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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샌드위치
 양배추 샌드위치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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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 주위에 아이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그 친구가 꺼낸 '이상한 빵' 때문이다. 선생님이 학교에 먹을 것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 애는 종종 그 빵을 가지고 왔다. 담임선생님이 오시기 전 아침자습 시간에 먹으려는 것이다.

그 애와 나는 둘 다 맨 앞줄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사라진 지금까지도 그 애의 모습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노란 머리, 유난히 하얀 피부, 푸르스름한 눈동자. 그렇다고 텔레비전에서 보던 '미국사람'은 아니었다. 그 애는 친구들이 머리색을 가지고 놀릴 때마다 "염색을 한 것"이라고 당차게 대꾸했다. 한 번쯤은 다른 색으로 바꿀 만도 하건만, 그 애의 머리 색깔은 늘 같았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50명이 넘는 아이들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애가 '금기물품'을 꺼내면 그 즉시 친구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었다. 그 애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빵을 손으로 뜯었다. 그런데 아홉 살 내 눈에 그 빵은 참 희한해보였다. 식빵 사이에 빨간색으로 버무린 채소가 들어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엄마가 자주 상에 올리던, 먹기 싫어도 한 젓가락은 억지로 먹어야 했던, 고춧가루에 버무린 무생채, 딱 그거였다. 처음엔 친구들도 "이상한 걸 먹는다"며 그 애를 놀렸지만, 나중엔 놀리던 아이들이 제일 먼저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그 애가 빵을 꺼낼 때마다 무생채 맛이 떠올라 저절로 인상을 썼다.

빵을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애에게 나는 '착한 애'가 되었다. 어느 날, 그 애가 나를 집으로 불렀다. 이유가 남달랐다. 집에 엄마가 '있다'는 거였다.

그 애 집은 단칸방이던 우리 집보다 훨씬 작았다. 세간은 많지 않았고, 방 한쪽에 '디즈니 어린이 영어교실' 책 세트가 있었다. 그 애 엄마는 우리 엄마보다 훨씬 세련되고 젊었다. 내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애 아빠는 미국에 있고, 그래서 나중에 미국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듯 천천히, 분명히 말했다. 이 기억을 떠올릴 때면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한, 내 안의 목소리가 함께 따라온다. '저는 그 애를 한 번도 놀리지 않았어요.' 아마 그 애 엄마가 나를 혼낸다고 생각해 조금 억울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우린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다시 그 집에 간 적도 없다. 또래 관계에 친밀감이 생기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외동이어서일까. 그 애는 눈물이 많았다. 친구들이 놀리면 악을 쓰며 대들다가도 이내 책상에 엎드려 사춘기 소녀처럼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 그 애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케첩 뿌린 양배추 맛본 것은 몇 년 후 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빵에 든 것은 무생채가 아니다. 무생채는 물이 많이 생겨 식빵 사이에 넣으면 빵이 죽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케첩에 버무린 양배추였을 것이다. 당시 지방의 작은 동네에서 케첩은 핫도그에만 조금 뿌려 먹는 낯선 맛의 소스였다. 케첩을 뿌린 양배추를 맛본 것은 몇 년 후 일이다.

요즘 양배추를 잔뜩 넣은 샌드위치가 유행이다. '누마상 샌드위치'라 불리는 이것은 일본인 도예작가가 바쁜 아내를 위해 만든 것이다. 아내가 SNS에 사진과 사연을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이 샌드위치는 마요네즈에 버무린 양배추를 산처럼 높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높이 쌓는 것이 특징이다.

양배추가 삐져나오지 않도록 랩으로 단단히 감은 뒤 잠시 두었다가, 랩을 싼 채로 칼로 반을 자르면 먹기 편하다. 햄이나 치즈, 오이피클을 취향대로 골라 넣으면 훨씬 맛이 좋다. 단, 속 재료를 올리기 전, 식빵에 마요네즈나 버터, 씨겨자소스를 발라야 한다. 채소에서 나온 수분이 빵을 눅눅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나는 지금까지 이 누마상 샌드위치를 열 개도 넘게 만들어 먹었다. 양배추를 쌓을 때마다 삼십 년 전 그 애가 떠오른다. 양배추 샌드위치, 아니 무생채 샌드위치만큼이나 뭔가 낯설어 보였던 그 애의 외모와 행동들. 많이 외롭고 힘들었겠지. 어디서든, 잘 살고 있기를!

식빵을 살짝 구워 마요네즈를 바른다. 치즈, 슬라이스햄, 피클, 비트 등 원하는 재료를 취향 껏 올린다.
 식빵을 살짝 구워 마요네즈를 바른다. 치즈, 슬라이스햄, 피클, 비트 등 원하는 재료를 취향 껏 올린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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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에 버무린 양배추를 높이 쌓는다. 더 높이 쌓아도 괜찮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양배추를 높이 쌓는다. 더 높이 쌓아도 괜찮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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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으로 꼼꼼히 감싼 뒤 잠시 두었다가 칼로 반을 자른다. 양배추가 많이 들어가 씹는 맛이 아주 좋다.
 랩으로 꼼꼼히 감싼 뒤 잠시 두었다가 칼로 반을 자른다. 양배추가 많이 들어가 씹는 맛이 아주 좋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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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랩을 완전히 벗기지 않은 채로 먹어야 양배추가 흩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랩을 완전히 벗기지 않은 채로 먹어야 양배추가 흩어지지 않는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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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서 실렸습니다.



태그:#단짠단짠그림요리, #요리에세이, #양배추샌드위치, #누마상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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