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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찾아간 박타푸르에서 ‘비욘드 네팔’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안내자가 돼주었던 네팔 소녀 씨라파. ⓒ 송성영
카트만두행 버스는 포카라를 벗어나 비좁은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다. 차량들이 서로 폭 좁은 도로를 추월하는 것은 다반사다. 인도에서부터 이미 숱하게 경험을 했기에 이제 이골이 났다. 곡예 운전에 무감각해진 나는 창밖 풍경을 즐긴다.

도로 주변 곳곳에 강줄기가 보인다. 히말라야 설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강물이다. 굽이치는 강줄기에서는 고무보트를 타고 힘차게 노를 저어가며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이고 수심 낮은 폭 좁은 샛강에서는 아이들이 발가벗고 물놀이 하는 모습도 보인다.

농부들의 논밭을 풍요롭게 해주는 생명의 젖줄인 강물은 사람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도시에서 쏟아내는 온갖 오염물을 껴안고 바다로 흘러간다.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저 네팔의 강줄기가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삼라만상 모든 인연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네팔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그렇다. 혼자서 외롭게 떠돌고 있지만 바다가 온갖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품어 안듯이 난생 처음 만나게 될 낯선 도시, 박타푸르 어딘가에 바다처럼 너른 품을 가진 사람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내게 다가온 네팔 소녀

포카라에서부터 거의 6시간 만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곧장 박타푸르(Bhaktapur)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낡은 자동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네팔의 중심지, 카트만두의 첫 인상은 혼잡하고 탁하다. 더위와 함께 탁한 공기가 숨 막히게 다가온다.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마치 우리의 경기민요인 방아타령처럼 흥겹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네팔 청년에게 물었더니 네팔에서 농부들이 일할 때 부르는 전통민요, 일노래라고 한다. 듣고 또 들어봐도 우리의 방아타령 "에헤헤야, 에헤라~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곡조와 비슷하다.

박타푸르에 내려 무조건 '비욘드 네팔'을 찾아 다녔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영어를 할 줄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어 물어봤지만 '비욘드 네팔'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줄지어 서 있는 택시 기사도 모르고 경찰조차도 처음 듣는 단체라며 고개를 돌린다.

엔지오 단체, '비욘드 네팔'에서 변호사 출신의 네팔 남자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한국인 여성, 정성미씨가 이메일을 통해 알려준 전화번호가 있었다. 하지만 공중전화 부스조차 보이지 않는다. 네팔에 들어서면서 손전화기를 정지시켰다. 그렇다고 전화 한 통화를 위해 네팔에서 통화가 가능한 심카드를 따로 구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다친 무릎을 압박해 오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절룩거리며 무모하게 30여 분을 헤매고 다녔다. 생수도 바닥이 났다. 입술이 바싹 바싹 타들어가고 옷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작은 구멍가게로 들어가 '비욘드 네팔'을 물었더니 가게 주인은 영어를 할 줄 모른다. 때마침 눈빛이 초롱초롱한 네팔 소녀가 가게로 들어섰다. 내게 서슴없이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더니 네팔어로 주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서 영어를 쏟아냈다.

"비욘드 네팔을 찾고 계신다고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아요? 비욘드 네팔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찾는 데 도움을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소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영어를 빠르게 구사했고 생소한 단어들을 나열했다. 나는 소녀에게 '비욘드 네팔'에서 몸담고 있는 정성미씨가 이메일을 통해 알려준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소녀는 가게 주인이 자신의 엄마의 언니, 이모라며 선뜻 전화기를 건네줬다. 하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다. 전화번호를 잘못 적어 온 것이 분명했다. 난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제가 아는 엔지오 단체가 있는데 그곳에서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소녀는 자신이 '비욘드 네팔'을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서 걸었다. 걸음걸이가 속사포로 쏟아대는 영어 실력만큼이나 빨랐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절룩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무작정 소녀를 뒤따랐다.
오래된 건축물로 들어차 있는 박타푸르 고궁으로 가는 길목. ⓒ 송성영
오래된 건물 앞에 앉아 있는 네팔 할머니.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마늘 꾸러미들이 인상적이다. ⓒ 송성영
소녀가 앞장서 걷고 있는 길 주변에는 고대도시처럼 오래된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소녀가 여기 저기 끼웃거리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비욘드 네팔'이라는 엔지오 단체를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다. 나는 혹시나 경찰서에서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경찰서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경찰서에서 물어보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경찰서 옆에 제가 아는 여성 단체가 있습니다. 그 건물에 게스트하우스도 있고요. 그곳에 가려면 고궁을 통과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박타푸르에 오래된 옛 왕궁인 고궁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고궁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궁 앞에는 매표소가 있었다. 네팔인들은 무료로 통과하는데 외국인들에게는 입장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매표소에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입장료가 나라별로 차등 적용 되는 듯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서로 국경을 제집 드나들 듯 왕래하는 인도 사람들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입장료가 저렴할 것이었다. 한국인에게 적용되는 입장료는 무려 1500루피였다. 가지고 있던 네팔 루피로는 부족했다.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고궁 근처에 있는 현금인출기를 찾아갔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기 위해 몇 차례 시도했다. 돈은 나오지 않고 자꾸만 에러 메시지가 뜬다. 현금카드에 문제가 있다며 해당 은행에 전화해서 물어 보라는 메시지도 뜬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포카라에서 돈을 뽑을 때 현금인출기를 사용할 줄 몰라 경비원의 손을 빌렸다.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그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비밀번호를 해킹 당한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부정적인 생각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당장 수중에 남은 현찰이 별로 없다. 네팔 돈 1천 루피에 인도 돈이 4천 루피 정도 남았다.

어쩔 수 없이 환전소를 찾아가 인도 루피를 네팔 루피로 환전했다. 현금인출기에서 뽑는 것에 비해 어느 정도 손해를 봤을 것이었지만 일일이 계산해서 따지고 싶지 않았다. 주는 대로 받았다. 숫자를 따지다보면 골치 아프다. 손해를 봤다 해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차라리 그 속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속편하다.

환전한 네팔 돈, 1500루피를 매표소에 내밀었다. 인도와 네팔에서 한 번에 이렇게 큰돈을 써본 적이 없다. 비욘드 네팔을 찾아주겠노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소녀에게 미안해 주저없이 표를 끊었다.

소녀는 나의 든든한 구원자였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고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 네팔의 옛 왕궁 전경 ⓒ 송성영
네팔 대지진 1년 전인 2014년에 찍은 사진이다. 대지진 당시 박타푸르의 고궁 또한 저 뽀족한 탑과 함께 상당 부분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송성영
고궁에는 너른 광장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정교한 고대건축물들이 들어차 있다. 세심하게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날이 어둡기 전에 '비욘드 네팔'을 찾아야 한다. 무한정 소녀에게 신세 질 수 없다. 고궁을 둘러볼 만큼 심적인 여유가 없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발 빠르게 앞장 서 걷는 소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소녀는 고궁 안에 자리한 경찰서에 들어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경찰서에서 여성단체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곧장 경찰서 부근에 있는 여성단체를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여성단체 건물 앞에 몇몇 네팔 여성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다. 소녀가 네팔어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내게 다가와 '비욘드 네팔'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아저씨, 배낭이 무거워 보이는데 먼저 게스트하우스부터 잡아 놓으시면 어떨까요?"
"괜찮아요. 일단 비욘드 네팔부터 찾아가는 게 좋겠네요."

생기발랄한 소녀는 거침이 없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삼촌 혹은 아저씨, '엉클'이라 불렀다. 소녀는 내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여행 가이드처럼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내 가며 인도에서 어디를 둘러봤느냐, 네팔은 처음 온 것이냐, 네팔에 와서 어디 어디를 다녀왔냐, 비욘드 네팔은 왜 찾고 있나 등등의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소녀의 유창한 영어 질문공세에 쩔쩔매가며 단답형으로 답해야 했다.

"아저씨, 이곳 박타푸르는 관광지라서 게스트하우스가 꽤 비싸요. 보통 700~800루피 정도 하고요. 비싼 곳은 천 루피가 넘는답니다."
"다른 지역보다 비싸네요."
"그런데 아저씨는 뭘 하는 분이세요? 혹시 수행자세요? 아저씨 모습이 요기 같아요."
"수행자는 아니지만 수행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해요."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직업이 따로 없어요. 한동안 농사를 지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 쓰는 작가로 생활했어요."
"정말요? 작가세요? 그럼 한국에서 책도 펴내셨겠네요?"
"세 권."
"어떤 글을 쓰세요. 소설? 시?"
"아니 그냥 생활 글... 그런데 학생은 어찌 그렇게 영어를 잘하나요?"
"저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다녀요.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과목이 많아요."

소녀의 이름은 씨라파 바지라찰리아(seerapa bajracharya). 내가 발음을 시원찮게 했는지 영어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불러준다. 나이는 열일곱 살, 우리나라 학생들로 치자면 고등학교 2학년. 인도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당찬 소녀, 씨라파가 점점 내 조카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씨라파의 친절한 미소가 마냥 고마워 뭔가 맛있는 저녁을 사주고 싶었지만 해지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1500루피의 거금을 들여놓고 고궁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채 '비욘드 카페'를 찾아갔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고궁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비욘드 네팔'에서 운영하는 '비욘드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씨라파를 만났던 구멍가게에서 불과 10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씨라파에게 무작정 엔지오 단체, '비욘드 네팔'만을 운운했으니 '비욘드 카페'는 미쳐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비욘드 네팔’에서 운영하고 있는 박타푸르 ‘비욘드 카페’. 이 카페를 코앞에 두고 1시간 넘게 헤맸다. ⓒ 송성영
우리는 카페에서 '비욘드 네팔'의 대표인 사치트씨를 만났다. <오마이뉴스>의 심규상 기자 소개로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된 정성미씨는 한국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보름 후에나 네팔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2008년 정성미씨와 함께 성공회대의 석사 프로그램인 아시아시민사회지도자과정(MAINS)을 마쳤다는 사치트씨의 한국어 실력은 나의 영어 실력 보다 월등했다.

그는 '비욘드 네팔'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다가 내가 깊이 있게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한국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 출신답게 아주 차분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정성미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와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사전정보를 숙지하고 있었다.

비욘드 네팔은 지속가능한 농업기술 보급 등을 통해 농민을 지원하고, 대안생리대 제작·보급('써질로 냅킨 프로젝트'), '럽시캔디' 판매망 구축 등을 통해 여성을 지원하는 등의 다양한 사업을 통해 열악한 네팔 농촌 환경 개선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사치트씨의 말에 따르면 '비욘드 네팔'과 관계를 맺고 있는 농촌 마을이 4군데가 있는데 모두 산간 지방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한 마을을 방문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산을 타고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친 무릎 때문에 그 산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가늠했다. 더욱이 그 마을에서 하루 정도만 머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정도 둘러보고 그 마을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생활상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말에 충분히 동의합니다."

내가 10여 년 동안의 농사 경험을 살려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마을에 숙소를 잡아 놓고 한 열흘 정도 머물면서 취재하고 싶다고 재차 말했더니 그 마을에 내가 머물 만한 숙소가 없어 하루 이틀 이상 머무는 것은 어렵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정성미씨를 믿고 취재를 하고자 했지만 언어 소통이 어려운 현지인들을 상대로 상세한 취재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결국 농민들과 함께 하는 '비욘드 네팔'의 생생한 활동을 취재 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난감했다.

하지만 그동안 인도, 네팔 여행을 통해 경험했던 것처럼 내 앞에 어떤 일이든 펼쳐지기 마련이었다. 사티드씨가 씩씩한 네팔 소녀, 씨라파와 네팔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내게 말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농사를 짓고 있다고요?"
"예, 고향으로 귀농을 해서 이곳 박타푸르를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막혔던 숨구멍이 뚫리는 듯했다. 그 먼거리에서 좀 더 깊이 있는 네팔의 농촌 생활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흥분된 어조로 씨라파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언제 이곳에 오시지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오시는데, 오늘이나 내일 오실 거예요."
"아, 잘됐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나요?"
"그럼요!"

씨라파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 통화를 하고나서 환하게 웃으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오신대요. 아저씨를 만나보시겠대요!"
"영어를 잘 하시나요?"
"아저씨와 영어 수준이 비슷해요."

소녀는 나의 든든한 구원자였다. 인도와 네팔을 대책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늘 이런 한없이 좋은 인연들을 만났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나를 돕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손길들이 다가왔다. 이들은 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란 말인가. 나를 돕는 신이 있다면 이들은 신의 메신저인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네팔 기사는 네팔 대지진이 일어났던 한 해 전인 2014년 5월~6월의 기록임을 재차 밝혀드립니다.

태그:#박타푸르, #네팔 소녀 씨라파, #박타푸르 왕궁., #비욘드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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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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