관이나 대처의 세도가들을 싫어하잖아요. 사람에 따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일 수도 있구요. 혹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구요. 그럴 경우엔 우리와 그들이 동병상련 처지가 되는 거죠."
"사매의 총기는 늘 날 감탄하게 해."

관조운은 옆으로 돌아누우며 혁련지를 끌어안았다. 하루종일 산을 오르내리느라 땀에 전 몸이지만 그녀에게서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움막 밖으로 어둠이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마른 나뭇잎이 버석거리는 자리지만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남녀는 금침(衾枕)처럼 아늑했다. 밤 짐승들이 부산해지도 전에 그들은 아득하게 곯아떨어졌다.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귓속을 파고드는 절박한 소리에 관조운은 벌떡 일어났다. 옆을 보니 혁련지도 일어나 앉아있다. 사냥꾼이 움막의 휘장을 걷고 급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쫓기는 것이 분명하구료. 지금 관병들이 산을 뒤지고 있소."

관조운과 혁련지가 급히 움막 밖으로 나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위는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다. 야행성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어둠을 찢으며 어디선가 들려왔다.

"멀리서 횃불이 보였소. 내가 있는 나무에서는 산자락 몇십 리까지 볼 수 있소." 

남녀가 이동 준비를 하자 사냥꾼은 신속한 동작으로 움막을 걷어냈다. 불과 일촌도 안 돼 움막이 있었던 자리는 그저 짐승이 뒹군 자리처럼 되었다.

"날 따라 오시오."

사냥꾼이 짧게 말하고는 앞장 서 갔다. 그의 발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캄캄한 밤 짐승이 다니는 길로 가면서도 발디딤 한 번 어긋나지 않았다. 한 시진 쯤 가자 날이 부옇게 밝아왔다. 사냥꾼이 멈춰섰다. 앞에 십여 장이 넘는 낭떠러지가 있고 그 밑으로 가파른 계곡의 경사면이 이어졌다. 사냥꾼이 풀숲을 뒤척이더니 수십 길의 칡넝쿨 줄을 가져와 비탈에 서 있는 나무에 걸었다.

그가 먼저 줄을 타고 내려갔다. 이어 관조운과 혁련지도 내려갔다. 다시 우거진 숲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 식경을 가자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사이로 두어 마장 폭의 물이 흘렀다. 사냥꾼은 걸음은 멈추고 손으로 입나팔을 만들더니 '쓰꿍, 쓰꿍, 쓰으윽꿍' 하는 새소리를 냈다. 계곡 건너편에서 비슷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왼손에 활을 들고 어깨에 활통을 멘 사냥꾼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관조운과 같이 간 사냥꾼이 먼저 계곡을 건너 가 활을 든 사냥꾼과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관조운과 혁련지에게 건너오라는 손짓을 했다. 활을 든 사내 역시 중년 남자였다. 사냥꾼답게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체격이 다부졌다. 눈은 수탉처럼 살아 있으되 그 너머를 응시하는 듯한 눈길이다. 관념의 세계를 간직한 눈빛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냥꾼이 아닌 어딘지 모르게 먹물이 밴 구석이 있다고 혁련지는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무협소설 무위도는 매주 월, 수, 금요일 게재됩니다.



태그:#무위도, #무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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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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