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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한글 폰트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글자는 총 몇 자일까? 주목성이 중시되는 제목용 글자의 경우는 사용빈도가 높은 2350자, 가독성이 중요하고 모든 글자를 아우를 수 있는 본문용의 경우는 1만1172자가 필요하다.

디자인 방법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각기 미리 몇 벌씩 제작하여 서로 조합하는 조합형이 있고, 2350자면 2350자를 각각 독립적으로 디자인하여 만드는 완성형이 있다. 조합형이든지, 완성형이든지 1만1172자를 디자인하는 것은 디자인 감각뿐만 아니라, 디자이너의 인내와 끈기가 곁들여질 때 완성이 가능한 작업이다.

"'가'에 들어가는 기역이 길다면, '각'에 들어가는 기역은 받침이 있기 때문에 짧아지잖아요? '과'에 들어가는 기역 형태가 다르고요. 그런 식으로 기역의 형태를 다 잡아놓는 거죠."

또한 모바일과 LCD에 쓰이는 디지털 폰트는 수시로 환경에 따라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한다. 1만1172자의 폰트 디자인에 도전하고 있는 청년이 있다. 독립 폰트 디자이너 ZESS TYPE 현승재다. 유년 시절, 그래피티를 좋아했던 그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며 새벽에는 자신만의 레터링 작업을 하던 중 작년에 독립 디자이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한글과 관련된 그래픽을 했었는데, 글자와 관계된 작업이 제게 남게 되더라고요. 디자이너로서 사회활동을 마친 뒤에 폰트 디자인을 하려고 구상했었는데, 작년에 회사를 퇴사하고 폰트 디자인에 도전해본 거죠."

지난 7월 1일 합정동에서 그를 만났다.

폰트 디자이너 현승재
 폰트 디자이너 현승재
ⓒ 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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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한 살에 폰트 디자인 도전

그는 폰트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폰트 회사에 입사하여 배우는 것이었다. 한 폰트 전문 업체에 지원했다. 결과는 서류 탈락. 그는 이때의 경험이 폰트 작업에 독기를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작업 일지에 적었다.

"폰트 디자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다 보니까 방법론이라든지 도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이 폰트 회사밖에 없더라고요. 다른 디자인 영역과 비교하면 폐쇄적이었죠. 일단은 배워보고 싶어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입사하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할 것도 아니었어요. '가르쳐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배워서 하겠다' 였죠."

폰트 관련 작업에 대한 자료를 찾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2015년 폰트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서른한 살 때였다. 첫 번째 도전은 2350자의 '지블랙 오리지널과 네온사인' 폰트 디자인이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원의 후원금도 모았다. 그가 존경하는 폰트 디자이너 이용제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이용제 디자이너의 '바람체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인데 조언도 받았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폰트를 사용하는 후원자분들과의 소통이에요. 후원자분들이 의견을 주셔서 제가 혼자 작업하면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류에 대해서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어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블랙 오리지널 타입 2015
 지블랙 오리지널 타입 2015
ⓒ 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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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블랙 네온사인 타입 2015
 지블랙 네온사인 타입 2015
ⓒ 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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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블랙 폰트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는 폰트 디자인은 표현의 다양성이었지만, 정작 표현이 과해서 가독성, 사용성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영문 폰트는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글자 수가 얼마 안 되어서 디자인이 수월해서 다양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한글 폰트는 상대적으로 다양하지 않거든요. 표현이라든지 그래픽적인 요소가 다양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표현이 과해지니까 사람들이 사용을 못 하더라고요. 글자 자체는 예쁘다 할 수 있는데 정작 이것을 어디에 쓸 수 있느냐가 문제였죠. 지금은 그런 부분을 많이 고려해요. 사용성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1만1172자를 디자인하는 '비옴 프로젝트'

지난 6월에 새롭게 시작한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가 '비옴 폰트' 디자인이다. 창밖에 맺힌 빗방울에서 영감을 얻었다. 8월 20일 자정 전까지 펀딩 목표액 1000만 원이 달성되면 진행될 이번 도전은 1만1172자 전체를 디자인하는 것으로 그의 첫 시도이다.

비가온다 레터링 2013
 비가온다 레터링 2013
ⓒ 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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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가 된 것은 비가 그칠 즈음 창밖에 맺힌 빗방울을 보고 표현한 레터링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가독성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장식을 배제하면 비라는 느낌이 사라지죠. 수직적인 느낌들이 텍스트 안에서 나타나면 괜찮겠다 싶어서 가로 폭을 좁혀서 수직적인 느낌을 강조했어요. 또한 하나의 웨이트(글자 굵기)로만 제공하면 사용성이 떨어져서 얇은 웨이트에서 굵은 웨이트까지 다섯 가지 웨이트를 구성하게 되었어요."

그는 웨이트 표기에도 변화를 주었다. 영문 폰트 표기법이 아닌, 안개비(THIN), 가랑비 (LIGHT), 비(MEDIUM), 작달비(BOLD), 장대비(BLACK)다.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후원자는 라이선스 폰트 외에도 비옴 폰트로 디자인된 그의 산문집도 받을 수 있다.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이 폰트를 활용한 레퍼런스 가이드북 같은 느낌이에요. 이 폰트로 이런 식으로도 편집할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구성한 거죠."

그는 글자표현에 대해 탐구하는 'T. TABLE' 모임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창작 집단보다는 글자 표현이라든지 폰트 디자인에 대해 사람들이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어요. 폰트 디자이너가 모여서 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다각도의 시선으로 글자에 대해 나누는 모임이죠."

비옴 타입페이스 2016
 비옴 타입페이스 2016
ⓒ 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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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저작권 인식 변화 필요

"수년간 폰트 저작권 단속으로 어느 정도 경각심을 갖고 있긴 한데요. 본인이 생각해서 폰트의 저작권을 지켜야 한다는 것보다는 단속이 두려워서 지키게 되는 경우잖아요.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사람들이 폰트에 대한 저작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어요. 일러스트나 사진에 대해서는 저작권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데 폰트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것 같아요."

일을 직접 찾아서 하고 스케줄도 스스로 관리하는 독립 디자이너로 사는 삶이 직장인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잦은 야근 등의 업무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는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는 그는 고향인 제주도와 관련한 폰트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

"좀 더 배우고 나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나중에 제가 성숙해지고 난 다음에 작업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제주도에 추사 김정희 유적지가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도 영감을 얻어서 관련 자료를 모은 것도 있고요. 당장은 못하겠지만 멀리 내다보고 있어요. 10년 후 즈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텀블벅에 가면 비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tumblbug.com/b-om



태그:#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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